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91화 (192/287)

< 고향의 맛(2) >

[김성민 선수, 오늘 컨디션이 상당히 좋지 않은 모습입니다. 구속이 영 나오지 않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오늘 최고 구속이 88.9마일로 평소보다 1마일가량 덜 나오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타자를 상대로 너클볼을.

-딱!!

타구가 낮게 깔렸다.

3루 방향으로 흐르는 타구.

매튜 쿠퍼가 빠르게 달려나가 글러브를 들이밀었다.

물론 지금까지 높은 확률로 그래왔던 것처럼 타구가 글러브를, 아니 글러브가 타구를 마법처럼 피해갔다.

원아웃 주자 1루.

[아, 이건 너무 아쉽네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공 정도는 잡아줘야죠.]

짜증이 치솟는다.

고작 저런 공도 처리하지 못하다니.

필 니크로가 성민을 바라봤다.

그저 침을 한번 퉤 뱉고 모자를 고쳐 썼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이 짜증의 방향은 누구인가. 과연 매튜 쿠퍼의 어설픈 수비인가?

천만에.

저 녀석이 저러는 건 변수가 아니다. 상수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무엇 때문에 짜증이 났는가.

답은 분명했다.

노곤한 몸. 엉망진창인 컨디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플레이.

매튜 쿠퍼의 어설픈 수비는 그저 마지막의 한 톨일 뿐이다. 성민이 다시 한번 자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딱!!

[아!!!]

최악의 결과가 이어졌다.

두 번째 홈런.

공을 쳐 낸 볼티모어의 타자 자신조차도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5회 초, 2점 홈런 이후 안타. 그리고 또 다시 2점 홈런!!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4:3으로 경기를 뒤집어놓습니다.]

1이닝 4실점.

투수 코치가 마운드를 찾았다.

“성민, 괜찮아?”

“네, 그냥 손이 좀 미끄러졌어요. 괜찮습니다.”

단단한 표정.

절대 흔들리는 얼굴은 아니었다. 투수 코치가 성민의 어깨를 두 번 툭툭 두들기고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필 니크로는 여전히 성민에게 아무 말을 걸지 않았다.

심장은 평온했다.

‘방금은 실투도 아니고 분명 제대로 던졌거든요.’

-가끔은 실투가 아닌 공, 아니 가장 잘 던진 공도 이름 없는 타자의 스윙에 담장 밖으로 넘어가는 곳이 메이저리그지.

머리를 두 번 휘휘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그래, 야구란 원래 이런 게임이다. 그동안은 야구가 너무 쉬웠다.

필 니크로를 만나기 전에 야구는 항상 그랬었다. 이건 익숙한 맛이다.

“아니지, 이 정도면 오히려 순한 맛이지.”

심지어 아마 야구도, 퓨처스도, KBO도 아닌 무려 메이저리그다.

그 익숙한 맛을 삼키며 성민이 다음 타자를 상대했다.

내야 땅볼 아웃.

성민이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아, 참 아쉽습니다. 5회 초, 투아웃 상황에서 무려 4점을 더 내주고 이닝이 마무리되네요.]

[앞선 2점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지막 2점의 경우는 매튜 선수가 땅볼을 조금만 제대로 처리해줬더라면 내줄 필요가 없었던 점수라는 점에서 더 안타깝습니다.]

-매튜 저건 갓직히 에러 줘야 하는 거 아님?-

-뭐야? 저거 안타로 기록 됨?-

-어, 아마 그거 정상적으로 잡아서 1루에 던졌어도 세이프였다 뭐 그렇게 판단한 듯.-

-어, 완전 짜증나네. 성민이 무난하게 이달의 투수 타나 했더니. 4자책이면 좀 빡센데?-

-근데 매튜꺼 에러로 기록되면 뭐 달라짐? 어차피 점수는 홈런으로 났잖아.-

-달라지지. 저거 정상적으로 아웃 됐으면 쓰리 아웃으로 종료잖아. 그러니까 뒤에 2점이 전부 비자책으로 바뀜.-

-개똥 같네.-

5회 말.

4:3

그 뜻밖의 상황에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기세가 눈에 띄게 치솟았다. 반면 보스턴의 덕아웃은 조용해졌다. 그들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물론 성민이 등판한 경기에서 패배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민이 강판된 이후 불펜이 불을 질렀을 때였다.

“뭐야? 왜 죄다 나라 잃어버린 얼굴들을 하는 거야. 물론 나에게 거는 기대가 큰 건 나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도 사람인데. 가끔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안 그래?”

“성민······.”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성민의 이야기를 받아 목청을 높였다.

“성민 말이 맞아. 우리 야구 하루 이틀 하는 거 아니잖아. 기껏해야 1점 차이야. 이거 안 뒤집을 거야? 어이, 매튜. 뭐야? 고작 1점이잖아. 홈런 한 방이면 제 자리 돌아가는 건데 자신 없어?”

“자신이 없기는 누가 없습니까. 기다려봐요.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우고 올 테니까.”

필 니크로가 눈을 반짝였다.

-성민아, 어쩌면 우리 오늘 재밌는 구경을 할 지도 모르겠다.

‘재밌는 구경이요?’

-그래, 이 경기 왠지 냄새가 난다. 대첩의 냄새가!! 게다가 보통 대첩이 되면 항상 속이 터지는 쪽이었는데 왠지 이번에는 반대쪽이 될 것 같단 말이지.

미국 대륙으로 한정했을 때 최고의 KBO 전문가가 대첩을 단정했다.

그리고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그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패배를 양보하지 않는 싸움은 KBO 고유의 문화. 혹은 마린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필 니크로가 잠시 반성했다.

5회 말.

투수가 무려 3번이 바뀌었다.

물론 보스턴의 빠따는 핵타선이다. 충분히 상대 팀을 터트릴 수 있다. 하지만 그 터짐의 과정에서 보스턴 빠따의 공이 4할이라면 나머지 6할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야수들. 그리고 불펜의 공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중 백미는 중견수인 키케 산체스가 보여준 수비였다.

매튜 쿠퍼가 쳐낸 큼지막한 타구를 잡아내기 위해 펜스를 잡고 멋지게 몸을 띄웠다. 그의 판단에 따르자면 이 공은 아슬아슬하게 펜스를 넘어갈 홈런이다. 이걸 잡아내기만 한다면 아마 이번 수비는 몇 년은 하이라이트 필름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꿈은 더 크게 이뤄졌다.

아마 이번 수비는 몇 년을 넘어 몇십 년은 거뜬히 하이라이트 필름으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어?]

[아?]

[응?]

키케 산체스가 아슬아슬하게 펜스를 넘어갈 것이라 판단한 타구가 떨어진 곳은 워닝 트랙 코앞. 그가 그것을 눈치 챈 것은 타구가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재빨리 잡고 있던 펜스를 놔버리고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될 리가.

글러브를 피한 타구가 바닥을 크게 튕겨 펜웨이파크의 악명 높은 중앙 삼각지대로 쑥 들어갔다. 펜스를 튕긴 공이 커버를 위해 달려 온 우익수를 피해 달아났다.

삽시간에 벌어지는 예능.

경기를 지켜보던 필 니크로가 크게 웃었다.

-크크크, 그래 이 맛이지!!

원아웃 주자 1, 2루 상황에서 1루 주자까지도 홈까지 들어올 만큼 긴 시간.

순식간에 4:3의 점수 차이가 5:4로 뒤집혔다.

간신히 역전승을 거둘 것 같은 상황을 만들었는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실책으로 2점을 내주다니.

볼티모어의 코치진이 마운드에 올라 투수를 다독였다. 하지만 오늘 볼티모어의 마운드를 지키는 투수는 성민과는 달랐다. 깨져버린 멘탈이 수습되는데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볼넷을 하나 추가하여 원아웃 주자 1, 3루.

그리고 이어지는 힛 바이 피치.

원아웃 만루 상황에서 결국 볼티모어의 덕아웃이 불펜을 가동했다.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불펜이 올라가고, 불을 지르고, 다시 다음 불펜이 올라가서 거기에 기름을 부어 완전히 산화시킨 다음 새로운 불펜이 올라왔다.

-후, 정말 상쾌하군. 이게 평소 마린스를 상대하던 팀들의 기분이었던가?

‘아니거든요.’

6회 초.

성민이 마운드에 올라왔을 때 점수는 이미 11:4.

직전 이닝의 역전으로 불타오르던 볼티모어의 기세는 이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물론 성민의 몸 상태는 여전히 최선은 아니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최선보다 최악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때 과감해지지 않는다면 언제 과감해지겠습니까.’

-옳은 이야기!!

성민의 72.4마일 너클볼이 존의 복판을 공략했다.

-부웅!!

“스트라잌!!”

조금 더 과감하게.

한, 두 방 얻어맞는 것 정도는 상관없다는 기세로.

너클볼은 애초에 그런 공이다.

손을 떠난 이후는 투수 본인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가져야 하는 것은 너클볼, 그리고 그 너클볼을 던지는 자신을 향한 무한한 확신뿐.

6회 초.

성민의 너클볼이 볼티모어의 타자들을 농락했다.

[김성민 6이닝 7피안타 2피홈런 4실점!! 시즌 5승 수확!!]

[보스턴 레드삭스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15:7 대승!!]

[키케 산체스!! 10년에 한 번 나올법한 수비 실수.]

-성민이 1이닝 2홈런 맞았을 때는 죽을 것 같았는데 볼티모어 수비 보고 대폭소.-

-그걸 보고 대폭소를 할 수 있었다니······, 부럽다. 난 뭔가 오늘 저녁 우리 팀 경기가 생각나서 울적해졌는데.-

-너 대전 피닉스 팬이냐?-

-대전 피닉스는 무슨. 내가 대전 피닉스만 됐어도 이렇게 슬프지는 않지. 내 팀은······.-

-그만!! 어느 팀인지는 말하지 마라. 우리 모두 공감하고 있으니까.-

-근데 전지적 성민 입장으로 경기 볼 때는 꿀맛이었음. 매일 그런 수비 때문에 고통 받는거 보기만 하다가 그것 덕분에 꿀을 빠는데. 크, 이게 바로 마린스랑 붙을 때 다른 팀들 마음이구나 싶었음.-

-근데 메이저리그도 그딴 실수를 하네. 거긴 크보 최상급 수비가 가도 그 포지션 지키는 거 장담 못 하는 리그 아니었음?-

-그건 맞음. 실제로 NPB 최고의 유격수들이 가도 유격수 자리 못 지키고 밀려나는 리그니까. 근데 그래봤자 걔들도 사람임. 박진만이라고 에러 안 했겠음? 그리고 김성민으로 므르브 처음 접한 애들이 좀 환상을 갖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다저스가 그냥 미쳤던 거고 므르브도 다 사람 사는 곳임.-

-그것도 그렇고 키케 산체스가 원래 수비 못하기로 유명한 중견수임. 발은 빠른데 타구판단이 좀 구려서. 게다가 펜웨이파크가 중앙에 그 괴랄한 삼각지대 때문에 수비가 더러움.-

-어쨌거나 중요한 건 결국 성민이가 이겼다는 거지. 그리고 4자책이라서 평자책이 1.86으로 올라가긴 했는데, 노히트 노런도 있고 남은 경기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평자책 1위는 다시 가능함. 아직 이달의 투수 쌉가능.-

-난 개인적으로 두 번째 홈런은 나중에 수정될 가능성도 있다고 봄. 그거 실책으로 안 한거 진짜 에바임.-

***

앞서 몇 번이나 설명했던 것처럼 메이저리그는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의 양대 리그, 그리고 각 리그를 동부 중부 서부로 나눈 6개 지구로 운영이 된다.

76경기는 같은 리그 같은 지구 팀끼리.

66경기는 같은 리그 다른 지구 팀들과.

그리고 20경기는 다른 리그의 팀들과.

그 20경기 중에서 다른 리그 팀들과 지구 단위로 순환하는 경기는 총 14경기에서 16경기.

나머지 4~6경기는 매년 시행하는 라이벌 매치다.

보통은 전통적인 라이벌 관계를 기반으로 만들지만, 사실 9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팀도 많은 상황에서 반쯤은 억지로 생성된 라이벌 역시 많다.

하지만 그런 억지 라이벌 조차도 만들 수 없는 팀이 몇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보스턴 레드삭스다.

그렇기에 보스턴 레드삭스는 격년으로 두 개의 팀을 인터리그에서 상대한다. 그 두 개 팀 역시 마찬가지로 라이벌 매치가 없는 남는 팀들이다.

작년 보스턴 레드삭스가 상대했던 팀은 사상 최초의 만패 구단 필라델피아 필리스였다. 물론 작년의 보스턴은 메이저 최약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팀이었고, 덕분에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꿀을 빨았다.

그리고 올 시즌.

“다들 명심해. 이번이 분위기를 반전시킬 기회야.”

“그래, 지난 4년간 여덟 번의 경기에서 우리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어. 그건 이번 시리즈도 마찬가지일 거다. 다들 알겠어?”

“네!!”

이번 시즌 그들은 영 좋지 못 했다.

하지만 아직 5월에 불과하다. 보약을 먹고 기운을 낸다면 아직 승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성민은······.”

“그래, 작년 녀석의 공은 대단했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게다가 작년 녀석의 팀은 다저스였어. 올해는 고작 보스턴이야.”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야!! 며칠 전 녀석이 볼티모어와의 경기에서 2홈런 허용하면서 4실점이나 했던 걸 잊지 마. 충분히 공략할 수 있어.”

어느 영감님의 고향 팀이 성민을 상대로 강력한 의지를 불태웠다.

[김성민 5월 마지막 등판. 상대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 고향의 맛(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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