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81화 (182/287)

< 너클볼 투수(2) >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이라는 것이 있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18년 동안 헌신했던 메이저 최초의 히스패닉 계 라티노 선수이며 12번의 올스타와 12번의 골글 그리고 1번의 리그 MVP를 기록하며 2개의 반지를 획득한 위대한 사나이의 이름을 딴 상이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단순히 그의 기록에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고국인 푸에트리코와 빈곤한 중남미 국가의 아이들을 위해 식량과 야구 장비 등을 꾸준히 기부해온 이 사나이는 1972년 니카라과 마나구아 지역의 대지진 때 그곳의 사람들을 구호하기 위해 두 차례나 큰 기부를 했다. 하지만 부패한 푸에트리코 군인들에 의해 그 구호품은 하나도 전달되지 못했고, 그는 72시즌이 끝난 직후 3번째 구호품이 든 비행기에 직접 몸을 실었다.

하지만 그런 고생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구호품도 끝끝내 니카라과의 국민에게는 전달되지 못했다.

비행기 추락.

사람들을 돕기 위한 과도한 화물적재가 원인이었다.

그날 이후로 메이저리그는 사회봉사 공로상의 이름에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이름을 붙였다. 가장 위대한 야구 선수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야구 선수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간이었다.

물론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받은 모든 선수가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분명 개자식도 포함되어있다. 하지만 그런 개자식이라도 자신의 생애 중 상당 부분을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사용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팀 웨이크필드는 2010년의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수상자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사회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은 누구나 그 성공을 남들과 나눠야 할 의무가 있다 뭐 그런 이야기지. 사회적인 성공이라는 건 결국 그 시스템을 만든 모두의 공로니까 말이야. 아, 말이 조금 어려웠나?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지?”

팀 웨이크필드의 장황한 이야기에 따라 나온 방송국 직원들이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그들이 기대한 장면은 이런 장면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분명 처음에는 성민이 멋지게 공을 던지고 팀 웨이크필드가 그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그 직후 이어진 장면이 영 이상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배와 후배.

너클볼이라는 특수성.

그렇기에 그들이 기대했던 장면은 은퇴한 선배의 경험이 현역으로 뛰는 너클볼 투수에게 전달되는 뭉클한 광경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무슨 봉사활동 단체의 홍보원 같은 소리뿐이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하여간, 이 녀석은 예전부터이랬지.

‘예전부터요?’

-참 좋은 녀석인데 명예욕이 조금 있었어.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면.

‘아, 그거군요.’

-알아들은 거냐?

성민이 팀 웨이크필드에게 답했다.

“프로 야구가 돌아가는 것 자체가 결국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고, 그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야구에 아낌없이 돈을 쓸 수 있는 것도 이 거대한 사회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니, 저의 성공 역시 그 모든 사람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말씀 아닙니까. 저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러므로 우리는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하지. 난 그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사회를 위해 봉사를 해왔어.”

“잘 알고 있습니다. 2010년에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이라는 큰 상도 받으셨잖아요. 사실상 야구 선수에게는 가장 영광된 상이라고 볼 수도 있죠.”

성민의 이야기를 들은 팀 웨이크필드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호, 자네 이것 제법 말이 통하는 것 같구만.”

필 니크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언제 보더라도 터무니없는 녀석이었다. 물론 누구나 예상하듯 그 터무니 없음이 팀 웨이크필드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여간, 사람을 구슬리는 건 네 녀석을 따라갈 수가 없구나.

‘모두 다 영감님 덕분이죠.’

-응? 그게 무슨 소리냐?

‘어떤 상대라도 함부로 방심하지 말고 철저하게 조사해라. 영감님이 4년 전부터 꾸준히 강조해오신 거 아닙니까.’

-아니, 확실히 내가 그렇게 말한 건 맞는데.

이상하다.

분명 이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경기장에서 상대 타자가 허접하다고 대충 넘기지 말고 철저하게 사전 공부를 하고 올라가라는 이야기가 대체 어째서!!

팀 웨이크필드가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물론 성민은 언제나 그러하듯 적당히 맞장구도 치고 감탄사도 적절히 내뱉어 주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작업을 진행했다.

‘신인왕 3위 한 번. 사이 영 3위랑 MVP 13위. 그리고 올스타 1회. 19년 동안 200승이나 거두기는 했지만, 수상실적이 이름값치고는 조금 미미하긴 하죠.’

사실 팀 웨이크필드도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보스턴 레드삭스에 너클볼을 던지는 투수가 왔다는 사실은 나쁘지 않았다. 과거를 추억하는 팬들이 그를 기억하는 일은 기꺼운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영상으로 지켜본 성민은 지도할 구석이 매우 많아 보였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직접 살펴본 성민은 달랐다.

“쯧쯧, 저 몸에 힘 잔뜩 들어간 것 좀 봐라. 너클볼 투수라면 굳이 저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조금 더 부드럽게 공을 밀어줘야지. 지금이야 힘이 넘치니 괜찮지만 저런 식으로 하면 오래 갈 수가 없어요.”

라고 생각했던 며칠 전의 자신에게 미친 소리 작작 하라고 크게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팀 웨이크필드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너클볼을 던지는 기술적인 부분은 전성기 때 보다 지금이 더 훌륭하다.

그런데 그 더 훌륭한 기술로도 딱히 기술적인 지도를 해줄 것이 없었다.

녀석은 그래도 되는 한도 내에서 정확하게 그렇게 하는 투수였다. 물론 여기서 더 나이를 먹고 약해진다면 지금과 같은 피칭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녀석이 이렇게 던지는 것은 이렇게 던지는 것이 가장 유효하기 때문이었다.

저 카메라 뒤편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를 바라보는 방송인들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선배로서 해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줘야 했다.

외국의 리그에서 10년을 뛰고 온 베테랑 투수로 작년 데뷔와 동시에 신인왕이자 사이 영 2위. MVP 7위에 올스타를 차지한 투수를 상대로 말이다.

“아, 또 한 가지. 그 팀의 베테랑으로서, 그리고 선배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도 중요하겠군. 성민 자네도 너클볼 투수인 만큼 40대 이후에도 메이저리거로 활동할 테니 말이야. 팀의 최고참이 되는 것. 그건 너클볼 투수의 숙명과도 같은 일이지.”

너클볼 투수 선배로서 해줄 말이 있다며 호기롭게 나타날 때만 하더라도 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건가? 하며 약간의 적대감을 드러내던 필 니크로가 마침내 얼굴을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왜 부끄러움은 그의 몫이란 말인가.

이건 도저히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자랑하는 거야 그래, 그러려니 했다. 필 니크로도 1980년에 받았던 그 상이 자랑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성민 앞에서 팀 내 처신에 관하여 이야기해주겠다는 것은 마치 필 니크로 자신에게 새파란 애송이가 너클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겠다고 달려드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 팀 웨이크필드 저 녀석은 마지막 은퇴 과정에서 베테랑으로 해야 할 처신에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는 평가까지 받았던 녀석이었다.

“아하, 그렇군요. 좋은 말씀입니다. 확실히 베테랑이 든든히 중심을 잡아줘야 팀이 바로 서는 법이죠. 안 그래도 요즘 팀원들이 전체적으로 어린 탓에 제가 조금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데 크게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하하, 도움이 됐다니 참 즐겁군. 하여간 오래간만에 등장한 너클볼 투수가 또 마침 우리 팀의 선수라니 참······.”

마침내 카메라가 꺼지고, 썩 만족스럽지 못한 화면을 따낸 방송국 직원들이 자리를 떠났다.

카메라가 없는 경기장.

팀 웨이크필드의 시선이 펜웨이파크를 훑었다. 20대 후반부터 40대 중반까지. 인생의 대부분을 쏟아부었던 경기장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에는 아쉬움이 그득했다.

“그땐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참으로 눈부신 시절이었어. 참 후회되는 일도 많았고 말이야.”

199와 200.

고작 1이라는 숫자를 위해 외면했던 그 많았던 일들.

200승 투수로 은퇴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던가. 카메라가 사라진 지금. 팀 웨이크필드가 성민에게 처음으로 진솔하게 말했다.

“영광은 너무 화려하지.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를 먹으면 더 현명해진다고 생각한다네. 하지만 가끔 그 화려한 영광에 눈이 멀어버리면 현명은커녕 아집만으로 가득한 늙은이가 돼버리지. 팀의 꼭대기에 그런 늙은이가 있으면 그 팀은 엉망으로 망가질 수밖에 없어. 너클볼 투수는 더 길게, 더 오래 뛰는 사람들이야. 성민 자네는 영광에 눈이 멀지 말게나. 영광이란 그걸 바라보고 쫓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달려나간 사람의 등 뒤에서 찬란하게 빛을 내주는 법이니 말이야.”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너클볼 투수들이 그렇듯 참 좋은 녀석이었다. 누구라도 포기할만한 상황에서 끝까지 달려드는 근성이 있었지. 명예에 조금 약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뭔가를 깨달은 모양이구나.

성민이 답했다.

“기록이건, 상이건. 모두 경기의 지나간 결과일 뿐이죠. 거기에 집착하지 않겠습니다. 선수가 집착해야 할 건 오직 한 가지. 팀의 승리뿐이니까요.”

이제 고작 만 31세.

너클볼 투수로는 한참 젊은 나이다. 팀 웨이크필드가 이 젊은 후배의 이야기에 웃었다.

“그래, 마지막까지 집착해야 하는 것은 팀의 승리뿐이지. 그걸 알고 있다면 특별히 더 이야기해줄 것도 없겠군.”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아 그리고 한 가지.”

팀 웨이크필드가 잠시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난 솔직히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자네에게 특별히 이야기해줄 것이 없었어. 뭐 시간이 더 지난 다음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녀석이라면 자네에게 해줄 만한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아, 설마?”

필 니크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팀 웨이크필드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 디키. 바로 그 녀석 말이야. 물론 자네가 속구는 조금 더 빠르기는 하지만, 너클볼과 속구의 구속 차이는 녀석이 더 적었어. 그 요령을 익힐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레퍼토리가 생겨나지 않을까 싶군.”

“감사합니다.”

자신의 자존심보다 후배의 앞길을 먼저 신경쓰는 진짜 선배에게 성민이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

성민과 팀 웨이크필드의 만남이 방송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그리 긴 대담도 아니었고 특별히 편집할 이야기도 많지 않았다.

-응? 이게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을 지켜본 필 니크로가 의문을 표했다.

분명 촬영은 팀 웨이크필드의 자랑(?)으로 시작해서 꼰대질로 끝이 났었다. 그의 진솔한 자기 고백은 방송국 카메라가 철수하고 마이크를 뗀 이후 이뤄졌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진심으로 조언하는 팀 웨이크필드와 그에게 기꺼이 고개를 숙이는 성민의 모습을 끝이 났다.

“아, 그거요? 하여간 방송국 놈들이 극성은 극성이라니까요. 구장에 설치된 카메라가 따로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그걸 구단에 요청하네요.”

-너, 너 설마?

“게다가 마침 또 앵글이 참. 좋긴 하네요. 마치 보스턴의 전설적인 투수와 앞으로 전설이 될 투수의 승계식 같지 않습니까?”

필 니크로가 팀 웨이크필드에게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리고 한 명 더.

다큐멘터리의 끄트머리 후속 다큐멘터리에 등장을 예고하는 R.A 디키에게도.

< 너클볼 투수(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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