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80화 (181/287)

< 너클볼 투수(1) >

“허, 여기서 또 올라온다고?”

드와이언 머피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성민이 메이저에 와서 완투를 한 번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그가 완투를 할 때는 무언가 특별한 순간이었다.

올해로 만 31세. 육체적으로 절정기를 지나고 있는 투수다. 유망주도 아니고 이닝 수 관리를 180이닝 200이닝 같은 식으로 해줄 이유가 없다.

그가 작년에 완투가 적었던 것은 단지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저스는 리그에서 가장 탄탄한 전력을 갖춘 팀이었다. 굳이 선발에게 9이닝을 모두 맡기느니 좋은 불펜을 활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하지만 보스턴은 그렇지 못했다.

“아직 101개입니다.”

수석 코치의 이야기에 보스턴의 감독 엔리케 로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100개를 넘은 투구 수가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다른 불펜들 역시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다. 아니, 불안함으로 따지자면 그 이상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시리즈 이후에 있을 탬파베이 원정에 이동일이 끼어있는 관계로 하루의 휴식일을 더 부여할 수도 있다. 성민의 체력 관리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엔리케 로만은 복지부동이라는 말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보신주의자였지만 슬슬 재계약 시즌이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이러다가 덜컥 부상이라도 당하면 당장의 승리보다 그게 더 큰 마이너스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상식적인 기용이었다.

마운드의 성민이 가볍게 호흡했다.

101개의 투구 수.

-괜찮지?

‘네. 폼이 바뀌어서 그런가? 확실히 좀 편한데요?’

너클볼을 익힌 지 이제 햇수로 4년째.

긴 시간 동안 조금씩 변해온 성민의 피칭폼은 예전의 역동성을 상당히 잃어버렸다. 그 역동성과 함께 구속도 조금 떨어졌지만, 그 대신 성민은 안정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이전 폼이 팔꿈치를 조금 더 쥐어짜는 폼이기는 했지.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냥 몸 자체가 더 좋아진 덕분이라고 봐야지.

‘하긴 그렇게 운동을 했는데 안 좋아졌으면 좀 섭섭하죠.’

확실히 처음 필 니크로를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몸의 두께 자체가 다르다. 194cm의 큰 키는 변함이 없었지만, 몸무게는 10kg이 넘게 증량했다. 그것도 대부분이 근육이다.

-부웅!!

“스트라잌!!”

여전히 위력을 잃지 않은 74.7마일의 너클볼이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미트를 두들겼다. 이어지는 89.4마일의 속구.

-딱!!

가볍게 공을 받아 일루에.

“아웃!!”

남은 아웃 카운트는 두 개.

어렵지 않았다.

페데리코 수와 같은 대단한 수비라면 물론 좋다. 하지만 박동엽처럼, 루시 알베리처럼 대단치 못한 수비라도 괜찮다. 하물며 후안 칼초는 그 툴이 메이저에 미치지 못할 뿐. 나름대로 충분히 건실한 수비를 해내고 있었다.

이어지는 두 번째 타자는 7구째 느린 너클볼에 헛스윙 삼진.

그리고 마지막.

초구 빗맞은 타구가 내야 뜬공으로.

깔끔한 삼자범퇴.

성민이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아직까지 점수는 0:0

경기가 중계되는 실시간 채팅방은 이미 난리가 났다.

-빌어먹을 보스턴 마린스 같으니. 그래도 지금까지 점수는 똑바로 내더니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마린스의 전통이 이어진다. 9이닝 무실점 노디시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루시 자식 사라지고 수비 좀 똑바로 되나 했더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사실 공은 제법 치는데 이상하게 운이 없음.-

-운이 없는 게 아니라 수비 시프트가 되게 좋은 거야. 아니 야수가 한 곳에 우글우글 몰려있으면 좀 밀어치든지 아니면 강하게 넘기든지 해야 하는데. 자꾸 똥볼만 쳐대잖아.-

-보스턴 그래도 홈런도 제법 잘 치지 않아? 왜 오늘따라 홈런도 안 나옴?-

9회 말.

보스턴의 공격.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오토 로드리게스를 마운드에서 내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민이 31세의 완성된 투수라면 그는 아직 25세밖에 되지 않은 완성돼가는 투수다. 올해부터 이닝 수 제한은 풀렸지만 110개가 넘어가는 투구 수는 과하다.

하지만 딱히 긴장은 하지 않았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필승조는 단단하다.

1이닝만.

지금이 80년대도 아니고 9회 111개의 공을 던진 투수가 10회까지 올라올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보스턴의 약해빠진 불펜 따위.

-딱!!

매튜 쿠퍼의 방망이가 공을 제대로 후려쳤다.

2, 3루 간. 대주자로 교체되어 들어왔던 호세 마리코의 글러브가 공을 쫓았다. 그는 제법 노련한 내야 유틸이었다. 발도 빠르고 센스도 괜찮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보스턴의 서브 유격수인 후안 칼초만도 못한 글러브 질.

호세 마리코의 글러브 끝으로 공이 스쳤다.

좌익수 정면.

매튜 쿠퍼는 빠른 주자였다. 하지만 오클랜드의 백업이 조금 더 빨랐다. 그의 발이 1루에서 멈췄다.

노아웃 주자 1루.

괜찮다. 그럴 수 있다.

드와이언 머피가 자리에서 일어나 펜스에 몸을 기댔다. 오클랜드의 불펜은 단단하다. 그들은 상당 기간 상위라운드로 투수를 뽑아왔다. 89마일에서 91마일 사이의 공을 던지는 오토 로드리게스 이후로 이어진 100마일짜리 불펜이다. 쉽게 당할 리 만무하다.

그리고 매튜 쿠퍼의 뒤를 이어 랄로 가야르도가 타석에 들어왔다.

-부웅!!

“스트라잌!!”

99.7마일의 속구.

타이밍이 완벽하게 밀렸다. 랄로 가야르도가 머리를 갸웃했다.

두 번째.

-부웅!!!

“스트라잌!!”

100.4마일의 속구.

마운드의 젊은 불펜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는 오직 강속구 하나로 메이저의 마운드에 오른 투수다. 자신의 무기에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하여 세 번째.

빠른 공, 빠른공. 그리고 더 빠른 공.

무려 101.3마일.

젊은 불펜 투수의 공이 날아왔다.

타석의 랄로 가야르도가 눈을 빛냈다.

하나, 둘, 셋.

충분하다.

수비 바보. 공을 받는 것밖에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일루수. 보스턴의 팬들은 종종 그를 향해 차라리 지명타자로 쓰는 게 더 나을 거라는 평가를 할 정도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 중에서 그 누구도 그가 없는 보스턴의 미래를 상상하지는 않았다.

그는 메이저의 가장 우수한 젊은 재능들이 모인 이곳 보스턴 레드삭스에서도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타격의 재능을 타고난 남자였다.

101.3마일.

투수의 손을 떠나 홈플레이트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까지 0.34초.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랄로 가야르도의 방망이가 광속구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 공을 두들겼다.

-딱!!

높게 뜬 타구가 펜웨이파크의 자랑 그린 몬스터를 향해 날아갔다.

11미터의 거대한 녹색 장벽 위. 9회까지 0:0으로 이어지는 승부를 지켜보던 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높게 뜬 타구!! 좌측!! 좌측 담장!!]

굳이 공을 지켜 볼 필요도 없었다. 1루에 서 있던 매튜 쿠퍼가 가볍게 2루를 밟고 3루를 향해 달렸다. 덕아웃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동료들이 우르르 홈플레이트를 향해 뛰어나왔다.

[넘어갔습니다!!]

매튜에게는 가벼운 하이파이브.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랄로 가야르도의 몸 위로 선수들의 손바닥이 쏟아졌다.

[랄로 가야르도 끝내기 투런포!!]

[1점도 허용하지 않은 철벽 투!! 김성민 9이닝 완봉승!!]

-아오, 보스턴 이 망할 놈들. 어제까지 점수 잘 내다가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대체 이 경기가 이렇게까지 쫄깃할 경기였나?-

-보스턴이 그래도 원래 공격은 멀쩡하던 팀이었잖아.-

-성민이 타자 놈들 줄빠따 때려도 무죄 인정.-

-그래도 오클랜드보다는 낫지. 오토 로드리게스는 8이닝 무실점하고 노디시전이잖아.-

-거긴 애들이 쪼잔하게 가성비니 뭐니 하면서 제대로 된 선수를 영입도 안 하고, 잘 키운 애들은 매일 놔주는 팀이잖아.-

-가성비? 가성비 하면 우리 성민이 아님?-

-에이 성민이는 그래도 2,200만 달러짜리 선수인데 이건 가격 상관없이 만족스러운 가심비라고 봐야지. 가성비라고 하기에는······. 응? 잠깐만. 뭐지? 왜 연 2,200만 달러짜리가 가성비죠?-

-2,200만 달러 받고 4천만 달러치 해줘서 그렇습니다. 고갱님.-

-다저스 놈들 하여간 이런 선수나 이상한 유망주 받고 내주고 그러니까······, 근데 쟤들은 왜 이런 선수를 내주고도 리그 1위임?-

-다저스도 지금 성민이 내주고 받아온 에밀리오 가르시아가 지금 평자책 3.97 찍으면서 5선발치고는 상당히 잘하고 있음. 거긴 거기 나름대로 성공적인 트레이드라고 자화자찬 중임. 2년짜리 에이스 내주고 장기적으로 키워줄 선발 유망주 받아왔다고.-

-지금 다저스에서 3.97이면 그렇게 좋은 투수는 아니지 싶은데. 그 역대급 수비진에 늘서의 투수 친화 구장들에서 말이야. 그 녀석 아직 쿠어스는 한 경기도 안 뛰었잖아.-

-아무리 봐도 그거 다저스 정신승리인 듯. 애매한 애들 다섯 명 받느니 확실하게 해주는 에이스 하나가 100배는 낫지.-

-뭐가 어찌 됐건 보스턴은 확실히 남는 장사인 듯. 성민이는 진짜 2,200만 달러 완전 개혜자계약임.-

***

너클볼은 극히 까다로운 구종이다.

그것을 제대로 구사하는 투수가 2017년 이후 단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그 까다로움을 증명했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은 커다란 실패에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더이상 프로야구 선수로 뛸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을 때.

그때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것이 바로 너클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 대부분은 가르침에 인색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가르침을 주기 위해 애를 쓰는 편이었다.

팀과 인종을 넘어 리그나 국가조차 초월한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의 최전방에는 항상 필 니크로가 있었다.

정확히 2031년까지.

“뭐? 그 양반이랑 나를?”

“어떻게 할까요?”

“근데 그 양반 마이애미에서 그냥 잘살고 있는 거 아니었어? 갑자기 방송은 어떻게?”

“이번에 구단 차원에서 초청 행사가 있는 김에 그림을 만들고 싶은 모양이더라고요.”

“뭐, 어차피 등판일도 아니고, 방송사에서 자진해서 그림을 만들어 주겠다면 나야 나쁠 건 없지.”

“그러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어, 그렇게 하도록 해.”

필 니크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너클볼의 일인자였다. 그리고 그의 사망 이후 너클볼을 대표하는 이름은 R.A 디키. 너클볼로 사이 영을 수상한 유일한 사나이가 차지했다.

하지만 너클볼을 가르칠 수 있는 가장 유능한 선생이 R.A 디키였나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통산 19시즌 627경기 463선발 200승 180패 22세이브.

평균자책점 4.41.

너클볼 그 자체였던 필 니크로처럼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지도, 단 1년이라도 가장 밝게 빛났던 R.A 디키처럼 리그에 한 획을 긋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가장 훌륭한 너클볼 투수였으며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너클볼 그 자체였다.

보스턴의 전설적인 너클볼 투수.

팀 웨이크필드.

바로 그 남자가 성민을 찾아왔다. 십여 대의 방송국 카메라와 함께.

“반갑군. 예전부터 한번 보고 싶었다네. 너클볼 투수 선배로서 해줄 이야기도 좀 있고 말이야. 하하하.”

-저 자식이 지금 대체 뭐라는 거야?

< 너클볼 투수(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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