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82화 (183/287)

< 광고탑 >

처음 성민의 소식을 들었을 때 권 여사는 캐리어에 짐을 쌌었다.

“아니지. 아니야.”

하지만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물론 아들 일이라면, 특히 결혼과 관련된 일이라면 조금 적극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다.

그녀는 세상에서 성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괜히 내가 섣부르게 끼어들면 오히려 일만 더 망가지지.”

한국에 있을 때는 열애설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미국에 간지 1년 만에 이렇게 떠들썩하게 열애설을 터트렸다. 심지어 바로 이전 주에 미국에서 얼굴을 보고 있던 엄마에게 특별한 이야기도 없었다.

물가에 내놓은 자식같이 불안하기만 한 아들이지만 그래도 자기 연애는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름이 조이 제임슨이라고 했나?”

사실 편견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촌스럽겠지만, 며느리감으로는 당연히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한국말을 쓰는 한국인이 더 좋을 수밖에 없다.

“생긴 것도 예쁘고. 좀 마르긴 했지만, 그래도 뼈대 자체는 좀 굵직굵직하네. 엉덩이도 큼지막하고 맛있는 것만 좀 먹이면 되겠어.”

하지만 아들이 좋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무엇보다 삐쩍 말라서 여리여리한 한국 애보다는 이렇게 튼튼한 외국 애가 나을 수도 있다.

“혼혈 아기가 그렇게 예쁘다고 하던데.”

어느새 조이 제임슨을 검색하던 스마트폰 화면이 혼혈 아이로 넘어갔다.

남자아이, 여자아이.

권 여사의 인생을 가장 행복하게 해준 것은 성민이었다.

자신을 닮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생명체가 삶을 이어 나간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에 가장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성민도 그 기적을 체험해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성민이를 키울 때 동생을 달라고 그렇게 떼를 썼었지. 역시 아이는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좋지.”

권 여사의 머릿속에 귀여운 손자 세 명이 달려오는 그림이 그려졌다.

“그래, 손주들 생기면 부부가 오붓하게 데이트 하기도 힘들어지지. 그러면 별수가 없겠네. 내가 사업 정리하고 미국으로 가서 애들도 좀 봐주고 해야지. 어디, 보스턴에 집값은 얼마나 하려나?”

기분 좋은 김치국이었다.

***

“이상한데.”

-뭐가?

“우리 권 여사요.”

-너희 어머니가 왜?

“너무 조용하잖아요. 미국에서야 그냥 알음알음이라지만, 한국은 SNS부터 언론까지 아주 난리잖아요. 들어보니까 라이프 오브 헐리웃이 OTT 세 가지 전부 다 1위 하고 있다던데. 이렇게 되면 엄마가 분명 뭔가를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세상에서 성민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권 여사인 것처럼, 세상에서 권 여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성민이었다.

분명 지금쯤이면 뭔가 할 때가 됐다.

-이전에 뭔가를 해보려다가 매일 역효과만 내지 않았더냐. 그러니 이번에는 그냥 내버려 두려는 거겠지.

“에이, 우리 엄마가 어떤 사람인데요. 뭐 언론을 움직인다든지, 프레스톤 윌슨 감독을 움직인다든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글쎄다. 나도 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하는 이야기다. 보통이라면 오기로라도 더 덤벼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몇 번이나 역효과만 냈다면 이제 한 번 정도는 내버려 두는 선택을 할 만한 사람이야.

확실히 필 니크로의 말도 설득력은 있었다. 게다가 그의 말대로라면 딱히 나쁠 것도 없었다.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국의 언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저 멀리 한국 땅의 권 여사가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슬슬 화제성이 떨어졌는지 4위까지 떨어졌고, 일본은 10위. 중국은 아예 순위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물론 새 시즌을 시작할 때의 광고효과가 떨어졌고, 1주일에 1화씩 업데이트되는 환경에서 2화가 올라가고 사흘이 지난 지금 순위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헐리웃 오브 라이프는 무려 일곱 번째 시즌이 진행중인 프로그램이었다.

사람들을 끌어들여 앞 시즌을 보도록 유도할 수 있다면 훨씬 높은 순위를 장기간 차지하는 것도 가능한 프로그램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뭐, 많은 것도 필요 없어. 살짝 찌라시 통해서 조이 제임슨이랑 성민의 이야기에 부채질만 해주자고. 그리고 앞으로 성민의 파트가 더 많아질 수 있다는 이야기도 조금 흘리고 말이야.”

헐리웃 오브 라이프의 제작사인 KU미디어의 사장 릭 모리슨의 이야기에 총괄 PD가 되물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아직 배우들이랑 계약도 못 걸었는데 역풍 불면 어쩌려고. 게다가 어차피 이번 시즌에 대한 계약은 끝났고 이 정도 반응이면 나쁘지도 않잖아. 무엇보다 막판에는 성민이 직접 등장하는 파트도 있으니 저쪽 반응도 더 폭발적일거야.”

“하여간 순진해서는. 자네는 역시 작품 만드는 것만 해야겠어. 우리가 OTT 업체들과 간보기 들어가는 건 그 시즌이 끝나기 전부터라고. 게다가 안 그래도 배우들 출연료 폭발하고 있는데 지금 성민이랑 계약도 난항을 겪고 있다며.”

“그건 그렇지.”

“디즈니 쪽에서 요즘 동아시아에 힘 빡 주고 있다는 소식이 있어. 지금이야 세 업체로 공평하게 넣고 있지만, 동아시아 반응이 괜찮으면 거기서 독점 딜을 들어올 수도 있다고. 제작비 빵빵하게 넣어서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오히려 손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거 몇 푼보다는 화제성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야.”

“그거야 우리나라 내의 이야기지. 어차피 아시아 시장은 보너스잖아. 여기서는 화제성이 시청자를 끌어오지만, 거기서는 그걸 봤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끌어오는 게 아니라 성민이라는 광고탑이 사람들을 끌어오는 거라고.”

“그러니까 자네 이야기는 미국 시장은 지금처럼 모든 업체에 서비스를 넣고, 아시아 시장만 독점을 주겠다. 뭐 그런 이야기인가?”

“그렇지.”

확실히 이뤄진다면 나쁘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자네도 매일 제작비 부족하다고 그랬잖아. 메인 배우들 몸값이 너무 올라서 정작 촬영에 쓸 돈이 없다고 말이야.”

“그랬지.”

“게다가 역풍이 좀 분다고 해봤자 뭐 대단하겠어? 어차피 조이야 출연료 자체가 아직 얼마 안되고 성민도 아직 이쪽 업계는 하나도 모르는 애송이잖아. 듣자하니 연예 에이전시도 아니고 스포츠 에이전시한테 이 일도 맡겨둔 상태인 것 같던데. 적당히 돈 좀 더 쥐어 주고 분량이랑 보장해준다고 하면 넘어 올거야.”

“그럴까?”

***

“죄송합니다.”

“네?”

“그런 조건으로는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제 고객님과는 입장차이가 너무 큰 것 같군요. 다음번에는 조금 더 나은 조건을 듣고 싶군요. 아, 물론 다음이 있다면 말이죠.”

한센 릴로우가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조건이 나쁜가? 그럴 리가. 6회 출연에 회당 출연료로 조이 제임슨의 이번 시즌 출연료 수준을 보장했다. 이건 성민이 스포츠 스타라는 점을 고려해도 정말 터무니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조이 제임슨이 5시즌에서는 조연이었고 이번 시즌부터 제대로 된 대우를 받긴 했다. 하지만 성민은 아직 시즌 피날레의 촬영을 한 번 했을 뿐 제대로 된 출연조차 없던 사람이었다.

아예 방송에 관심이 없다면 몰라도 준주연급 출연료가 너무 약한 조건이라니.

“잠깐만요. 뭔가 오해하셨나 본데 지금 이 정도면 정말 업계 최고 대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입니다.”

“글쎄요, 제가 듣기로는 현재 주연 배우들이 회차당 70만 달러를 받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그게 그러니까. 물론 기존 주연 배우들과는 차이가 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 시트콤이 일곱 번의 시즌을 거치면서 점차 중심이 되는 배우들의 몸값이 상승한 결과입니다. 경력을 인정했던 중심배우인 허버트 로렌스도 시작할 때는 회차당 15만 달러에 불과했어요. 심지어 조이 제임슨의 경우 최초에 회차당 3천 달러를 받고 들어왔고요. 이번에 파일럿을 통과한 갤럭시 오브 칠드런도 성인 주연 배우의 출연료가 회차당 11만 5천 달러 아역 배우의 경우는 6만 달러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이건 회차당 1시간짜리 극이에요. 성민에게 제시한 회차당 10만 달러는 정말 파격적인 금액입니다.”

황급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책임 PD의 말에 한센 릴로우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흐음, 일단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잠시 제 클라이언트와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죠.”

잠깐의 시간.

한센 릴로우가 스마트폰을 들고 돌아왔다.

“제 클라이언트가 직접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하는군요.”

스마트폰과 연동된 대형 화면으로 성민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제 막 훈련을 마쳤는지 땀으로 범벅인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만으로 31세라고 믿기 힘든 젊고 깨끗한 얼굴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이야기는 대충 전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제 에이전시에서 뭔가 금액적인 착각을 했던 것 같더라고요. 시트콤의 촬영환경이나 출연료 같은 걸 전혀 감을 잡지 못해서 벌어진 일 같습니다.”

성민의 이야기에 PD의 얼굴에 잠깐 화색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운동선수를 케어하는 에이전시다 보니 방송이라면 토크쇼나 광고 같은 것만 처리를 했거든요. 그래서 휴식기인 겨울을 거의 다 써야 하는 일정인 만큼 그 수준의 페이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성민의 연봉이 얼마였지?

젠장.

2,200만 달러다.

게다가 그는 자국의 TV CF 하나에 최고 150만 달러까지도 받는 특급이다. 그런 선수의 겨울을 거의 다 써야 하는 촬영인데 60만 달러?

이건 에둘러서 그것도 돈이냐? 라는 느낌으로 까는 느낌이다.

생각해보면 성민 수준의 스포츠 스타라면 보통 현역 때는 카메오 출연. 혹은 영화의 주연 등으로 나오지, 이런 가벼운 시트콤에 정식으로 출연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아, 그렇군요. 확실히 금액적인 부분에서 그렇게 생각을 하실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분은 제가 회사와 더 협의를 해보고 다시 이야기를······.”

“아뇨, 뭐 금액적인 부분이야 어차피 제 수준을 맞춰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연예계는 연예계 나름의 연봉 서열 같은 게 있을 텐데 저에게 과도하게 책정을 해주려면 다른 배우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생길 테고 말이죠. 그보다 조금 이야기해보고 싶은 건 역시 촬영환경이나 저의 출연 빈도 같은 부분인데 말이죠.”

이미 언론을 통해 성민의 다음 시즌 출연이 거의 확정적이라는 이야기를 잔뜩 뿌려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아시아권의 OTT 순위는 또 한 번 크게 올라갔다.

즉 회사 입장에서 OTT업체들과의 더 좋은 계약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성민이 필수라는 뜻이었다. 그가 생각할 때 가장 어려운 조건은 금액이었다. 그런데 성민은 그런 가장 어려운 조건을 흔쾌히 양보했다.

목소리가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말씀만 하시죠. 성민 선수 같은 분을 어렵게 모셨는데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부분은 당연히 기꺼이 전부 협조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성민이 웃었다.

***

-무서운 녀석. 원하던 건 다 얻어낸 주제에 고맙다는 말까지 듣다니.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윈 윈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저기도 저에게 돈을 더 쓰면 금액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급여체계가 무너지는 게 문제였을 테니까요.”

애초에 성민이 시트콤에 출연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미 그가 벌어들이는 돈은 년 2,200만 달러. 그리고 후년 이후로는 연 4천만 규모의 돈을 벌어들인다. 그가 진짜 원하는 것은 광고탑이었다.

야구 선수 김성민이라는 이름을 야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트릴 수 있는 광고탑.

-그래도 그렇지 경기 장면을 그대로 시트콤 회차마다 3초 이상씩 노출하는 계약을 받아주다니. 사무국부터 케이블회사 그리고 구단까지.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그걸 쓰려면 사전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닐 텐데 말이다.

“그거야 지금부터 그쪽에서 헤쳐나갈 문제죠.”

회차당 평균 누적 시청자 수 1,200만.

성민이 최고의 광고탑을 손에 넣었다.

< 광고탑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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