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84화 (185/287)

< 팀 스피릿(2) >

“그나저나 성민, 활약이 정말 대단하던데? 뭐 KBO 시절에도 대단하긴 했지만, 그 페이스를 MLB에서도 그대로 끌고 나가다니 말이야.”

“뭐, 엄밀히 말하자면 나도 그대로 끌고 나간 건 아니지. KBO에서 성적이 더 좋기도 했고, 무엇보다 거기랑 여기랑 수비가 달랐잖아. 다저스의 그 친구들은 정말 터무니없었다고.”

성민의 이야기에 마르타 노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다저스보다는 마린스 친구들이 더 터무니없었던 것 같은데.”

“그건 아니야. 이미지가 좀 그래서 그렇지 시즌 통째로 치면 마린스도 그렇게 터무니없다고 할 정도까진 아니었다고.”

“그런가?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그러면 지금 보스턴은 좀 어때?”

“그냥저냥이지 뭐. 초반에는 다저스에 있다가 온 거라 좀 힘들었는데 이제는 적응이 좀 됐어. 게다가 애들도 점점 나아지고 있고. 너도 알잖아. 20대 초반이면 한참 폭발적으로 성장할 시기인 거.”

필 니크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걔들은 터무니없던 것 맞다. 그리고 지금 녀석들도 마찬가지고!!

물론 그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민뿐.

마르타 노엘이 성민의 이야기에 답했다.

“하긴 그건 그렇지. 20대 초반부터 빅리그에서 뛰어보는 경험은 절대 무시할 수 없지. 나도 KBO에 가서야 제대로 된 1군 무대를 경험해보고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거니까.”

“사실 그건 네 스타일이 KBO에 잘 맞아서이기도 했지.”

“그러니까. 블레이즈의 코치님들이 나랑 잘 맞긴 맞았어.”

“지난겨울에도 블레이즈 마무리 캠프랑 1차 전지훈련 찾아가서 같이 훈련하지 않았어?”

“마무리 캠프는 그냥 놀러 간 거였고, 1차 전지훈련은 같이 훈련했지. 아주 큰 도움이 됐다고. 성민 너는 마린스 애들 좀 찾아갔어?”

“아니, 알다시피 난 좀 바빴잖아. 뭐 그래도 종종 전화로는 연락하고 있고, 아마 이번 겨울에는 단체로 여기로 놀러오라고 이야기도 해뒀어. 그보다 너 몸은 좀 어때? 뉴스에서 햄스트링 부상이라는 말만 들었는데.”

성민의 질문에 마르타 노엘이 자신의 두꺼운 허벅지를 두들기며 답했다.

“별 것 아니야. 훈련 중에 살짝 통증이 왔었어.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고 그냥 염증이라고 하더라고. 이제는 완전히 괜찮아졌어.”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 옷에 가려진 근육들이 꿈틀댔다. KBO 시절에도 느꼈지만 정말 몸 하나 만큼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작년 상반기에는 정말 괜찮았는데, 확실히 빅리그의 162경기를 전부 다 치르려니까 몸에 탈이 오더라고. 그래도 이번엔 더 빡세게 몸을 만들었으니 충분히 버텨낼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내일은 성민 너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 어디 한번 제대로 붙어보자고.”

***

“후, 아주 형편없이 당해버렸어.”

“컨디션이 별로인 날은 어쩔 수 없죠.”

“아니, 컨디션 문제는 아니었어. 커브가 조금 말을 안 듣기는 했지만, 이건 그냥 보스턴 타자들이 생각보다 훨씬 잘 쳤다고 봐야지.”

라만 그레고리가 보스턴의 타선을 칭찬했다.

“하지만 보일 너라면 해낼 수 있어.”

“······.”

“자신감을 가져도 좋아. 넌 우리 팀 최초의 프랜차이즈가 될 거야. 스캇 카즈미어부터 제임스 실즈, 아처와 스넬 그리고 페르난도와 나까지. 넌 우리 모두의 자랑이 될 수 있어. 내가 항상 뭐라고 했지?”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내 말에는 더 큰 힘이 실린다.”

“그래, 바로 그거야.”

브라이언 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래전.

좋은 성적을 거두면 거둘수록 더 빠르게 팀을 떠나야 하는 운명 속에서.

위대한 에이스들은 자신들이 떠날 팀을 위해 후배들에게 본인의 정신을 물려주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 행동은 30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하였고, 그것은 메이저에서 가장 적은 돈을 사용하는 이 팀이 꾸준히 최소 한 명의 에이스를 보유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2034년.

그 팀을 거쳐 간 모든 에이스가 바라왔던 더 좋은 성적을 거둔다고 해도 팀을 떠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

그 가능성을 실현 할 수 있는 최초의 에이스 후보.

브라이언 보일이 마운드 위에 섰다.

최고 97마일의 좌완 투수.

주특기는 최고 91마일에 달하는 슬라이더.

그리고 라만 그레고리에게 전수 받았다는 체인지업.

-부웅!!

“스트라잌!! 아웃!!”

라만 그레고리가 어느 상황에 던져도 괜찮다고 단언했던 브라이언 보일의 슬라이더가 보스턴 타자들의 헛스윙을 끌어냈다.

“젠장, 코앞까지 와야지 슬라이더인 걸 알겠단 말이지.”

“저 자식 오늘 컨디션이 평소보다 더 좋은 것 같아. 슬라이더 휘는 각이 터무니 없는데?”

강력한 구위를 통한 압박.

이제 고작 1회 초였다.

하지만 브라이언 보일은 알 수 없는 자신감을 느꼈다. 어쩐지 오늘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전신을 가득 채운다.

이게 라만 그레고리가 말했던 바로 그 감각일까? 나는 딱히 어제와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공이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그대로 들어가는 그 감각?

-부웅!!

“스트라잌!!! 아웃!!”

슬라이더만이 아니었다.

써드 피치로 쏠쏠하게 써먹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우타자를 상대로 결정구로 써먹기에 조금 아쉬웠던 체인지업까지 오늘따라 기가 막혔다.

삼진, 삼진 그리고 또 삼진.

1회 초.

브라이언 보일이 보스턴의 타자들을 모조리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성민의 차례가 돌아왔다.

[1회 말, 탬파베이 레이스의 공격. 마운드에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에이스 김성민 선수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번 시즌 지금까지 총 여섯 경기에 등판하여 44.1이닝 평균자책점은 1.42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성적입니다. 안 그래도 지금 보스턴의 팀 평균자책점이 5.56으로 빅리그의 모든 팀 중에서 가장 높거든요. 그런데 이 기록조차도 김성민 선수의 기록을 빼면 6.11까지 치솟아요.]

-미쳤네. 항상 암에 걸릴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숫자로 들어버리니 암세포가 암에 걸리는 느낌이다.-

-근데 암세포가 암에 걸렸으면 항암이니까 개이득 아님?-

-나는 저녁에는 마린스, 아침에는 보스턴. 암세포끼리 싸워서 더 강한 녀석이 살아남아 나를 죽이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 이걸 성민이의 위엄이라고 봐야 하냐? 아니면 보스턴의 위엄이라고 봐야 하냐? 6점대 평자책?-

-근데 그래도 이긴 경기도 제법 되잖아. 점수 좀 많이 내주기는 하지만 보스턴 빠따도 워낙 강하니까.-

-양키스나 토론토도 지금 보면 팀 평자책 5점대 초반임. 거기서 에이스들 빼면 5점대 중반까지 올라가고. 이건 그냥 알동이 워낙 타고라서 그런 거임.-

-근데 니들 그거 아냐? 저거 팀 평균자책점은 정말 평균‘자책점’인거? 팀 실점으로 보면 얘들 지금 성민이 안 빼도 6점대다.-

-나 지금 뭔가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게 돼버렸어. 망할.-

탬파베이 레이스의 1번 타자인 랜디 월튼이 타석에 들어왔다.

솔직히 말해 별 볼 일 없는 타자다.

탬파베이 레이스는 작년 한 번 대권에 도전했고 실패했다. 괜찮은 선수들의 컨트롤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었기에 무조건 덤벼들어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고 스몰 마켓이 대권에 도전하고 실패했을 때 후유증은 생각보다 크다.

랜디 월튼의 기량을 굳이 따지자면 간신히 대체선수 정도는 되는 수준에 불과했다.

-딱!!

초구 타격.

완벽하게 빗맞은 타구가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크게 세 걸음.

공을 던진 성민이 앞으로 빠르게 전진했다. 그리고 그대로 공을 맨손으로 주워들어 랄로 가야르도에게 휙 뿌렸다.

-뻐엉!!

“아웃!!”

볼 것도 없는 1루 포스 아웃.

1회 초 브라이언 보일의 호투에 끓어오르려던 경기장의 분위기가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아니, 사실 여기서 좋은 공격을 보여줬다고 해도 경기장이 과연 끓어 올랐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트로피카나 필드의 좌석수는 총 4만 2천석. 그리고 오늘 경기장을 찾은 관중 수는 1만 6천명에 불과했다.

경기가 계속됐다.

이어지는 2번 타자가 세 번째 너클볼을 건드려 내야뜬공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타석에 3번 타자인 마르타 노엘이 들어왔다.

‘후.’

마르타 노엘은 한국에서의 성민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투수와 타자가 처음 만났을 때 유리한 것은 투수다.

그리고 그것은 그 투수가 생소하면 생소할수록 더 강력해진다.

너클볼은 무려 17년이나 빅리그에서 종적을 감췄던 구종이다. 당연히 메이저리그의 투수들은 너클볼을 상대하는 법을 잊었고 성민은 승승장구를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조금 적응될만한 2년 차 성민은 이렇게 팀까지 옮겼다. 아예 다른 리그, 다른 지구로 말이다.

‘확실히 영리한 녀석이야.’

사람들은 종종 성민과 마르타 노엘을 비교한다. KBO의 MVP출신이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그들의 비교에서 성민은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성공이었고, 마르타 노엘 자신은 아쉬운 타자였다.

물론 마르타 노엘에게도 작년 하반기에 체력 분배에 실패했고, 사소한 부상들을 참고 뛴 결과 성적이 급락했다는 변명거리는 있었지만 그래, 성적은 성적이다. 인정한다.

-부웅

불끈거리는 근육에서 나오는 막대한 힘이 방망이를 움직였다.

빅리그의 스카우트들도 75점을 줬던 파워다. 일단 건드리면 넘겨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의 몸을 가득 채웠다.

2년 차.

아직 늦지 않았다.

작년의 실패를 거울 삼아 1년을 버틸 수 있는 몸도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의 평가를 뒤바꿔놓을 순간이었다.

초구.

KBO 시절 지독하게 당했던 바로 그 너클볼

바로 그 너클볼?

응?

-부웅!!

“스트라잌!!”

마르타 노엘의 눈이 희둥그레졌다.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마르타 노엘은 분명 2년 전 KBO에 있던 시절보다 더 강해졌다.

하지만 강해진 것은 마르타 노엘만이 아니었다. 성민의 공은 그보다 훨씬 더 크게 발전했다. 그때에는 100개를 던져도 하나 나올까 말까 했던 공을 마치 일상처럼 던질 만큼 말이다.

분명 20대 초반 선수들의 발전 속도는 엄청나다. 하지만 성민의 발전 속도는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KBO 시절의 성민은 너클볼이라는 공을 몸에 완전히 익히는 과정의 투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의 그는 너클볼의 전설 중 하나인 팀 웨이크필드 조차 딱히 조언을 해줄 게 없는 완전한 너클볼 투수였다.

그리고 두 번째.

-뻐엉!!

비슷한 코스.

하지만 조금 빠져나가는 빠른 공.

“스트라잌!!”

하지만 심판의 손이 올라왔다.

대체 왜?

리그 최고의 포수인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가볍게 성민에게 공을 던졌다.

너클볼조차도 프레이밍을 넣는 그의 미트질은 그야말로 신의 경지라고 봐도 무방했다.

볼카운트 0-2.

마르타 노엘이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호흡을 가다듬었다. 극한까지 단련된 육체는 여전히 막대한 힘을 품고 있었다.

그래, 어찌 됐건 방망이를 휘두르자. 성민의 너클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하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제대로 건드리면 무조건 날려보낼 수 있다.

세 번째.

성민의 공이 날아왔다.

마르타 노엘의 방망이가 그 공을 향해 힘차게 움직였다.

0.1초.

0.2초.

0.3초.

여전히 성민의 공은 날아오고 있었다.

마치 영원히 홈플레이트에 도달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부웅!!

형편없이 무너진 스윙의 뒤편으로 성민의 공이 홈플레이트를 통과했다.

“스트라잌!! 아웃!!”

KBO의 MVP.

분명 2년 전의 그들은 비슷한 선상에 서 있었다.

그리고 마르타 노엘 역시 발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두 사람의 간격은 2,200만 달러와 400만 달러보다 더 넓게 벌어져 있었다.

< 팀 스피릿(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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