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심비? 가성비!(5) >
-헐.
필 니크로가 입을 떡 벌렸다.
오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선발은 오토 로드리게스. 서비스 타임 5년 차의 투수다.
오클랜드의 패턴대로라면 내년 즈음, 혹은 이번 시즌 각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번 시즌 막판 즈음에 어딘가에 팔아치우고 유망주를 데려올 녀석이다.
즉, 매우 뛰어난 투수라는 뜻이다.
올해의 욘 마르틴 정도? 물론 전성기와 비교해 많이 쇠락했다고는 하지만, 욘 마르틴이면 여전히 리그 에이스급 투수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 니크로가 저렇게 감탄할 정도인가를 생각해보면 사실 그건 아니다.
수비 시프트.
1940년대부터 이미 사용됐다고 이야기되는 이것은 21세기의 발전된 관측시스템을 거치며 한층 더 발전했다. 선수들의 타구 방향과 속도 그리고 낙구 지점 등을 완벽하게 계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시프트가 무적은 아니다.
야구 게임만 해봐도 알 수 있다. 그라운드는 일곱 명의 야수가 커버하기에 너무 넓고 야구공은 너무 작다. 게다가 100개 중 70개의 공이 그쪽으로 향하기에 그쪽에 수비를 집중한다는 말은 나머지 30개의 확실한 범타를 놓친다는 말이 된다.
-저걸 저렇게?
87.1마일의 투심.
-딱!!
매튜 쿠퍼의 타구가 2루와 3루 사이로 힘차게 뻗어나갔다. 보통이라면 무조건 안타가 될만한 타구다. 하지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야수들 위치는 특별했다.
이루수와 유격수가 2, 3루 사이에. 그리고 일루수가 1, 2루 사이에. 심지어 수비 위치 역시 정상적인 위치보다 5미터는 더 뒤로 물러난 위치였다. 게다가 외야수들 역시 좌익수 쪽으로 더 크게 치우쳤다.
“아웃!!”
사실 흔히 볼 수 있는 시프트는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매튜 쿠퍼는 우타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극단적인 시프트는 보통 좌타자를 대상으로 많이 구사한다. 보통의 경우 일루수는 1루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방금과 같은 시프트를 구사하게 되면 1루를 커버할 수 있는 것은 투수뿐이다.
이 경우 투수도 달려오면서 공을 잡아야 하는데, 발 빠른 타자의 경우, 예컨대 매튜 쿠퍼와 같은 타자의 경우 투수가 타자보다 먼저 1루에 도착한다는 보장도 없고 달려오면서 공을 잡아내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가 충족됐기에 가능한 수비였다.
첫 번째는 시프트에 대한 믿음.
그리고 두 번째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오토 로드리게스의 수비능력.
1회 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1피안타로 보스턴 레드삭스의 공격을 막아냈다.
-오늘은 좀 쉽지 않겠는데?
‘언젠 쉬웠습니까?’
-젠장, 차라리 네 녀석 팀이 오클랜드였더라면. 어차피 에두아르도 녀석도 작년에는 저 팀이었잖아.
‘그랬다면 그 팀의 주인공이야 됐겠지만, 메이저리그의 주인공은 물 건너갔겠죠. 게다가 2,200만 달러는 당연히 못 맞춰줬을 테고 장기 계약도 물 건너갔을 거고요. 무엇보다 저거 저 녀석이니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성민의 시선이 오클랜드 덕아웃에 앉은 오토 로드리게스에게 향했다.
사람들은 투수의 제구력에 너무 큰 환상을 갖는다. 이게 다 일본 만화 때문이다. 애초에 18.44미터나 떨어진 곳에 사람 몸통만 한 크기에 전력으로 공을 욱여넣는 작업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힘들다. 그런데 그걸 또 몇 등분을 해서 집어넣는다?
‘차라리 100마일짜리 공을 던지는 녀석들이 더 인간적이죠.’
전문가들이 평가하는 성민의 커맨드는 리그 최정상급이었다. 성민의 경우 애초에 극단적으로 구속을 추구했다면 98마일도 너끈할 포텐셜이 있다. 하지만 같은 폼, 같은 포인트로 너클볼을 던지기 위한 타협의 결과가 90마일이다. 그리고 98마일을 던질 수 있는 투수가 90마일짜리 공을 던진 결과가 그 커맨드다. 물론 98마일짜리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가 90마일짜리 공을 던진다고 누구나 그런 커맨드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귀신이 공인하는 세계 최정상급의 재능을 지닌 남자조차도 여기까지다.
그런 의미에서 오토 로드리게스는 괴물이다.
투심과 포심 그리고 커터. 세 가지의 속구를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꽂아 넣는다. 존을 구 등분 했다고 쳤을 때 10번을 던지면 거의 7, 8번을 그렇게 집어넣는다. 물론 우완치고는 구속이 빠른 편은 아니다. 하지만 포심의 평속이 93마일. 투심과 커터도 89마일은 된다.
타자가 원하는 곳에서 미묘하게 벗어나는 공을 뿌리고, 시프트를 건 야수들이 공을 잡아내는 형태.
그들은 그야말로 일본 만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그런 야구를 하고 있었다.
-글쎄다. 쟤들이 보기엔 너도 만만치 않게 비인간적일 것 같구나.
물론 필 니크로의 이야기처럼 성민 역시 그리 인간적인 야구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부웅!!
“스트라잌!!!”
74.7마일의 너클볼이 타자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1회 초부터 느꼈지만, 오늘 심판의 존은 정말 태평양이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가볍게 성민에게 공을 던졌다.
너클볼을 받으면서도 미트질을 할 수 있는 괴물.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다.
‘뭐, 사실 이 정도 홈어드밴티지는 있어야죠.’
사실 KBO 시절에는 사직에서 경기를 뛸 때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심판이 의도적으로 했다기보다는 심판도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같은 판정을 해도 눈에 불을 켜고 야유를 내뱉는 팬들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분명 차이가 난다. 사람인 이상 그런 압박에 자유롭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저스에 있을 때는 사실 2선발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드밴티지를 그리 받지 못했다. 응원문화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고, 성민이 메이저 1년 차의 선수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뭐, 한국처럼 용병이라는 개념이 없는 메이저리그라지만, 어쨌거나 1년 차 선수에게는 배짱을 부리는 심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3만 8천의 뜨거운 시선이 심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이곳은 펜웨이파크.
보스턴의 홈구장.
그리고 성민은 명실상부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에이스다.
-뻐엉!!
“스트라잌!!”
심판의 손이 올라왔다.
타석에서 잠시 물러난 타자가 머리를 돌려 심판을 바라봤다.
“이걸 잡아준다고요?”
심판의 표정은 굳건했다. 성민이 속으로 그런 심판을 응원했다. 경기를 지켜보는 오클랜드의 팬들은 이래서 로봇심판이 필요하네. 뭐네. 하며 떠들어댔다.
하지만 뭐 그게 어쨌단 말인가? 어차피 그들도 자기 팀 투수가 혜택을 받을 때는 아무 말 없이 판정도 경기의 일부라고 이야기할 텐데.
-아니, 모든 사람이 그럴 것 같지는 않다만······.
‘에이, 영감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영감님 60년대에 야구 한 올드스쿨 이잖아요. 야구의 유구한 전통을 지키셔야죠.’
-너 작년에는 판정 이상하다고 KBO에서는 그래도 눈 가리고 아웅으로 심판들이 AR 기계라도 쓰는데 여긴 그런 것도 없다고 엄청나게 욕했었잖아.
‘제가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저에게 도움이 되는 녀석들은······’
-그래, 좋은 놈이지.
좋은 심판의 가호 아래 성민이 경기를 이어나갔다.
세 번째.
-부웅!!
“스트라잌!! 아웃!!”
깔끔한 헛스윙 삼진.
오클랜드 덕아웃에 드와이언 머피 감독이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성민을 상대로 점수를 뽑지 못하는 경우는 상정했잖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이래선 쉽게 내려가지도 않겠는데?”
“다저스 시절도 그렇고 완투를 자주 하는 투수는 아닙니다. 오히려 등판 간격이 조금 짧다면 짧은 편이죠. KBO는 무조건 닷새 휴식이었는데 나흘 휴식에도 제법 적응이 빨랐으니까요. 애초에 과거의 다른 너클볼 투수들처럼 70마일대의 공을 설렁설렁 던지는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전력투구에 가깝게 공을 던지고 있으니, 그들과 똑같은 패턴이라고 보긴 힘들죠.”
“······.”
“존을 넓게 쓰고 있으니, 최대한 투구 수를 늘리고 불펜을 빨리 올라오게 해보죠. 저기 불펜이야 어제 봐서 알잖습니까.”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지켜보자고.”
2회 초. 투구 수 11개.
삼자범퇴.
1이닝에 평균적으로 사용하는 투구 수가 15개가량이다. 그리고 오늘 성민이 2회까지 끝내는데 사용한 투구 수는 17개. 1이닝 던진 것보다 조금 더한 수준에 불과했다.
미셸 에쉬만이 성민에게 다가왔다.
“오늘 컨디션 죽이는데? 하품이 나올 지경이야.”
“왜? 그쪽으로 공 좀 보내줘?”
“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져도 내가 아주 제대로 된 거 보여줄 테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흐흐.”
“허튼소리 하는 거 보니까 일은 잘 풀렸나 보네.”
“덕분에. 오늘은 아침밥까지 차려 주더라고. 뭐 이 정도면 다 풀렸다고 봐야지.”
필 니크로가 미셸을 노려봤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녀석과는 어지간하면 어울리지 말아라. 아주 질이 안 좋은 녀석이야.
‘메이저에 이런 녀석이 한, 둘도 아니고. 어떻게 전부 거르겠습니까. 뭐 그냥 적당히 관계 유지하는 거죠.’
오토 로드리게스가 피칭을 이어갔다.
효율적이고 훌륭한 피칭이었다. 보스턴의 강타선을 상대로 장타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장타가 없는 산발적인 안타는 점수로 이어지지 않았다.
2회에도 역시 무득점.
공수 교대.
필 니크로의 시선이 오토 로드리게스를 훑었다.
-으음.
‘왜요?’
필 니크로가 별거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
과거에는 공중파를 통한 시청률이 드라마의 인기를 가늠하는 척도였다.
하지만 2034년 현재. 시청률은 그저 부수적인 자료에 불과했다. 애초에 공중파에서 지원하는 자금만으로는 이만한 드라마를 찍을 수도 없다.
OTT(Over The Top)서비스.
셋탑박스를 넘어선, 즉 플랫폼 종속을 넘어선 이 서비스야말로 드라마, 영화산업에서 현대의 공중파라고 볼 수 있다.
라이프 오브 헐리웃의 경우 상당한 기대작이었다.
공중파에 중계된 날. 자정에 OTT를 통해 서비스됐는데, 보통 런칭 첫 날에는 북미 시장에서는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대부분 개그가 그렇듯, 특정 문화를 깊숙이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 문화의 개그코드를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존재했다. 물론 미국의 경우 여러 가지 면에서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시대의 패권국이었고 특히 문화에 있어서는 그 위치가 더더욱 공고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한,중,일 동아시아 3국에서만큼은 그 영향력이 지배적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국제적인 위치에서 10위 안쪽에 이름을 올릴만한 강대국들이었으며,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는 하나의 블록을 만들만한 컨텐츠의 힘을 갖춘 국가들이었다.
대부분의 미국 시트콤들이 이 3개 국가에서는 상당히 시들했다.
라이프 오브 헐리웃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평범한 개그 프로그램보다 오히려 더 하다면 더했다. 애초에 라이프 오브 헐리웃은 허버트 로렌스라는 한물간 헐리웃 배우를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입장벽이 있는 다큐멘터리형 시트콤이었으니까.
“맙소사. 이것 좀 보세요.”
하지만 2034년 현재.
그 당연한 일이 부서졌다. 그것도 정말 대단한 수준으로.
“뭐야? 한국 1위에 일본 4위? 거기다가 중국에서는 10위?”
< 가심비? 가성비!(5)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