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75화 (176/287)

< 가심비? 가성비!(3) >

마운드의 맥스 슈피겐이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 알베리는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지 않는 머저리였다. 녀석은 분명 어설프지만 툴 적인 부분에서는 재능이 넘쳤다. 보스턴의 프런트는 아무리 답이 없는 상황에서 2주라고 해도 싹이 보이지 않는 21살의 애송이를 메이저에 올릴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소프트웨어 쪽이지 하드웨어쪽이 아니었다.

반면 후안 칼초는 노련했다.

그는 어쨌거나 이 바닥에서 8년째 굴러먹고 있는 남자였다. 애게, 고작 8년? 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평균적인 메이저리거의 수명은 5년에서 6년에 불과하다. 여기저기 치이고 까이며 이팀 저팀 떠돈 세월이라고 해도 메이저에 8년이나 붙어있었다는 것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커리어다.

그런 말이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물론 항상 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이 경우는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

후안 칼초는 영리했다. 그는 자신의 툴이 메이저에서 성공적으로 버틸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했다. 반면 그는 굉장히 뛰어난 적응력과 전술적 이해를 갖췄다. 수비만으로 따지자면 괜찮은 이루수, 쓸만한 유격수, 나쁘지 않은 삼루수, 아주 좋은 일루수. 거기에 어찌 됐건 써먹을 수는 있는 좌익수와 중견수 수비까지.

그는 일찌감치 거의 모든 포지션을 땜빵할 수 있는 유틸리티로 자신의 롤을 정했고, 그것은 그가 메이저에서 아직 꾸역꾸역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는 특정한 팀에서 어느 포지션을 꿰차고 몇 년씩 뛸만한 실력까지는 한 끗이 부족했다.

-딱!!

[쳤습니다!! 빠른 타구!!]

[후안 칼초 공을 쫓습니다만 아, 조금 늦었습니다.]

에러는 없었다.

루시 알베리와는 조금 다른 의미다. 그가 소극적인 플레이로 에러를 줄였다면, 후안 칼초는 애초에 툴 자체가 부족했다.

제발!! 하는 상황에서는 역시나!! 하는 답밖에는 얻을 수 없는 유형이다.

이를 악물고 던진 97.2마일의 빠른 공.

몸쪽으로 잘 제구된 속구가 유격수 정면 땅볼을 생산했다.

안정된 자세로 공을 잡아낸 후안 칼초가 가볍게 제롬 스튜버츠에게 공을 던졌다. 2루 포스아웃. 그리고 일루 송구.

더블 플레이. 그리고 공수 교대.

지난 사건을 통해 나름 성민과 아주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미셸 에쉬만이 성민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좀 어때?”

“뭐가?”

“신참 말이야. 투수의 시점으로 봤을 때는 좀 어떤가 해서.”

“미셸 네가 보기엔 어떤데?”

“글쎄, 솔직히 말해서 아직은 루시 녀석과 별 차이는 못 느끼겠어.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동작이 굼뜨다고 해야 하나? 어깨도 오히려 루시 녀석이 더 나은 것 같고 말이지. 물론 송구의 정확도는 더 높아 보인다만, 어차피 우리 랄로야 워낙 공을 잘 받잖아.”

성민이 미셸의 이야기에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난 꽤 괜찮은 것 같은데?”

“대체 어떤 점이?”

“각이 나오잖아. 게다가 생각도 있고.”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그 순간.

[볼카운트 2-2. 빠른공!!]

-딱!!

[후안 칼초!! 쳤습니다!! 2, 3루 간을 꿰뚫는 적절한 타구!! 무사히 1루를 밟습니다.]

이번 시즌 메이저 첫 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한 후안 칼초가 1루에 서서 멋지게 팔을 뻗었다. 바로 직전 경기까지. 루시 알베리의 형편없던 타격에 목말라 있던 보스턴의 관중들이 그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덕아웃에 앉아있던 맥스 슈피겐 역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지!!”

이어지는 보스턴의 타자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득점, 그리고 또 득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감독 드와이언 머피가 조용히 불펜으로 연결된 전화기를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빌어먹을. 1990년대의 머니볼처럼 선발은 사서 쓰고, 불펜은 키워 쓴다는 방식을 고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원은 한정적이고 그렇기에 더 좋은 투수는 승리의 가능성이 있을 때 사용해야 한다.

이미 점수는 5:1.

게다가 아직 4회밖에 안 됐다. 벌써 승리조를 소모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다.

오클랜드의 젊은 롱릴리프가 마운드에 섰다.

그리고 두들겨 맞았다.

그렇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불펜들이 차례차례 보스턴의 타자들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물론 맥스 슈피겐 역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타자들에게 열심히 두들겨 맞았다. 중간중간 암에 걸릴 것처럼 숨 막히는 수비 역시 종종 벌어졌다. 하지만 승리를 향한 강한 집념이 그의 멘탈이 붕괴되는 것을 막았다.

-볼수록 느끼지만, 저 녀석도 좋은 투수가 될 자질이 있어.

‘본래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법이죠.’

-글쎄다. 보통이라면 좌절감에 망가지고 무너지는 게 인간이긴 하다만······. 확실히 성민 네 녀석이라면 내가 없었어도 지금만큼은 아니라도 뭔가 했을 것 같긴 하니까. 설득력은 있구나.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보스턴이 주는 좌절감은 마린스까지는 아니니······.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8회 초. 원아웃 주자 1, 2루.

7.1이닝 6실점 3자책.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로 승리투수의 요건은 충분히 충족했다. 아직 승계주자가 둘이나 남아있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그렇게 맥스 슈피겐이 자신의 역할을 나름대로 훌륭하게 수행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맥스 슈피겐 이후로 곧바로 이어지는 대 환장 쇼. 순식간에 승계주자를 깔끔하게 들여보내며 맥스 슈피겐의 자책이 5자책으로 치솟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린 몬스터 위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이 심장을 움켜쥐고 쓰러질 것 같은 장면들이 몇 차례 연출됐다.

“젠장, 점수 차이 넉넉하다고 불펜을 대충 올리는 거야? 이러다가 역전이라도 당하면 어쩌자고!! 우리 팀은 1이닝에도 10점을 내줄 수 있는 팀이라고!!”

“톰. 네 말도 맞긴 맞지. 우리 팀이라면 1이닝에 10점도 너끈히 가능하지. 근데 저거 우리 팀 필승조잖아······.”

공포와 경악. 그리고 분노 속에 경기가 계속됐다.

좁혀지는 점수 차에 오클랜드의 감독인 드와이언 머피가 몇 차례나 망설였다.

‘이제부터라도 필승조를 올려야 하나?’

하지만 많이 좁혀졌다고는 하지만 8회 초 오클랜드의 공격이 끝난 상황에서도 점수는 여전히 5점 차이였다. 이제 남은 공격은 고작 한 번. 필승조를 올리기에는 너무 큰 차이였다.

그리고 그런 드와이언 머피의 고민을 보스턴의 타자들이 곧바로 완벽하게 날려주었다. 그들은 글러브를 끼고 저지른 실수 따위 방망이로 만회한다는 기세로 추가점을 만들었다.

좋게 말하자면 화끈한 타격전이 이어졌다.

물론 양상은 조금 달랐다. 보스턴이 불펜과 야수가 콜라보로 대 환장 파티를 만들었다면, 그래도 오클랜드는 불펜의 수준 자체가 떨어졌다.

9회 초.

보스턴의 마무리 투수인 릭 코디로리가 오클랜드의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17:11.

양 팀 합계 28득점. 경기가 종료된 시간은 무려 저녁 11시 37분. 4시간 37분짜리 경기였다. 이긴 팀도 패배한 팀도 만신창이였지만, 어쨌거나 승리를 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마운드에서 내려와 경기를 지켜보던 맥스 슈피겐이 가장 크게 기뻐했다. 동료들이 그의 머리에 시원한 포카리스웨트를 부었다. 맥스 슈피겐은 이미 샤워까지 끝낸 말끔한 몸이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시즌 첫 승리는 그런 것이니까.

+++

‘역시 승리조를 올렸어야 했나?’

덕아웃에서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고민하던 오클랜드의 감독 드와이언 머피에게 팀의 수석 코치가 다가왔다. 선수 시절부터 함께 뛰었던 녀석이다.

“감독님. 뭐하십니까? 또 혼자 궁상떠는 거예요?”

“넌 하늘 같은 감독한테 궁상이 뭐냐? 궁상이.”

“1, 2년 본 사이도 아니고. 함께 한세월이 30년인데. 뭐 그런 걸 따집니까. 궁상 그만 떨고 얼른 일어나세요. 어차피 이미 지난 일을 곱씹어서 뭐 하겠습니까. 게다가 어차피 야구는 세 번 싸워서 두 번만 이기면 되는 경기잖아요. 오늘 쟤들 필승조 다 썼고, 우리는 안 썼죠. 게다가 뭐 우리 팀 상황 잘 아시면서.”

“뭐, 그건 그렇지.”

그래, 어차피 1년 162경기를 치르다 보면 경기에서 지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아쉬운 경기가 한 두 개도 아니다. 그냥 그런 날 중에 하루일 뿐이다.

드와이언 머피가 머리를 두어 번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시리즈는 두 경기나 남아있었다.

[보스턴 레드삭스. 오클랜드를 상대로 홈경기 1차전 17:11 승리!!]

[5타수 2안타 2득점!! 후안 칼초의 눈부신 활약.]

-후안 칼초 굿굿굿!! 한 경기 만에 루시 알베리 놈이 13경기 동안 했던 거의 절반을 해주네.-

***

오래간만의 승리에 고무된 선수들이 단체로 저녁 식사를 하러 떠났다. 아마 작년과 같았다면 맥주도 몇 잔 시원하게 마실 상황이었다.

“굳이 말 안 해도 알아서 잘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일 성민이 등판인 거 잘들 알지?”

“물론이죠.”

하지만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한 마디에 모든 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그 친구 등판일인게 뭐 어때서?”

“우리 팀 에이스잖아요. 적당히 자제해야죠. 게다가 오늘 하루 이겼다고 시리즈가 끝난 것도 아니고요.”

자신의 질문에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하는 랄로 가야르도의 이야기에 후안 칼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스급 투수들 성격이 더러운 경우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헤아리기도 힘들다. 경기에서 조금이라도 부진했을 때 그게 어제 술 때문이라고 화를 내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게다가 후안 칼초는 애초에 다음 날이 휴식일이 아니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

선발 출장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선발 출장을 보장받지 못할 때 더 그래야한다. 누군가 컨디션이 별로일 때 언제든 그라운드에 오를 수 있는 준비가 필수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후안 칼초 본인이 부족한 툴로 이 바닥에서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모두가 즐겁게 식사를 하는 시간.

후안 칼초가 최선을 다해 선수들을 살폈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현재 팀의 리더 역할을 하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원래 팀에서 목소리가 가장 컸던 선수는 누구일까? 작년 베테랑들과 트러블은 어떻게 이뤄졌으며 그 과정에서 중심이 됐던 선수는 누구일까?

사실 실력만 좋다면 이러건 저러건 상관없다.

하지만 결국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다.

후안 칼초는 비록 95만 달러 짜리 선수라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이렇게 메이저리거로 살아남았고 유망주 시절 그보다 더 재능이 있었던 친구는 지금 세차장에서 차를 닦고 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2차전.

마운드에 성민이 올라왔다.

***

“조이, 내일 저녁은 어때? 죽이는 레스토랑 하나 알아놨는데. 내 머스탱을 타고 가면 금방이야.”

“죽이는 레스토랑이요? 저희도 저녁 메뉴 최근에 아주 끝내주는데.”

“아, 맞다. 그랬지. 그러면 뭐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겠네. 어때? 내일 저녁?”

“몇 시 괜찮으세요?”

“오, 드디어!! 내일 일곱 시. 뭐 더 일찍 보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 이전엔 내가 스케쥴이 있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러면 내일 저녁 일곱 시로 예약 잡아드릴게요. 아쉽게도 제가 그 시간에는 약속이 있어서 도와드리기 힘들 것 같아요. 저 대신 로렐이 도와드릴겁니다.”

“응? 내일 약속이라니?”

“아, 오래간만에 남자친구랑 데이트 약속이 있어서요.”

“이봐, 조이. 아직도 그 설정 유지 중인 거야? 남자친구라니.”

라이프 오브 헐리웃의 일곱 번째 시즌이 시작됐다.

언제나처럼 조이 제임슨에게 찝적거리는 허버트 로렌스와 그것을 슬쩍 피해 가는 조이 제임슨의 티격태격.

하지만 시트콤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달랐다.

-조이 제임슨 진짜 성민이랑 만남?-

-에이, 아닐 거야. 조이 남자 친구은 고등학생 때부터 만났던 사람이잖아. 성민은 한국에서 작년에 미국으로 온 선수고.-

-현실과 시트콤을 구분을 못 하는 사람은 좀 빠져 봐.-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시트콤.

그 묘한 타이밍이 성민이라는 선수의 화제성에 한번 더 불을 붙였다.

< 가심비? 가성비!(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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