소설리스트

너클볼-192화 (193/287)

< 고향의 맛(3) >

고향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각별하다.

우습게도 그것은 항상 그곳에 사는 사람보다 그곳을 떠나 먼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더 그렇다.

필 니크로에게 애틀랜타가 그러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밀워키 브레이브스이던 시절 입단한 그는 무려 6년을 마이너에서 썩었고 다시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되는 데까지 4년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다시 16년.

그는 애틀랜타라는 이름 아래 만 18세부터 만 44세까지 무려 인생의 26년을 살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만 45세의 나이에 뉴욕 양키스로 적을 옮기고, 47세에 클리블랜드로. 그리고 마지막 1년 차의 8월 31일에 지명 할당되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그를 위해 그의 고향 팀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마지막 행사를 열어주었다.

지명 할당은 필 니크로와 같이 위대한 투수에게 어울리는 은퇴식이 아니다.

그들은 필 니크로의 마지막 경기를 위해 새로운 계약을 맺었고 필 니크로는 그 마지막 경기에서 3이닝 5실점을 기록했다.

-뭐,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지. 애틀랜타도 그 당시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꼴찌에서 2위. 메이저리그 전체로 했을 때 뒤에서 4등이었나? 하여간 그런 성적이 결정이 난 상황이었으니 나를 불렀던 거기도 했고. 하지만 노장의 마지막 경기로는 나쁘지 않았다. 이왕이면 이겼으면 조금 더 멋지긴 했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어쨌거나 애틀랜타에는 너클볼이라는 것이 그토록 애틋한 공이다. 뭐 그런 이야기지.

“아무리 그러셔도 거기 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게다가 애초에 영감님 활동하던 당시에 10살이던 애들도 지금은 7~80대 영감님들이거든요? 그분들이 기억하는 애틀랜타의 황금기는 매덕스, 글래빈, 스몰츠 시절이고요. 차라리 보스턴 쪽이 너클볼에 대한 향수는 더 진하죠. 최소한 팀 웨이크필드는 21세기 사람이잖습니까.”

-아니, 뭐 굳이 따지자면 디키도 말년엔 우리 팀에 와서······.

“딱 1년 뛰고 은퇴했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전 말년에 부산에 돌아가서 꿀 빨 생각입니다. 미국도 좋긴 한데, 역시 사람은 태어난 곳에서 살아야죠. 금의환향해서 아주 부산에 말뚝을 박아버릴 거에요.”

필 니크로가 놀라 소리쳤다.

-설마 그 부산이 마린스를 뜻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긴 왜 아닙니까. 마린스가 얼마나 좋은데요. 게다가 제 커리어 생각하면 어지간하면 바로 감독 직행도 가능할걸요?”

-코치연수도 없이?

“당연하죠. 마린스가 괜히 마린스인 줄 아십니까? 어차피 저 메이저에서 40대 넘어서 은퇴할 거고 그렇게 되면 연공 서열상 딱 제가 감독 한 번 할 나이입니다. 선수 1년 하고 감독 한 3년 하는 거죠.”

-아니, 아무리 마린스라도 그렇지······.

“대충 마지막 1년 차에 코치 연수받으면서 선수 생활한다고 하면 그만이죠. 어차피 다 말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보통이라면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그가 목격한 마린스의 막장성, 그리고 그 팀 내에 성민의 입지. 무엇보다 성민이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들을 고려할 때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맙소사 코치연수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일단 닥치고, 감독이라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인가.

-그 꼴을 직접 보느니 어떻게든 그 전에 성불해야겠구나.

“성불이요?”

필 니크로의 말에 성민이 깜짝 놀랐다.

성불이라니.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성민은 필 니크로가 함께 있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그가 떠난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한 것이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냐. 귀신도 올 때가 있으면 갈 때도 있는 법이지.

“아니,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말씀 하신 적 없었잖아요.”

-내가 이렇게 있는 것 자체가 정말 특별한 일이다. 어느 마음씨 넓은 양반의 선물 같은 거지.

“어느 마음씨 넓은 양반이요?”

-그 부분은 너도 나중에 죽어보면 알게 될 일이고.

“아니, 좋습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대체 성불은 언제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왜? 어떻게든 빨리 보내버리고 싶으냐?

필 니크로의 장난기 어린 대답에 성민이 진지하게 답했다.

“마음의 준비는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아서라. 아서. 원래 그런 건 때가 되면 다 이뤄지는 법이니까. 어쨌거나 넌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네가 말했던 대로 야구보다 유명한 선수나 돼보려무나. 네 녀석이 마린스 감독 같은 거 되는 걸 보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즐거운 일일 것 같으니 말이다.

“그건 말씀 안 하셔도 다 이룰 일이고요. 아, 잠깐만. 설마 내가 월드 클래스 급 선수가 되는 게 그 성불 조건인 겁니까?”

-왜? 그렇다고 답하면 나 보내기 싫다고 월클급 선수 안 되려고?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최대한 늦게 될 수도 있는 거고.”

-아서라. 아서. 괜히 그러다가 너 월드클래스 선수 되는 것도 못 보고 성불해버리는 수가 있으니.

성민은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나쁜 화질의 사진 속에 잘생긴 청년일 뿐이다.

그의 어머니인 권 여사는 종종 이렇게 이야기했다.

“넌 정말 생긴 건 네 아버지를 쏙 빼닮았어.”

뭐, 성민 자신이 봐도 얼굴만큼은 어머니인 권 여사보다 사진 속의 그 남자를 더 닮은 것 같긴 했다.

성민의 아버지가 성민에게 준 것은 결국 딱 이 얼굴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갈구한다.

성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항상 아버지라는 존재를 갈구해왔다. 어린 시절에는 마법처럼 아버지가 돌아와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해결해주길 바랐던 적도 있다. 어린 시절 그의 상상 속 아버지는 일종의 초인이었다.

물론 나이를 먹어가면서 성민은 더 이상 그런 유치한 상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른이 넘은 지금, 성민은 그 사진 속의 잘생긴 청년보다 더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민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부성애에 대한 갈망이 자신도 모르게 숨어 있었다. 그리고 필 니크로는 성민의 그런 갈망을 완벽하게 충족시켜주는 이상이었다.

“시간제한도 있다. 뭐 그런 말씀이네요.”

-아무래도 내가 괜한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하자꾸나. 세계의 구분은 명확해야 하는 법이다.

상당히 곤란해 보이는 필 니크로의 모습에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귀신을 옆에 두고 지금까지 사후 세계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니.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니.

“자, 그러면 다음 상대 연구나 다시 계속해보죠.”

성민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선수들의 자료를 펼쳤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당장 눈앞의 상대들이었다. 경기 외적인 부분으로 어떻게 홍보를 하건간에 그 모든 것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결국 성적을 내는 것이 기초가 돼야 했으니 말이다.

***

“오, 이거. 이거 아주 좋은 화면인데요?”

라이프 오브 헐리웃의 메인 작가인 제인 오스왈드가 성민이 연달아 홈런을 얻어맞는 자료를 보며 크게 기뻐했다.

이야기의 설정상 성민은 헐리웃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배우를 꿈꾸는 조이 제임슨과 동갑의 젊은 선수였다. 너무 잘나가는 모습만 보이는 건 이야기의 개연성에 걸맞지 않다. 물론 종종 놀라운 활약을 펼치는 스토리도 필요하다. 하지만 항상 승리만 해서야 이야기는 성립하기 힘들다.

하지만 기뻐하는 제인 오스왈드를 보는 총괄 PD. 제임스 볼로틴이 난색을 표했다.

“이게? 하지만······.”

“왜요? 뭐 문제 있어요?”

“그게 말이야. 자료 화면의 경우 구단, 그리고 선수 본인과 상의를 해서 내보내야 하거든.”

“그거야 상의하면 되잖아요. 뭐 문제가 있나요?”

“그게 아무래도 선수가 부진한 장면을 넣는 건······. 저쪽에서도 자기 PR을 위해서 이런 장면을 요구한 걸 텐데. 조금 어렵지 않을까?”

“뭐에요? 지금 그러면 극에서 이 선수가 실패하는 장면은 나오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아니지. 왜 안 되겠어. 실패해도 돼. 얼마든지 해도 괜찮지. 다만 그 야구적인 부분에서는······. 아니다. 야구 적으로 실패해도 괜찮아. 하지만 그거야 이야기로 슬쩍 할 수 있잖아. 굳이 이런 장면을 넣을 필요까지는······.”

제임스 볼로틴의 이야기에 제인 오스왈드가 크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참. 장면을 좀 보세요. 여기 조이가 자기 남자친구가 메이저리거라고 자랑을 크게 하는 순간에 실시간으로 이런 화면이 나와주는 장면이잖아요. 이걸 대사로 때우라고요?”

“휴, 알겠어. 그 부분은 내가 한 번 조율해볼게.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플랜 B는 생각을 해두라고.”

제인 오스왈드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가 이걸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장면 자체를 제거해버리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전국적으로 가장 인기가 있던 팀 중 하나였다. 심지어 한 때는 메이저 최고의 팀인 뉴욕 양키스의 아성에 도전할 만큼 말이다.

당시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존 스몰츠로 이어지는 선발 라인업은 메이저 150년 역사를 통틀어 유래를 찾기 힘든 강력한 것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사기적이었냐면 91년부터 98년까지 브레이브스가 가져온 사이영상만 무려 여섯 개다. 심지어 그중 하나는 92년. 그렉 매덕스가 아직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소속이 아니던 시절 따냈던 상이다.

즉, 91년부터 98년까지 그들에게 사이 영 상을 한 번이라도 빼앗은 투수는 페드로 마르티네즈라는 메이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을 가진 투수뿐이라는 뜻이 된다.

이렇듯 평생 찬란할 것 같았던 그들의 아성이 무너진 것은, 2000년대 강진호와 프레스톤 윌슨을 필두로 한 메츠 왕조의 시작. 그리고 빌어먹을 전(前) 구단주 타임워너의 중계권 호구 계약, 아니 사실상의 횡령 때문이었다.

메이저리그 구단의 수입은 크게 세 가지다.

입장 수입, 굿즈 판매. 그리고 중계권료. 그중 가장 큰 것은 누가 뭐래도 중계권료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전 구단주인 타임워너가 내부 거래를 통해 중계권료를 헐값에 팔아넘겼었다. 그것도 그들이 전국구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전성기에.

물론 2013년 일부 재계약이 이뤄지면서 생각했던 것처럼 최악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계약이 엉망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2034년.

엉망이었던 계약은 이미 7년 전에 끝났고, 구단은 이제 정상적으로 돈을 벌고 있다.

하지만 엉망인 중계권이 이어진 세월이 무려 25년이다. 특히 2010년대 이후 연평균 1억 달러. 최고 2억 4천만 달러씩 받는 계약을 맺었던 다른 팀들에 비하자면 10~20%밖에 되지 않는 돈을 받았던 기간이 장장 17년이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분명히 망가졌었고, 아직도 그것은 완벽하게 치유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재정적인 건전성을 위해 앞으로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보스턴은 그런 팀을 상대로 지난 4년 동안 8연패를 당했다. 뭐 그런 이야기죠. 심지어 필리스는 그래도 여덟 번 중에 세 번은 이겼었는데 말이에요.”

그런 팀이 있다.

이상하게 전력과 상관없이 우리 팀을 호구 잡는 그런 팀.

분명 우리가 객관적으로 더 괜찮은데도 펑펑 터져 나가는 그런 팀.

물론 지난 4년 동안 보스턴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애틀랜타라고 딱히 잘 나가지는 않았다. 그들도 보스턴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보스턴과 인터리그가 있는 해에는 이상하게 성적이 괜찮았다. 특히 보스턴을 잡아먹은 이후에는 더더욱. 심지어 2년 전에는 와일드카드로 가을야구까지 경험했다. 물론 한 경기 만에 광탈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들 입장에서 보스턴은 보약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홈구장인 트루이스트 파크.

그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보약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 고향의 맛(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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