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팀 스피릿(4) >
5회를 지나 6회.
브라이언 보일은 오늘이 자신의 날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도 그의 공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오늘 마운드에 선 그는 이 경기를 지배하는 지배자였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공을 던지는 족족 타자의 방망이가 그 공을 비껴간다. 설사 공을 건드린다고 해도 파울라인 밖으로 밀려나거나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빗맞은 땅볼 타구. 혹은 처리하기 매우 쉬운 뜬공으로 연결됐다.
마치 그라운드의 지배자가 된 것 같은 전능감.
‘선배, 이제야 선배가 하던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습니다.’
자기 공에 대한 강한 확신.
나의 공이 타자의 방망이를 피해 미트에 틀어박힐 것이라는 이미지가 머릿속에 확고하게 그려졌다.
6회 초 원아웃.
총 열여섯 개의 아웃 카운트 중에 삼진만 무려 열 개.
타석에 랄로 가야르도가 들어왔다.
커다란 덩치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순박한 눈망울.
어마어마한 힘과 유연성. 그리고 뛰어난 기술을 가진 타자였지만 도저히 상상은 되지 않았다.
자신의 공이 저 타자에게 공략된다는 상상 말이다.
초구 92.1마일의 슬라이더.
-부웅!!
“스트라잌!!”
브라이언 보일의 기습적인 슬라이더가 랄로 가야르도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기본적으로 슬라이더는 같은 손 타자의 몸쪽에서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스트라이크인 양 속이는 페이크다.
90마일 이상의 속도로 날아드는 스트라이크를 가장한 볼.
그렇기에 슬라이더는 같은 손 타자를 상대로 하는 최종병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다른 손 타자를 상대로 한다면 어떨까?
기본적으로 좌투수인 브라이언 보일의 슬라이더는 우타자인 랄로 가야르도의 바깥에서 몸으로 파고드는 궤적을 보인다. 볼인 척하는 스트라이크인 셈이다.
같은 손 타자를 상대로 하는 슬라이더가 눈치를 채는 순간 볼카운트 하나라면, 이건 눈치를 채는 순간 존의 복판으로 달려드는 속구보다 7마일쯤 느린 배팅볼이 되는 셈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우타자를 상대로 하는 좌투수의 슬라이더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오늘 브라이언 보일의 슬라이더는 달랐다.
그것은 슬라이더 주제에 마치 포크볼이라도 되는 양, 수직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였다. 물론 포크볼과는 다르다. 포크볼의 그것이 뚝 떨어지는 공이라면 브라이언 보일의 슬라이더는 수평 무브먼트를 억제하고 수직 무브먼트를 극대화해서 수직으로 더 많이 ‘휘어지는’ 공이었으니까.
랄로 가야르도가 타석에서 물러나 장갑을 동여매고 헬멧을 고쳐 썼다. 그의 머릿속에 조금 전 브라이언 보일의 공이 보여준 궤적이 기록됐다.
두 번째 공.
97마일 속구.
-뻐엉!!
바깥 코스로 많이 빠진 그 공에 랄로 가야르도의 방망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5마일의 차이로 슬라이더와 속구를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공의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 차이는 고작 0.022초 정도. 게다가 오늘 브라이언 보일의 슬라이더는 사이 영을 경쟁하는 진짜배기 괴물들도 일 년에 한두 차례나 보여줄 법한 대단한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궤적만으로 슬라이더인지 속구인지를 추측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평소의 브라이언 보일이었다면 의심했을 것이다.
‘읽힌 건가? 아니면 뭔가 쿠세라도?’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는 이것이 그저 랄로 가야르도의 행운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래, 이것은 그저 행운이다.’
자신감으로 가득 찬 브라이언 보일의 세 번째 공이 그의 손을 출발했다.
그가 다른 손 타자를 상대로 가장 크게 재미를 볼 수 있는 체인지업. 물론, 슬라이더와 비교해 총체적인 완성도는 조금 떨어졌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한층 더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부웅!!
“스트라잌!!”
그리고 그것은 랄로 가야르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도착하지 않는 공.
어거지로 타이밍을 맞춰보려 했지만, 그 횡적 움직임이 랄로 가야르도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오늘 녀석의 체인지업이 일품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에 넣고 왔음에도 그러하다.
볼카운트 1-2
투수에게 지극히 유리한 상황에서 브라이언 보일이 생각한 것은 그의 선배인 라만 그레고리의 이야기였다.
“너의 슬라이더는 최고다. 네게 필요한 건 그걸 믿는 마음뿐이야. 상대가 어떤 타자라도, 어떤 볼카운트라도 상관없어. 설사 리그 최고의 타자를 상대로 3-0의 카운트라고 해도 말이야.”
노리는 것은 존의 바깥쪽 꽉 찬 코스에서 횡으로 뚝 떨어지는 슬라이더.
1-2의 유리한 카운트에서 헛스윙을 유도해보기 위한 공이었다.
네 번째.
브라이언 보일의 공이 그의 손을 떠났다.
그리고 타석에 선 랄로 가야르도가 그 공에 반응했다.
‘됐어!!’
브라이언 보일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아마 지금 타석에 선 타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심지어 탬파베이 레이스에 영원한 통곡의 벽이었던 Mr. 양키스 리암 루카스였더라도 그의 쾌재는 옳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타석에 선 남자는 랄로 가야르도.
여전히 수비에서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공을 받는 것밖에 없는 조금 멍청한 녀석이지만 보스턴에 모인 수많은 천재 가운데 타격의 재능만으로 따진다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장 뛰어난 천재였다.
외곽에서 살짝 존 안쪽으로.
그리고 존의 중심에서 존을 슬쩍 벗어나는 낮은 곳까지.
실로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브라이언 보일의 슬라이더를 향해 랄로 가야르도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오른쪽 겨드랑이를 조금 더 몸에 붙이고 더 컴팩트하게. 몸통의 어마어마한 회전력을 오롯이 방망이에 담아.
-딱!!
높게 떠오른 타구가 좌측 담장 너머 관중석을 두들겼다.
방망이를 얌전히 내려놓고 일루를 지나 이루로 다시 삼루에서 홈까지.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랄로 가야르도의 몸을 선수들이 열렬히 두들겼다.
1:0
그리고 그 일련의 모든 과정에서 아직 젊은 에이스는 그저 멍한 눈빛으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아!!”
랄로 가야르도의 홈런에 탬파베이 레이스의 덕아웃에 있던 라만 그레고리가 탄식했다.
그래, 알고 있다.
이곳은 메이저리그. 괴물들의 땅이다. 아무리 최고의 컨디션으로 좋은 공을 뿌리는 날이라도 얻어맞는 날은 나온다. 라만 그레고리에게는 저 저주받을 양키스의 리암 루카스 같은 놈이 그런 놈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다.
하지만 그날이 굳이 오늘일 필요는 없었다. 이왕이면 오늘은 자기 공에 대한 자신감만으로 가득 찬 채로 끝났으면 했다.
마운드의 브라이언 보일이 흔들렸다.
안타와 볼넷.
투수 코치가 마운드를 방문했다.
그리고 마음을 추스르고 던진 공이 적시타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수비의 실수가 상당히 포함된 적시타였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는 타인의 실수에도 관대해진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몰린 상황이라면?
“$%^&*$%^#&”
욕설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저 투수 무너졌군.
‘아직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니까요. 뭐 다 저러면서 크는 거죠.’
6회 초 3점
그리고 투수 교체.
이후 다시 2점.
그리하여 6회 말.
5:0의 상황에서 마운드에 성민이 올라왔다.
그라운드를 지키는 모든 야수가 바짝 긴장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려 그것을 진행 중이니 말이야.
‘그것? 아, 퍼펙트요. 에이 우리 사이에 그냥 말하면 되지 뭐 그걸 그렇게 돌려 말합니까.’
-어허!!
‘에이, 어차피 지난번에 했을 때도 그냥 막 말했었잖아요.’
확실히 그건 그렇다.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라는 게 있다. 필 니크로가 자신의 입으로 ‘그것’을 내뱉는 것을 자제했다.
노히트가 투수의 기록이라면 퍼펙트는 팀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투수에게 귀책 사유가 없는 출루가 허용되는 노히트와 달리 퍼펙트게임은 투수 혼자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함께 경기를 뛰는 모든 야수 역시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
‘그나저나 이거 좀 고민이 되네요.’
-뭐가?
‘지금 내가 그냥 퍼펙트 이야기를 농담처럼 먼저 꺼내버리는 게 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지,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나을지 가요.’
-당연히 가만히 있어야지!! 괜히 그런 이야기 하면 더 얼어붙을 거다.
‘하긴, 그렇겠죠? 전체적으로 조금 얼어붙은 게 낫지, 몇 명 풀어주자고 더 심각하게 얼어붙은 쫄보를 만드는 건 곤란할 테니까요.’
탬파베이의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7번 타자부터 시작되는 하위 타순. 나름대로 쉬어가는 이닝이었다.
‘후, 긴장하지 말자.’
그라운드의 ‘모든’ 야수들이 긴장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긴장은 올스타급 포수인 에두아르도 크루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퍼펙트는 메이저리그 150년 역사에서 오직 25명만이 기록했던 대기록. 같은 투수가 두 번을 기록한 일은 당연히 없다.
심지어 작년에 이어 2년 연속이라니. 비록 아직 경기는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긴장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뻐엉!!
“스트라잌!!”
물론 긴장이 몸을 조금 좀 먹었다고 해도 형편없는 실수를 저지르기에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너무 뛰어난 포수였다.
그가 몸에 축적된 경험 그대로 능숙하게 경기를 풀어나갔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타순이 하위 타순이었다는 점 역시 주요했다.
삼진 하나를 포함하여 순식간에 두 개의 아웃 카운트가 적립됐다.
그리고 세 번째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부웅!!
“스트라잌!!”
-뻐엉!!
“스트라잌!!”
순식간에 볼카운트는 0-2
세 번째 공이 성민의 손을 떠났다.
타석에 선 타자는 탬파베이 레이스의 9번 타자인 조시 알론소.
사실 이번 시즌 그가 타석에서 거둔 성적만 놓고 보자면 메이저리그에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선수였다.
그렇기에 그것은 우연이라 확신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발악적으로 휘두른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스쳤다.
1루 파울라인을 따라 흐르는 공.
성민의 몸이 빠르게 연습했던 그대로 1루를 향해 움직였다. 랄로 가야르도가 공을 줍기 위해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바닥을 구르는 공.
딱히 불규칙한 바운드 같은 것도 없었다.
문제는 진행 중인 대기록에 딱딱하게 굳은 랄로 가야르도의 몸. 그리고 애초에 자신감이 부족했던 그의 수비 그 자체였다.
[아!!]
경기를 중계하던 중계진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TV로 경기를 관전하던 팬들의 입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랄로 가야르도의 미트가 흘러가는 공을 확실하게 잡아내지 못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랄로 가야르도가 미트를 타고 흐르는 공을 잡는데 무려 세 번의 더듬거림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지막.
가득 찬 당황 속에서 던진 송구의 방향마저 애매했다. 그야말로 긴장이 끌어낸 실수의 연속.
필 니크로가 이마를 짚었다.
“세이프!!”
나오지 말아야 하는 최악의 실수.
직전 이닝, 시즌 12번째 홈런을 기록하며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었던 랄로 가야르도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성민이 그에게 다가왔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서둘러 성민에게 달려왔다. 일루와 이루 사이를 지키던 제롬 스튜버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 성민의 성향을 생각하면 여기서 물리적인 충돌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어디 평범한 상황인가. 퍼펙트라는 대기록이 깨진 마당이다.
성민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랄로 가야르도의 왼쪽 어깨 위로.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이제 6회에 5:0이야. 출루 하나 정도야 뭐.”
“성민 괜찮아?”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성민에게 물었다.
괜찮을 리가.
이미 속으로는 랄로 가야르도 이 무능한 새끼야!! 네가 그러고도 메이저리거냐 같은 욕설을 수천 바가지쯤 퍼부었다. 하지만 성민의 입에서는 그 속마음과 상관없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지금 괜찮냐는 질문을 받아야 하는 건 에두아르도 너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
“앞으로 3.1이닝만 더 버텼으면 롤렉스였는데 눈 뜨고 롤렉스 하나 놓친 거잖아. 나야 뭐 돈 쓸 일 줄었으니 나쁠 것도 없지.”
깨질 것 같았던 분위기.
뒤늦게 성민의 곁으로 모인 다른 선수들 역시 성민의 농담을 들었다. 그 형편없는 농담이 실소를 자아냈다.
성민의 농담을 들은 것은 1루로 출루에 성공했던 탬파베이의 조시 알론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민이 말을 이어갔다.
“뭐, 이왕 이렇게 됐으니 노히트는 챙겨보자고.”
보스턴 야수들의 얼굴에 결의가 깃들었다.
< 팀 스피릿(4) > 끝
ⓒ 묘엽
작가의 말
지각 죄송합니다.
최대한 이런 일 없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