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1) >
부산.
마린스의 도시.
“아!!”
20대 중반 즈음 됐을까?
한 남자의 탄식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꽤 번듯한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부산의 집값이 서울에 비하면 반의 반절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보증금만 최소 억 단위의 돈이 필요한 집이었다.
어지간한 부잣집 자식이 아니라면 제법 이른 나이에 사회적 성공을 거둔 이만이 거주할 수 있는 그 집의 거주자는 다름 아닌 동엽이었다.
바로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구단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했었지만, 작년 골드글러브 수상 이후 제법 높아진 연봉을 오피스텔 보증금으로 활용하여 과감한 독립을 실행에 옮겼다.
이유는 사실 별 건 없었다. 아니, 세상 대부분의 일이 거기서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이유일지도······.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그러면 일단 자취를 시작해야지. 룸메이트가 있는 기숙사 생활을 하는 주제에 여자를 어떻게 만나겠다는 거야.”
팀의 선배인 호섭이 해준 이야기였다.
실로 금과옥조 같은 이야기다. 실제로 혼자 사는 사람과 가족과 동거하는 사람의 연애 비율은 유의미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지. 이 이야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다.
어찌 됐건 안 생길 놈은 안 생긴다.
사실 조건만 따지자면 동엽은 어디 하나 꿀리는 것이 없었다.
한국식 나이로 올해 25세에 불과한데 벌써 억대의 연봉자다. 게다가 나름대로 유명세도 있다. 조금 땅땅한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운동선수답게 체격도 건장하고 순발력이 중요한 유격수답게 야구 선수 하면 떠올리는 배 나온 아저씨 체형도 아니다.
얼굴도······. 으음······.
“솔직히 이 정도면 잘생긴 편 아닌가?”
뭐, 얼굴도 이 정도면 크게 못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오피스텔을 얻은 지 다섯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만나는 여자 하나 없이 홀로 방구석을 긁는 신세였다.
그래, 앞선 몇 달은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에 들어가는 바람에 바빴다고 하자. 하지만 시즌이 시작된 이후 무려 소개팅만 다섯 번을 받았음에도 모조리 나가리인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젠장, 이 자식들은 대체 뭘 안다고!! 어? 우타자가 당겨친 2, 3루 간 땅볼 타구가 얼마나 처리하기 어려운데. 거기다가 잔디가 파여있어서 오른쪽으로 확 튕겨 들어왔다고!!”
하지만 부산에서 동엽의 평판을 생각한다면 또 아주 완벽히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사실 부산은 세계에서 동엽에 대한 평판이 가장 나쁜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KBO에서 제법 대단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팀의 팬들이 평가를 절하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실제로 KBO 역사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누적을 쌓은 어느 유격수의 경우도 커리어 내내 자기 팀의 팬들에게는 굴욕적인 평가를 당했다.
동엽 역시 그와 비슷했다.
-KBO의 현역 유격수 가운데 최고.-
-현재 KBO에서 활동 중인 야수 가운데 해외 진출을 노려볼만한 유일한 선수.-
라는 평가를 하는 것은 주로 서울의 3개 팀 팬들과 이상하게 동엽에게 많이 두들겨 맞는 대전의 평가였다.
-양계장 박 씨.-
-겉멋 수비의 선두주자.-
-팀의 승리와 상관없을 때만 터지는 타격!! 영양가 없는 졸렬한 스탯 관리의 결정체.-
그리고 이것이 부산 팬들의 동엽에 대한 평가였다.
동엽으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평가다. 애초에 작년 하반기 이후 지금까지 에러야 몇 번 있었지만, 그중 알까기는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한 번 붙은 양계장 박 씨라는 별명은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더군다나 겉멋 수비라니. 사실 작년 시즌 그의 수비는 리그 평균을 상회했다.
졸렬한 스탯 관리 역시 할 말은 많았다. 애초에 패배한 경기에 타격 스탯이 잘 나오는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타격을 못 한 다른 선수들의 잘못이다. 또한, 그의 타격은 패배한 경기와 승리한 경기에 딱히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팩트 따윈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이 동엽을 까는 것은 그의 성적 때문이라기보다 단순히 깔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무엇보다 동엽이 소속된 부산 마린스는 부산지역 고등학교 출신과 그 외 지역에 대한 차별이 심각했다. 그것은 단순히 팀 내 분위기를 넘어 팬덤에도 극심한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죽죽 훑어 넘기며 동엽이 중얼거렸다.
“아, 진심으로 트레이드 마렵다. 그래도 성민 선배가 있을 때는 좀 괜찮았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 리가.
포스팅 자격까지 앞으로 3년.
FA까지는 5년.
어떻게든 마린스라는 팀에서 2년이라도 덜 뛰기 위하여, 동엽은 오늘도 남들보다 30분 일찍 훈련장으로 향했다.
***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KBO와 MLB는 다르다.
모그룹에 강하게 종속된 형태인 KBO는 모든 팀이 일종의 광고탑이다. 우승하기 힘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해서 이번 시즌을 포기하는 것 따위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팀 간에 주력 선수가 포함된 트레이드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만약 이뤄진다면 그것은 서로 간에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형태의 거래이거나, 비슷한 이름값을 지닌 선수 간의 맞교환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이번 시즌은······.”
“후, 그래도 해볼 만하지 않았나 싶었지만, 부상에는 장사가 없죠. 어쨌거나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을 강구해봅시다.”
“사실 방법이라고 해봐야······.”
“당연히 다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구단 자체가 수익사업인 메이저리그의 경우는 당연히 다르다.
물론 양키스나 다저스 같은 예외적인 경우도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종국적인 수입에서는 이득이기 때문에,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다. 특히 양키스의 경우 구단 수익만 따졌을 때는 천문학적인 적자를 내고 있지만, YES 그룹이라는 그룹 전체로 따졌을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득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스몰 마켓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은 중계권료, 입장료, 상품판매의 세 가지 축을 벗어날 수 없다. 성적이 떨어지면 당연히 수입은 줄어든다. 방법은 두 가지다. 수입을 늘리든지 비용을 줄이든지.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좋은 성적이 필요하다. 쉽지 않다. 하지만 비용을 줄이는 것은 간단하다. 비싼 선수를 처분하면 된다. 현재의 성적은 조금 더 떨어지겠지만, 어차피 포스트시즌 진출은 어려운 상황에서 수입의 감소 폭은 비용의 축소에 비해 크지 않다.
무엇보다 이 경우 한 가지 대단한 강점이 생겨난다.
바로 유망주다.
관측수단의 발달은 유망주의 성공 가능성 예측을 크게 올려주었다.
“가장 크게 뽑아낼 수 있는 후보를 한번 잡아보죠.”
“언제를 목표로?”
“2년 뒤. 새로운 구장이 개장되는 해를 목표로.”
5월의 끄트머리.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의 꼴찌팀.
탬파베이 레이스가 2034시즌을 사실상 포기했다.
***
보스턴 레드삭스의 삼루수 매튜 쿠퍼는 최근 ‘심심함’을 느끼고 있었다.
본래 그와 가장 가깝게 어울려 놀던 동료 가운데 셋이나 빠진 탓이었다.
맥스 슈피겐이야 원래 좀 재수가 없던 녀석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루카스 버튼이 빠진 것은 조금 치명적이었다. 솔직히 그와 어울리는 녀석들 가운데 녀석만큼 머리를 쓸 줄 아는 놈도 없었다. 창의적인 놀이를 생각해내는 것은 항상 루카스의 몫이었다.
그리고 랄로 가야르도.
녀석이야말로 동료들 가운데서도 매튜 쿠퍼와 가장 잘 어울리던 녀석이었다.
“이봐, 매튜. 오늘 쥬시 어때?”
“쥬시? 거긴 며칠 전에도 갔잖아.”
“하지만 최근 가장 물이 좋은 곳이 쥬시인 거 너도 알잖아.”
“글쎄다. 랄로는 뭐래?”
“랄로? 그 녀석은 오늘도 개인 트레이너랑 훈련 있다고 하던데?”
제롬 스튜버츠의 이야기에 매튜가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야 역시 재미없다.
“그러면 나도 오늘은 패스할게.”
“왜? 너도 훈련에 동참이라도 하려고?”
“그럴 리가. 훈련은 매일 하는 거로 충분하다고. 시즌 중에 무리하게 더 해봐야 몸만 상할 뿐이야. 난 지금이 베스트라고.”
“그 말 제발 랄로 녀석에게도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저, 저 멍청한 자식들이?
필 니크로가 그들의 대화에 역정을 냈다.
그래, 맞다.
어느 종목이나 마찬가지겠지만, 7개월 동안 162번의 경기를 갖는 야구는 훈련만큼이나 휴식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젊은 선수들이고 마이너에서 완성되지 않은 채 올라온 선수들이었다. 무엇보다 술이나 처마시며 놀 체력이면 훈련을 하는 것이 더 옳다.
‘참으세요. 어차피 한순간에 잔소리로 바꿀 수는 없잖아요. 결국, 조금 느려 보여도 개개인의 선수가 아닌 팀의 분위기 자체를 바꾸는 길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진 그래도 제법 성공적이잖아요.’
-확실히 그건 그렇긴 하다만.
성민은 에두아르도 크루즈에게 팀의 중심이 되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그것을 제법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하지만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
강한 발언력을 얻은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정규 훈련에 성실도를 높이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것은 제법 큰 효과를 보여서 이제 훈련에 지각하는 선수는 거의 드물었고, 대부분 선수가 훈련에 지각하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하게 됐다.
다만 정상적인 회사에서 퇴근 후를 건드리기 힘든 것처럼 훈련, 혹은 경기가 끝난 이후의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를 건드는 것은 아무리 에두아르도 크루즈라고 해도 건드리기 힘들었다.
“이봐, 랄로. 오늘도 개인 훈련한다며.”
“어, 이번에 새로 고용한 트레이너가 내 문제를 지적해줬는데 아무래도 그걸 좀 더 집중적으로 해봐야 할 것 같아.”
“새로 고용한 트레이너?”
“응, 성민의 소개로 고용했는데 이전에 웨이트 드라이브에서 시니어까지 하고 퇴사했다고 하더라고.”
“웨이트 드라이브 출신이라고? 그거 지금 네 연봉으로 감당 가능해?”
“아, 그게 애초에 성민이 파트 타임으로 고용한 트레이너인데 이래저래 할인을 좀 받았어.”
“할인?”
매튜 쿠퍼가 조금 놀랐다.
웨이트 드라이브라면 20년 전부터 과학적인 트레이닝으로 업계에 두각을 드러냈던 집단이었다. 거기서 시니어까지 했던 인재라면 업계를 통틀어서도 상위에 꼽힐 인재다.
아직 연봉협상도 들어가지 못한 랄로 가야르도의 연봉으로 고용하기에는 제법 비싼 몸이다.
“어, 독립한 지 얼마 안 돼서 홍보도 좀 필요하고, 어차피 기계 놀리느니 해주는 거라고는 하는데, 사실 성민이 없었으면 좀 힘들었겠지.”
“얼마씩 주고 있는데?”
“일단 4만 달러를 내고 이번 시즌을 봐주기로 했어. 대신 몸을 완전히 관리해주는 건 아니고, 딱 보스턴에서 수비 훈련만 봐주는 형식으로.”
4만 달러.
분명 큰돈이다.
하지만 현대적인 측정기기들과 훈련을 위한 장소. 그리고 진짜배기 전문가의 지도를 생각한다면 헐값이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그것을 통해 진짜 실력이 개선된다면 이건 그 4만 달러의 10배, 100배로 돌아올 수 있다.
“그거 나도 구경 가봐도 되는 거냐?”
“구경? 뭐, 상관없을걸? 애초에 이렇게 싸게 해주는 것도 일종의 홍보를 위한 거라고 했으니까.”
< 변화(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