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85화 (186/287)

< 팀 스피릿(3) >

-뻐엉!!

“스트라잌!! 아웃!!”

[대단합니다!! 브라이언 보일!! 벌써 경기 여덟 번째 삼진!!]

[4이닝 동안 삼진만 여덟 개를 잡아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슬라이더 보이십니까? 와우, 저건 타자 입장에선 마치 자신의 몸에 바짝 붙을 거라고 느낄 거란 말이죠. 그런데 그런 공이 저렇게 빠져나가 버리는데 저걸 대체 어떻게 공략을 하겠습니까.]

[사실 원래도 브라이언 보일 선수의 슬라이더는 리그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강력했거든요. 꾸준히 좌타자들을 상대로 결정구로 쏠쏠하게 써먹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슬라이더의 비율 자체를 늘려버렸습니다. 단순히 마지막 헛스윙을 유도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볼카운트를 얻는데도 조금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어요.]

[저는 그것보다 체인지업의 활용에 더 중점을 두고 싶습니다. 최근 랄로 가야르도 선수의 약진이 정말 눈이 부셨는데요. 여기 보시면 그런 랄로 가야르도 선수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방망이가 나와버렸어요.]

브라이언 보일이 경기 여덟 번째 삼진을 잡아내며 4회 초 보스턴의 공격을 막아냈다. 지금까지 그가 허용한 출루라고는 3회 초, 미셸 에쉬만이 얻어냈던 볼넷이 전부였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덕아웃에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선수들의 얼굴에 감도는 것은 그 침묵이 주는 불편함이 아니었다.

약간의 흥분.

이것이 단순히 오늘 하루 미쳐 날뛰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껍질을 깨고 한단계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들의 마운드를 책임지는 브라이언 보일에게서는 평소와 다른 향기가 물씬 풍겨 났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라만 그레고리의 눈이 따듯했다.

그런 날들이 있다.

10번 던지면 원하는 곳에 10번이 다 들어가는 것 같은 날이라든지. 변화구의 각은 평소보다 예리하다든지 체인지업이 마치 누가 뒤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들어가는 그런 날.

물론 그 모든 것이 한 번에 몰려오지는 않는다.

제구가 죽여주는 날에는 변화구의 각이 영 별로라서 속구 위주로 가져가다가 두들겨 맞고, 변화구의 각이 죽여주면 영점이 영 안 잡혀서 볼넷으로 애들을 줄줄이 내보낸다.

하지만 가끔 뭔가 그런 것들이 이상하게 전부 다 잘되는 날이 있다. 그리고 그런 날에는 정말 놀라운 성적을 기록하곤 한다.

라만 그레고리가 보기에는 오늘 브라이언 보일도 그런 날을 경험하고 있다. 아마 오늘 녀석은 정말 대단한 성적을 기록할 것이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성적이 아니다.

3년 전의 라만 그레고리도 그랬다.

저것은 한순간의 계기다.

마운드에 선 투수는 본래 외롭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라운드에는 여덟 명의 동료가 있지만, 공을 던지고 타자가 방망이를 휘두르는 그 순간까지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공을 던지는 순간의 투수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 자기 공에 대한 강력한 확신만이 좋은 투수를 진짜 에이스로 바꿔놓는다.

3년 전, 라만 그레고리 자신이 그랬었다.

성공의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한 강한 확신.

지금 탬파베이 레이스의 덕아웃은 또 다른 에이스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구에 이런 말이 있다.

‘타격왕은 포드를 타고, 홈런왕은 캐딜락을 탄다.’

결국, 야구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싸움. 즉 엔터테인먼트다. 대중은 더 화려한 것에 열광한다. 그것이 타자에게는 홈런이고 투수에게는 삼진이다.

같은 아웃 카운트 1개다. 하지만 열광이 다르다.

물론 성민 역시 3이닝 동안 3개의 삼진을 잡아냈다. 이닝당 1개의 탈삼진은 절대로 적은 숫자가 아니다. 하지만 4이닝 동안 삼진만 무려 여덟 개를 잡아내는 페이스에는 비할 수가 없다.

게다가 4만 2천석 짜리 경기장에 고작 1만 6천 명이 들어선 상황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이곳 트로피카나 필드는 탬파베이 레이스의 홈구장이었다.

그 사뭇 다른 분위기 속에서 성민이 마운드 위에 올라왔다.

4회 말.

선두 타자는 1번 타자인 랜디 월튼.

마운드의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부웅!!

“스트라잌!!”

투수와 타자의 싸움은 많이 만나면 만날수록 타자에게 더 유리해진다. 타순이 돌아갈 때마다 타율이 유의미하게 올라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리그의 투수와 중학생의 싸움도 과연 그럴까?

은퇴한 프로 투수와 사회인 야구단의 싸움도 과연 그럴까?

물론 랜디 월튼은 메이저리거다. 심지어 한 팀의 리드오프인 1번 타자다.

템파베이 레이스가 최약체이니 어쩌니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운드에 선 투수의 수준이 달랐다.

그는 저 양키스와 토론토의 괴물들을 상대하고도 평자책 1.42를 유지 중인 진짜배기 괴물이었다.

-딱!!

랜디 월튼의 스윙이 성민의 공을 건드렸다.

후안 칼초의 몸이 앞으로 달려나왔다. 특출나진 않지만 지극히 안정적인 수비. 글러브에서 공을 뽑아 그대로 일루까지.

-뻐엉!!

“아웃!!”

깔끔한 선두 타자 내야 땅볼 아웃.

화려한 호수비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인간적인 수비는 기대할 수 있다.

-페데리코 녀석을 본 덕분에 여전히 만족이 안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동엽이 녀석이나 루시 녀석 보다는 훨씬 낫구나.

‘흐음, 글쎄요. 종합치로 따지자면 루시는 몰라도 동엽이 쪽이 훨씬 좋을껄요?’

-젠장. 그 자식은 어느 날은 0을 하고 어느 날은 300을 해서 평균 150을 맞추는 녀석이고!! 내가 보기엔 차라리 꾸준히 100을 해주는 유격수 쪽이 훨씬 훌륭하다!!

‘그래도 요새는 한 20에서 300 정도 왔다 갔다 하지 않아요?’

-뭐, 요즘은 그래도 미니멈 30은 하는 것 같긴······.

‘역시 동엽이 경기 꼬박꼬박 챙겨보고 계시네요.’

필 니크로가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어지는 2번 타자에게 느린 너클볼로 내야 뜬공을.

그리고 타석에 또 한 번 마르타 노엘이 들어왔다.

인정한다.

녀석은 단순히 생소함만으로 메이저에서 성공하고 있는 투수가 아니다. KBO 시절과 비교했을 때 지금 성민은 현격하게 발전했다. 마치 자신이 AAA에서 뛰던 시절보다 KBO에서 뛰던 시절에 한층 더 강력해졌던 것처럼.

메이저 최정상급의 투수를 상대하는 마음으로.

마르타 노엘이 자신의 방망이를 움켜쥐고 성민을 바라봤다.

초구.

춤을 추는 너클볼이 성민의 손을 떠났다.

-뻐엉!!

“스트라잌!!”

아니었다.

기습적으로 몸을 찌르는 속구.

젠장.

속구와 너클볼도 제대로 구분하기 힘들다.

마르타 노엘이 고개를 휘휘 젓고 다시 타석에 섰다.

두 번째.

이번에야말로 너클볼!!

안일까? 밖일까?

존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던 너클볼이 슬쩍 바깥으로 빠져나가려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그 때,

마르타 노엘의 방망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안으로 들어오려던 야구공이 바닥으로 휙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움찔.

그런데 그렇게 떨어질 것 같던 녀석이 떨어지는 걸 관두고 다시 쭉 뻗어온다.

‘내가 과연 존에 들어갈까? 아니면 밖으로 나갈까?’

마치 마르타 노엘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공의 움직임.

마르타 노엘이 방망이를 멈췄다.

-뻐엉!!

“스트라잌!!”

이번에도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활약이었다.

그의 절묘한 미트질이 약간 빠진 공을 스트라이크로 둔갑시켰다.

볼카운트 0-2.

마르타 노엘이 잠시 타석에서 벗어나 장갑을 다시 동여맸다. 애초에 KBO에서는 이보다 몇 배는 더 힘든 존으로도 활약했던 마르타 노엘이었다. 심판과 스트라이크 존을 가지고 싸울 만큼 애송이는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방금의 공을 기억했다. 그리고 다시 그려봤다.

‘젠장, 이건 애초에 불가능하잖아.’

근력에는 자신이 있다.

하지만 이건 근력이 아무리 넘쳐도 마르타 노엘의 스윙으로는 제대로 된 타구를 만드는 게 힘든 코스다. 더 바짝 다가 서야 할까?

하지만 그러면 몸쪽으로 바짝 붙었던 초구는?

복잡한 머릿속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타석에 들어선 마르타 노엘을 향해 성민의 세 번째 공이 날아왔다.

비슷한 코스. 하지만 전혀 다른 공이다. 모든 너클볼은 그 궤적이 다 자기 마음대로인 법이었으니까.

-뻐엉!!

마르타 노엘의 방망이가 멈췄다.

잠깐의 기다림.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마르타 노엘일 힐끔 바라봤다.

표정에 흔들림이 없다.

‘뭐가 됐건 자기 존은 지키는 타입이다. 이 소리로군. 제법인데?’

볼카운트 1-2

오늘 브라이언 보일의 압도적인 피칭에 조금 가리는 감이 있어 부각이 덜 되고 있었지만, 성민의 공을 직접 받는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알고 있었다.

오늘 죽여주는 것은 브라이언 보일 쪽이 아니다.

오히려 성민 쪽이다.

삼진이라는 화려한 꽃을 치우고 결과만 바라보자면 브라이언 보일은 볼넷으로 하나의 출루를 허용했고, 성민은 아직 단 하나의 출루도 허용을 하지 않았다.

네 번째.

몸쪽 깊숙하게 찔러넣는 속구

-딱!!

마르타 노엘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두들겼다. 불끈한 팔뚝이 밀려나는 방망이를 억지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아무리 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정도로 밀린 공을 제대로 두들기는 것은 무리다.

큼지막한 파울 타구가 내야 관중석을 직격했다.

볼카운트는 여전히 1-2

다섯 번째.

느린 너클볼.

첫 번째 타석에서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던 바로 그 공이다. 만화의 주인공들은 한번 저지른 실수를 꼭 만회한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한 번 만에 타이밍을 파악하고 공략을 해대는 천재는 한 시대에 하나도 나오기 힘들다. 그리고 아쉽게도 마르타 노엘은 그저 성실한 범재에 불과했다.

-부웅!!

“스트라잌!!”

첫 번째 타석과 같은 코스 같은 공에 헛스윙 스트라이크.

마르타 노엘의 자세가 무너졌다.

5회 초.

보스턴의 공격이 다시 돌아왔다.

***

많은 사람이 생각할 때 보스턴은 2034년을 포기했다.

그들은 보스턴이 올해를 팀을 정비하고 지나가는 해로 생각하고 있다고 여겼다.

“수비진은 이제 슬슬 안정이 되는 느낌입니다. 바그너 가이탄도 이제 슬슬 리햅에 들어갔다고 하고, 불펜진만 조금 더 안정되면······.”

“필요한 건 선발인가?”

“네, 아무래도 성민은 기대 이상의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부룬디가 기대했던 2선발급의 활약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존 맥도웰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렵다.

선발 자원은 어딜 가건 찾기 힘든 자원이다. 불펜의 중요성이 커진 이후로 그건 오히려 더 심화 됐다. 예전이면 어떻게든 꾸역꾸역 선발을 해보려던 인원들이 자기 적성을 찾아 불펜으로 가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오프너는 어떤가?”

“그게 오프너 감을 찾기도 힘든 것이 애초에 지금 불펜진 자체가 문제인 상황인지라······.”

“에밀리오와 케빈이 참 아쉬워지는 순간이군.”

“하지만 애초에 그들이 아니었다면 성민을 데리고 오는 것도 불가능 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존 맥도웰을 비롯한 보스턴의 프런트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보는 2034년의 보스턴 레드삭스는 대부분 사람이 보는 그것과 달랐다.

올 2월 스프링 트레이닝 때의 보스턴 레드삭스

그리고 5월에 접어드는 지금의 보스턴 레드삭스.

그리고 이번 시즌이 끝나갈 무렵의 보스턴 레드삭스.

“일단 가용 자원을 추리고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자고.”

“네.”

< 팀 스피릿(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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