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팀 스피릿(5) >
보통 사람이 하는 가장 커다란 단일 소비는 역시 집이다.
이것은 돈의 단위가 커진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부동산은 진정한 의미에서 한정된 자원이기 때문이다.
괜히 경제학에서 토지를 노동과 자본에 육박하는 생산의 가장 큰 요소로 잡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공산품, 그것이 설사 명품이라 불리는 것일지라도 결국 노동과 자본, 혹은 노동과 토지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부동산은 다르다. 그것은 토지 그 자체다.
하지만 작년 성민이 했던, 아니 성민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했던 가장 큰 단일 소비는 부동산이 아니었다.
시계
과거에는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실용적인 제품이었지만, 이제는 장인 노동 집약의 극치라고 평가받는 사치품의 역할을 담당하는 그것에 성민은 35만 달러. 약 4억에 가까운 돈을 사용했다. 부산 시절 그의 마지막 해 연봉이 2억 2천만. 세금 떼고 어쩌고 하면 한 1억 8천만 정도 손에 남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사치였다.
그래서 아까웠나?
그럴 리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성민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했던 모든 소비 가운데 그것은 가장 가치 있는 소비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무려 퍼펙트에 대한 대가다. 메이저 역사상 성민 자신을 포함하여 25명밖에 얻지 못한 명예. 작년 디아고 헤밍턴과 사이 영을 박빙으로 겨룰 수 있었던 것도, MVP 7위까지 꼽혔던 것도 모두 그 퍼펙트 덕이 컸다.
그렇기에 더더욱 아쉬웠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벌어진 일에 집착하여 미래를 망치는 것은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중요한 것은 미래. 당장의 감정을 풀기 위해 미래를 망가트릴 수는 없다. 하물며 그 감정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의도’가 아닌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면 더더욱.
-아무리 생각해도 네 녀석은······.
필 니크로가 말을 삼켰다.
굳이 여기서 더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그가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필 니크로도, 그리고 짜증 가득한 마음으로 그것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상큼한 미소를 띠고 있는 성민 본인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6회 말 원아웃 상황. 랄로 가야르도 선수의 아쉬운 실책!! 퍼펙트가 깨지네요.]
[물론 아직 조금 많이 남은 상황이긴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김성민 선수는 작년에도 퍼펙트를 기록했던 선수거든요. 뭔가 해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선수예요.]
[이런 말은 조금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퍼펙트는 역시 선수 혼자의 힘으로 되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보스턴 수비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작년 다저스 수비는 다들 아시다시피 정평이 나 있지 않았습니까? 방금과 같은 에러는 어느 선수나 범할 수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다저스였다면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하하, 박 위원님이 참 많이 아쉬우신 모양이네요. 자 6회 말 투아웃 상황. 타석에 탬파베이 레이스의 다음 타자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1번 타자인 랜디 월튼 선수입니다. 이번 경기 세 번째 타석입니다.]
그가 박 위원의 이야기를 황급히 끊었다.
아무리 이 중계가 한국인들에게 나가는 중계고, 성민이 국민적인 인기스타라고 해도 팀을 이렇게까지 비교하는 건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는 말이다.
박 위원 본인도 말을 뱉는 순간에는 너무 화가 났지만, 그래도 눈치가 완전히 없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금방 그에게 눈빛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경기가 계속됐다.
분노의 감정은 사람을 흔들고 시야를 좁게 만든다.
바로 직전 이닝. 역대급 하루를 보내던 브라이언 보일처럼.
물론 브라이언 보일이 흔들린 이유는 분노만은 아니었지만, 그가 완벽하게 무너진 것은 결국 분노였다.
성민 역시 겉으로 표시는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분노와 실망이 그득했다.
어쩔 수 없다. 무려 퍼펙트다. 역대 최초로 메이저리그에서 두 번째 퍼펙트를 기록한 투수가 될 수 있었다. 그것도 작년에 이어 올해 연속으로!! 이것은 앞으로 또다시 150년이 더 흐른다고 해도 나오지 않을 말 그대로 전무후무한 대기록이 됐을 것이다.
물론 너클볼 투수에게는 기회가 많다.
지금부터 15년. 40대 중반에도 메이저리거로 뛸 수도 있다.
‘성민 네가 지금 스타일로 가장 강력할 수 있는 시간은 올해부터 약 4년 정도일 거다.’
하지만 과거 필 니크로가 해준 이야기처럼 성민의 전성기는 아마 지금일 것이다.
그것은 성민 스스로도 알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성민이 기존의 너클볼 투수보다 더 강력한 투수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폼으로도 90마일에 달하는 속구를 유지한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김성민이라는 인간 자체가 본래 90마일 후반대까지 공을 뿌릴 수 있는 포텐셜을 지니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몸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부웅!!
“스트라잌!!”
하지만 그런 분노에도 불구하고 성민의 공은 여전히 춤을 추듯 날아와 타자의 방망이를 현혹했다.
그리고 두 번째.
-뻐엉!!
세 걸음을 걸어 나갔던 조시 알론소의 몸이 황급히 일루로 귀환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웃!!”
허무한 견제사.
분노로 가득한 와중에도 1루 주자의 견제 폭을 읽고 정확하게 미트에 공을 꽂아 넣는 그 모습에 이제는 어지간한 모습에는 놀라지도 않는 필 니크로조차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덕아웃.
랄로 가야르도가 성민에게 다가왔다.
“성민, 미안해. 내 실수 때문에.”
곰 같은 덩치에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거리는 랄로 가야르도의 얼굴은 마치 순진한 황소를 연상케 했다.
부글거리는 속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그래도······.”
“랄로, 잘 들어 내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줄 테니까.”
“재밌는 이야기?”
랄로 가야르도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재밌는 이야기라니?
“모두가 알다시피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결과야. 결국, 기록되는 건 결과뿐이니까. 하지만 난 그 결과에 못지않게 과정과 의도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악의를 갖고 나에게 해를 끼친 것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은 다르잖아. 난 이번 일은 전적으로 실수였다고 생각해. 네가 일부러 퍼펙트를 깨부수겠어!! 하는 마음으로 한 일이 아니잖아? 안 그래?”
“당연하지!! 내가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겠어!!”
“그래, 랄로. 그거면 된 거야. 넌 이번에 제법 큰 실수를 했고,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어. 이제 중요한 건 미래야. 유감스럽게도 난 독심술사는 아니거든. 다른 사람의 마음은 읽지 못해. 그러니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할 수밖에 없지. 네가 진정으로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면 아마 넌 엄청난 연습을 통해 다음번에 같은 상황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
“당연하지!!”
성민이 랄로 가야르도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래 그거면 됐어. 이제 자리로 돌아가서 네 타석이나 준비하라고. 지금 우리 애들 아주 신이 나서 어쩌면 이번 이닝에 네 차례가 또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응!!”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가는 랄로 가야르도를 바라보던 필 니크로가 물었다.
-정말이냐?
성민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럴 리가요. 악의를 갖고 찌르건, 그냥 찌르건 찌른 놈이야 다르겠지만, 찔린 놈은 같은 겁니다. 그걸 굳이 분류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이건 그냥 찌른 놈이 앞으로 또 찌를 확률을 줄이려는 발버둥이죠. 어찌 됐건 그렇다고 저 녀석 안 쓸 수는 없잖습니까.’
-역시······.
‘게다가 애초에 보스턴을 선택할 때는 어느 정도 각오는 했으니까요. 그게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지만요. 그래도 뭐, 6회에 이런 일을 경험했으니 어떻게 보면 다행 아니겠습니까? 만약 9회쯤에 이런 일을 경험했다면 아무리 저라고 해도 참기 힘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죠.’
성민의 이야기에 필 니크로가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실리를 챙기지만 궁극적으로 따져보자면 이 녀석은 묘한 구석에서 선하다. 충분히 본인의 화를 풀어내고 상황을 수습할 능력이 있음에도 타인의 마음을 배려한다.
뭐, 본인은 그것이 효율적이라고 변명을 하지만, 애초에 그 효율에 자신의 기분을 해소한다는 것 자체가 배제된 것이 성민의 선함을 증명한다.
이것은 마린스라는 엉망진창이지만 그래도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호의로 가득한 환경에서 야구를 한 덕분일 수도, 혹은 그의 어머니인 권 여사의 가정교육이 제대로 된 덕분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필 니크로는 성민의 이런 모습이 싫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선함이란 손해를 보기 마련이기에 같은 편에게 답답함을 선사하는데, 이 녀석은 그렇게 선한 와중에도 또 묘하게 실속은 알아서 챙겨 먹는다.
-딱!!
7회 초.
보스턴의 타선이 또 한 번 폭발하는 것으로 성민의 선함에 보답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랄로 가야르도의 2타점 적시 이루타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성민!! 노히트 노런!! 압도적 피칭!!]
[14:0!! 보스턴 레드삭스, 탬파베이 레이스를 압도하는 대승리!!]
[6회 말, 랄로 가야르도의 실수로 아쉽게 깨진 퍼펙트!!]
[김성민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한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이겼고, 그 승리의 주역 중 하나가 랄로 가야르도라는 점이다.’]
[랄로 가야르도 ‘성민은 진정으로 존중할만한 베테랑.’]
-아오, 6회 말에 랄로 수비 보고 빡쳐서 핸드폰 집어 던질 뻔.-
-2년 연속 퍼펙트면 진짜 전무후무한 대기록 아님? 이걸 저렇게 망치네.-
-근데 8회에 성민이가 볼넷도 하나 기록했잖아. 그러면 어차피 퍼펙트는 나가리였던 거 아님?-
-에이, 그거야 6회에 이미 깨진 거로 분위기가 나가리라서 그랬던 거지. 그냥 쭉 진행했으면 볼넷도 없었을 거라고 본다.-
-맞아. 그랬으면 아마 볼넷 위기에서 그냥 맞춰 잡는 쪽으로 가닥 잡았겠지. 거기서 굳이 어려운 승부 끝까지 고집하지 않고.-
-그러면 어차피 퍼펙트는 나가리니까 노히트라도 지킨 건가?-
-근데 난 그것보다 퍼펙트 깨지고 성민이가 보여준 모습에 또 한 번 심쿵해버림.-
-크, 그 와중에 견제사시킨 거 말하는구나? 하긴 에러로 퍼펙트 깨진 상황이면 엄청 빡쳤을 텐데, 그 상황에서도 주변 다 살피는 침착함이라니. 얜 진짜 멘탈이 미쳤음.-
-보았나. MLB? 이것이 마린스가 키워낸 KBO의 최종병기다. 그러니까 앞으로 멘탈이 엉망인 유망주가 있다면 마린스로 유학을 보내도록 해라.-
-그리고 그 유망주는 멘탈이 완벽히 파괴되는데······.-
-일단 마린스에서 버티기만 하면 멘탈갑이 되는 건 확실한데, 문제는 마린스에서 버티는 난이도가 불지옥임.-
-속보!! 김성민, 마린스에서 10년 버티는 것이 메이저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어려워!!-
***
보스턴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언제나처럼 비행기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뽑아 든 매튜가 랄로에게 소리쳤다.
“랄로, 뭐로 마실래? 사무엘 아담스?”
“아, 난 오늘은 됐어.”
“됐다니? 왜? 위닝시리즈를 했는데 기분이 별로일 리는 없고. 몸 어디 불편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이따가 트레이닝 잡아둔 게 있어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성민은 랄로 가야르도가 맥주를 거절하는 것에 그리 감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녀석의 저 의지가 진정이라면
저 조금 멍청한 천재가 진정으로 오직 야구에 모든 것을 바친다면.
녀석의 수비가 조금만 더 정상적으로 개선된다면!!
어쩌면 보스턴은 세 번째 올스타급이자 진정으로 MVP를 노릴만한 선수를 또 하나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에두아르도 크루즈에 이어 ‘성민의 보스턴 레드삭스’를 지탱하는 또 다른 든든한 기둥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뭐, 그건 너무 김칫국 같긴 하지만 말이야.’
-응? 갑자기 웬 김칫국?
< 팀 스피릿(5)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