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의 맛(1) >
지난 탬파베이와의 경기에서 노히터를 기록했던 만큼 성민의 5월 성적은 매우 훌륭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개막 이후 성민의 성적은 꾸준히 훌륭했다. 다만 4월 한 달로 끊어서 봤을 경우 조금 더 미쳐 날뛴 투수가 있었던 탓에 4월 이달의 선수를 받지 못했을 뿐이다.
사실 일 년으로 따지면 4점대의 투수라도 한 달 단위로 끊어 볼 경우 27이닝 무실점 같은 경우도 종종 존재했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김성민 5월 이달의 투수 정조준!!]
[노모, 이라부에 이어 아시아인 가운데 역대 세 번째 2회 수상 가능할까?]
-사이 영 2위에 MVP 7위까지 했던 투수인데 그깟 이달의 투수지.-
-팩트) 다르빗슈는 사이 영 2위를 했지만, 이달의 투수는 한 번도 타지 못했다.-
-이번 시즌 보스턴은 글렀지만, 성민이 느낌은 좋다. 이대로 사이 영 가즈아~-
-지금 성민이 평자책 0.78이잖아. 거기다 노히트 노런도 있고 이제 이번 달 남은 일정이 두 경기인데 성민이 제외하고 제일 괜찮은 애가 1.41임 ㅋㅋㅋ 이달의 투수는 거의 백퍼라고 봐야지.-
-근데 이달의 투수는 표본이 작아서 하나 말아먹으면 확확 바뀌잖아. 확신하긴 힘들지.-
이어지는 성민의 등판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홈경기.
조금 차이가 나기는 했지만, 작년 기준 보스턴 레드삭스에 이어 동부지구의 4위를 기록했다.
과연 메이저리그의 최약체는 어디일까?
어려운 질문이다.
2034년 현재 역사가 50년이 조금 넘는 KBO만 하더라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이론이 분분할 것이다. 예컨대 부산이라든지, 대전이라든지, 마린스라든지. 다양한 답변이 나올 수 있다.
메이저리그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더 어렵다. 150년이 넘는 역사. 30개의 팀. 대체 누가 최약체인지를 가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KBO의 부산이나 대전이나 마린스처럼 특정되는 몇 개의 팀 정도는 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어떤 방식으로 그 몇 개의 팀을 뽑는다고 해도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는 팀이었다. KBO로 치자면 마치 마린스 같다고 해야 할까?
물론 역사적으로 봤을 때 최약체라고 해서 항상 약하리라는 법은 없다. 심지어 마린스조차도 성민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2년 전에 무려 ‘통합우승’을 차지했다. 게다가 50년 역사에 한국 시리즈 우승은 ‘두 번이나’ 더 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라고 해서 그런 순간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2034년의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그냥 항상 그렇듯 평소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였다.
몇몇 특출난 타자가 있긴 했지만 그게 팀의 성적을 좌우할 수는 없었다. 당장 KBO만 봐도 과거 마린스는 트리플크라운(타율, 타점, 홈런)을 기록한 타자를 가지고 8개 팀 중에서 7위를 했던 적도 있었고 타격 7관왕(도루 제외) 타자를 가지고도 8개 팀 중에서 4위를 기록했었다.
하물며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가장 특출난 타자인 릭 머레이는 7관왕은커녕 트리플크라운과도 거리가 먼 남자였다. 즉 그들이 지난 시즌 동부지구 4위를 한 것은 그저 보스턴 레드삭스라는 압도적인 팀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들에게 꼴찌를 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2034년 현재.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자신들의 기량을 어김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1회 깔끔한 삼자범퇴.
성민이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흐음······.
‘전 괜찮으니까 그런 눈으로 안 보셔도 됩니다. 결과도 나쁘지 않았잖아요.’
-그래, 뭐 사람이 1년 내내 최고의 상태일 수는 없겠지.
애매했다.
차라리 어딘가에 담이 왔다든지, 열이 있다든지 무언가 뚜렷한 증상이 있다면 등판을 미뤘을 것이다. 하지만 딱히 그런 특정할만한 증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몸이 조금 노곤하고 찌뿌둥하다는 정도?
‘뭐, 확실히 하루 더 쉬긴 했지만, 그래도 9이닝 던진 게 좀 영향이 있긴 하네요.’
-아무래도 투구 수가 121개나 됐으니까.
필 니크로의 눈에 보이는 성민의 몸에는 딱히 문제라고 할 부분은 없었다.
지금 성민은 그저 피로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피로라는 것을 절대 우습게 볼 수는 없었다. 사실상 대부분의 선수가, 그리고 감독들이 가장 크게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 피로라는 녀석이었다.
야구에서는 단기간의 퍼포먼스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누적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이 피로 관리다. 실제로 160짜리 공을 던지는 재능만큼이나 높게 평가받는 것이 162경기를 출장할 수 있는 체력이다.
괜히 철인 칼 립켄 주니어의 2632경기 연속 출장을 메이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록 중 하나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느린 너클볼을 중심으로 둔 패턴으로 가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오늘은 속구가 영 안 뻗네요.’
보스턴의 공격이 시작됐다.
선두 타자인 제롬 스튜버츠의 타석.
파울, 파울, 볼, 파울.
그리고
-딱!!
몸쪽 깊숙하게 들어온 공을 두들겼다.
유격수 정면.
이건 답이 없다.
하지만 일루까지 설렁설렁 뛰는 일은 없었다. 목숨을 걸고 미친 듯이 달라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트집 잡히지는 않을 속도로 일루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살렸다.
“세이프!!”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유격수가 공을 헛짚었다. 게다가 그것 때문에 당황한 탓인지 송구도 그리 좋지 못했다.
비디오 판정을 걸어볼 여지도 없는 완벽한 세이프.
필 니크로가 감탄했다.
-도, 동엽이?
‘갑자기 동엽이는 무슨 동엽입니까. 그리고 요즘에는 동엽이도 야구 잘해요.’
-아니, 나도 모르게 그만.
상대가 병신이면 우리는 상병신.
상대가 병신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병신.
필 니크로가 기억하는 KBO 시절의 추억은 그러했다.
그리고 도저히 마린스 시절과 같은 1년이라고 믿기 힘든 다저스에서의 그 짧았던 행복의 시간이 지나고 지금 필 니크로가 보는 보스턴 레드삭스는 그나마 공격은 되는 마린스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진정한 MLB의 마린스는 따로 있었다.
그래, 저것에 비하자면 보스턴 레드삭스는
-그래도 대전 피닉스 정도는 된다 이 말인가?
‘아니, 그런데 대체 아까 전부터 KBO 이야기는 왜 계속 꺼내는 겁니까.’
-너는 전혀 느껴지지 않느냐? 저 낯선 팀에게서 풍겨 나오는 익숙한 향기가?
‘향기요?’
-오늘은 왠지 대첩의 느낌이 나는군.
‘아니, 대첩이면 우리 팀도 터져야 하는 거잖습니까. 거 무슨 악담을 그런 식으로!!’
-딱!!
매튜 쿠퍼의 방망이가 내야를 뚫어내는 타구를 만들었다.
노아웃 주자 1, 3루.
타석에 랄로 가야르도가 들어왔다.
-부웅!!
시원한 어퍼스윙.
-부우웅!!
한층 더 시원한 어퍼스윙.
-부우우우우웅!!!
너무 시원해서 이제는 서늘하기까지 한 어퍼스윙.
“츄라잌!! 아웃!!”
1회 초.
노아웃 주자 1, 3루에서 보스턴이 딱 1점을 뽑아냈다.
‘뭐 이럴 때도 있는 거죠. 원래 타자는 3할만 쳐도 잘 치는 거 아닙니까.’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마운드의 성민이 크게 호흡했다.
몸 상태가 별로인 채로 경기에 임하는 것이 처음도 아니다. 속구의 구속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상관없다. 그걸 빼놓는다고 해도 성민의 너클볼은 이미 수준급이다.
초구.
60마일의 느린 너클볼.
커리어 317개의 홈런을 기록 중인 볼티모어의 4번 타자가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러 성민의 공을 노렸다.
-딱!!
깔끔한 스윙에 강력한 파워.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힘이라고 해도 제대로 그 힘을 전달하지 못해서야 좋은 타구를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마지막 순간 방망이를 희롱하듯 움직인 공이 스윗스팟을 완벽하게 벗어났다. 그렇게 바닥을 찍은 타구가 크게 파울라인을 벗어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너클볼에 또 다시 파울.
순식간에 볼카운트는 0-2
세 번째 공이 존을 공략했다.
-딱!!
이번에도 어김없이 튀어나온 방망이가 공의 윗동을 두들겼다. 바닥을 크게 찍고 튀어 오른 타구. 일루수인 랄로 가야르도가 재빠르게 공을 처리하러 달려 나왔다.
그 사이 성민이 일루 베이스를 밟고 랄로의 송구를 기다렸다.
‘침착하게.’
아직 며칠 되지 않았지만, 마이클 고메스와의 훈련에서 항상 강조했던 것은 대부분 일루 수비는 그리 급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침착하게 공을 잡아서 일루에 던져도 늦지 않는다.
대부분의 타구는 타자의 달리기보다 빠르고, 뛰어나가는 랄로 가야르도 역시 어지간한 타자보다는 빠르다. 가볍게 공을 잡아서 그냥 일루에 던지기만 하면 된다.
바로 이렇게!!
-뻐엉!!
“아웃!!”
심판의 손이 올라왔다.
사실 대단할 것은 없는 수비였다. 당연히 해내야 하는 수비. 게다가 실책을 범하는 장면들이 너무 강조돼서 그렇지, 랄로 가야르도 역시 이런 수비 정도는 너끈하게 해낸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점은 이토록 여유롭게 움직였는데도 불구하고 볼 것도 없는 포스 아웃이었다는 점이었다.
“잘했어. 랄로.”
“당연히 해야 할 걸 했을 뿐인걸요.”
“그러니까 잘했다는 거야. 야구라는 게 원래 당연히 해야 할 것만 다 해내면 어지간하면 이기는 거 거든.”
성민의 칭찬에 랄로 가야르도가 멋쩍게 웃었다.
경기가 계속됐다.
필 니크로의 예언과 달리 보스턴의 야수들은 오늘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았다. 물론 실력 자체가 부족했던 부분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정도는 변수라기보다는 상수였으니 상관없었다.
진짜 문제는 성민 자신이었다
2회와 3회 그리고 4회까지도 그래도 꾸역꾸역 괜찮았다.
하지만 5회.
세 번째 타순.
그리고 축적된 피로로 인해 급격하게 방전된 체력.
-딱!!
[아!!!]
[릭 머레이!! 강한 타구!! 좌측 담장을!! 좌측 담장을!! 넘어갑니다.]
[릭 머레이!! 71.2마일의 너클볼을 그대로 넘겨버리네요.]
‘젠장,’
흔하게 있을 수 있는 실투였다.
사실 KBO 시절을 생각해본다면 이건 실투라고 볼 수도 없었다. 거기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공으로 타자의 헛스윙을 이끌어낼 수도 있는 수준의 너클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MLB였고 릭 머레이는 이 정도 공이라면 너끈히 담장 너머로 넘길 수 있는 메이저 정상급의 타자였다.
앞서 내보냈던 선행 주자까지 홈으로 불러오는 2점 홈런.
성민이 신경질적으로 모자를 고쳐 썼다.
-성민아.
‘저도 압니다.’
피로의 문제는 육체의 성능을 저하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피곤한 사람은 조금 더 신경질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정신력이니 어쩌니 많이들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 정신이라는 것도 육체에 종속된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성민 스스로가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통이라면 제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한참을 짜증 낼 만한 상황에서 성민은 그저 나지막한 욕 한마디로 자신을 추슬렀다.
‘던지는 순간 이것 좀 별론데? 했는데 역시 나네요.’
필 니크로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성민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의 기대 이상이기 때문이다. 4년 전 첫 만남을 생각하면 정말 괄목상대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예전의 성민 역시 점수를 내주고, 혹은 홈런을 맞고 훌훌 털어 버리는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실수였기 때문이다. 경기가, 그리고 자신의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추스른다? 이 애새끼가?
필 니크로가 웃었다.
좋을 때 기세를 살려 잘 던지는 투수는 제법 많다.
하지만 안 좋을 때 어떻게든 자신을 추슬러가며 꾸역꾸역 던질 수 있는 투수는 드물다.
필 니크로와의 4년.
성민은 그런 드문 투수로 발전하고 있었다.
< 고향의 맛(1) > 끝
ⓒ 묘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