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74화 (175/287)

< 가심비? 가성비!(2) >

사실 오클랜드가 성민을 데리고 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에두아르도에게도 장기 계약을 제시할 형편이 되지 못해서 1년 더 사용하지 못하고 보스턴으로 넘긴 처지다.

보스턴의 경기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보며 중얼거리는 오클랜드 프랜차이즈 출신 감독에게 수석 코치가 답했다.

“감독님도 우리 사정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잘 알지.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샌프란시스코 놈들 때문인 것도 말이야. 하여간 배때기에 욕심만 아주 그득해서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연고지를 산호세로 옮기려 한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었다. 산호세 역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연고지 이전을 환영하며, 심지어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샌프란시스코를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했던 것 역시 유명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MLB의 연고지는 지역 단위가 아닌 광역 연고다.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의 경기장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산호세가 샌프란시스코 광역권에 포함되는 도시라는 점이다. 샌프란시스코는 해안가를 따라 광역권을 갖고 있었고, 오클랜드는 내륙지역을 광역권으로 갖고 있다.

한국으로 치자면 부산광역권에 울산이 포함되기 때문에 양산에 있는 팀이 울산으로 연고지를 옮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내륙지방에 가난하고 인구도 적은데 근처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라는 빅마켓 팀 구장이 있는 오클랜드로는 환장할 노릇이다.

오클랜드가 추구하는 ‘가성비’는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뤄지는 일이었다.

물론 1998년의 빌리 빈 이후로 근 40년.

오클랜드의 머니볼 역시 그 시절의 머니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마이너로 내려가는 날.

스프링 트레이닝 때부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석 달간의 동거.

그 과정에서 가장 깊은 교분을 나눴던 키스톤 콤비인 제롬 스튜버츠가 루시 알베리의 마지막을 환송했다.

“그러면 잘 내려가고. 가서도 성민 이야기처럼 몸 사리지 말고 팍팍 알지? 거기서도 열심히 하면 기회는 또 올 거야. 게다가 막판에는 꽤 괜찮았잖아.”

“네. 그래야죠.”

딱히 잃어버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후안이 복귀할 거고 그렇게 되면 마이너로 당연히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저 욕을 먹지 않고 최대한 그 시간만 때우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다시 마이너로 내려가야 하는 순간이 되고 나니 뭔가 아쉬웠다. 허전했다.

왜 처음부터 몸을 사리지 않고 달려들지 않았을까?

어쩌면 홈런 두, 세 방을 쾅쾅 쳐내고 후안을 대신하여 여기 말뚝을 박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부상에서 돌아온 후안이 조금 부진하다는 이유로 바로 콜업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제야 성민이 이야기했던 잃을 게 없다면 더 치열해야 한다는 말이 뼛속 깊이 와닿았다. 물론 너무 늦었지만.

“성민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글쎄다. 아까 내가 출근할 때 보니까 성민 자리에 차가 없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등판하는 날이 아니니까, 이제 슬슬 출근하지 않을까?”

“그렇군요.”

루시 알베리가 짐을 챙겨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선수들의 지정석이 옹기종기 모인 주차장. 루시 알베리의 자리는 당연히 저 먼 곳이었다. 제롬 스튜버츠의 이야기처럼 성민의 자리는 아직 비어있었다.

‘마지막 인사하고 싶었는데. 아쉽네.’

딱히 선수들과 대단한 인간관계를 쌓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성민이 그에게 해주었던 충고는 뼛속 깊숙하게 와 닿았다. 무엇보다 선수단을 가족이라고 했던 그의 진솔한 이야기는 너무 감명 깊었다. 결국, 루시 알베리 자신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도 자신을 가족이라 생각했기에 했던 쓴 말이 아니겠는가.

“어?”

그때였다.

저 멀리서 눈에 띄는 대형 SUV 한 대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국의 자동차 회사에서 협찬한 최신의 차량이었다. 전체적으로 중산층을 위한 럭셔리 카라는 포지션을 잡은 브랜드였던 만큼 성민의 ‘급’을 생각하면 조금 부족한 모델이었지만, 그 회사에서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만든 역작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얼핏 듣기로는 성민이 저 차를 사용하는 조건으로 몇 개의 CF도 찍었고 제법 비싼 금액의 모델료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게다가 애초에 자동차라는 것이 같은 부품을 쓰더라도 얼마나 숙련된 조립공들이 조립하느냐로 질이 달라지기도 하는 만큼, 몇몇 부분에서 ‘특별한’ 부품을 사용한 성민의 차는 성능에서만큼은 정말 최상위급 럭셔리카들에게도 딱히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성민.”

“루시? 아, 오늘이 내려가는 날이었지.”

“네. 얼굴 못 보고 가나 싶었는데, 또 이렇게 마주치네요.”

“그래, 시간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밥이나 같이 한번 하는 건데. 당장 오늘 저녁 경기 선발이지?”

“네. 지금 저희 팀 유격수 풀이 좀 그러니까요. 덕분에 경기는 실컷 뛸 수 있겠죠.”

“그래, 몸 사리지 말고 팍팍 뛰라고. 물론 조금이라도 아픈 곳이 생기면 그 즉시 멈추고 의사 찾아가고. 마이너에 재능있는 선수들이 무너지는 가장 큰 원인이 부상인 거 잘 알지? 특히 인대 같은 건 나가는 순간 그 즉시 운동능력이 훅 떨어진다고. 게다가 한창 성장할 나이에 1년씩 잃어버리는 건 정말 최악이기도 하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것만 신경 쓰면 넌 무조건 잘 될 거야. 21살에 빅리그를 밟아보고, 그리고 이렇게 다시 내려가는 경험은 엄청나게 큰 자산이니까. 지금 기분 별로잖아. 안 그래?”

“네, 솔직히 좀 그렇죠.”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똑똑히 기억해두라고. 기회가 왔을 때 잡지 못하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넌 운이 좋은 거야.”

성민의 이야기에 루시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운이 좋다구요?”

“그래, 넌 아직 21살이잖아. 생각해보라고. 지금 그 교훈을 27살 28살에 얻었으면 어떻게 됐을지를. 너도 대충은 알잖아. 이 바닥이 나이에 얼마나 예민한지를 말이야. 아마 그 교훈을 제대로 설욕 한 번 못 해보고 커리어가 끝장났을걸?”

성민의 이야기에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래, 만으로 21살이면 대부분 한국의 선수들은 군대를 대신하는 2군 리그. 그러니까 마이너 팀 같은 곳에서 실력과 상관없이 무조건 2년 정도 뛰어야 하는 시기야. 내가 그때 말했던 그 유격수 녀석도 마찬가지였지. 넌 지금 2년 뛰고 돌아와도 23살밖에 안 되는데 지금 상황 봤을 때는 가을 확장 같은 때에 올라와서 또 기회를 받을 수도 있을 거야.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좋은 모습이길 기대할게.”

“네, 그 기대 꼭 응답하겠습니다.”

씩씩하게 인사하고 떠나는 루시를 바라보며 필 니크로가 중얼거렸다.

-성민아, 근데 방금 너 엄청나게 꼰대 같았다.

“네?”

-하긴 너도 이제 슬슬 나이를 먹고 있으니까. 이제 너도 어린 애들한테는 영감이라고 불릴 날이 머지않은 거지.

“아니, 잠깐만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가 영감이라뇨.”

-허허, 선수 분석하기 싫다고 쫑알거리고 마운드에서 허구한 날 방심이나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신인들에게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니. 역시 세월의 힘이란······.

“영감님 그거 이제 고작 3년밖에 안 된 일이거든요? 그리고 저 아직 한창이거든요?”

-그래, 나도 현역 시절 그 시점에서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근데 그거 아느냐? 메이저 평균 수명이 5년에서 6년 정도인 걸 감안할 때 3년이면 평균 수명의 절반이라는 거? 그리고 보스턴의 어린 애들과 네 나이는 거의 10살 정도 차이가 난다는 거? 마린스에서 너랑 10살 차이 나는 녀석이면 그 이형진인가 하던 2군에 타격 코치 녀석 아니었던가?

확실히 이형진과 성민의 나이 차이는 11살 차이.

그리고 성민이 기억하건데 자신의 신인 시절 형진은 정말 까마득한 선배였다.

“뭐, 그러면 꼰대인 걸로 하죠. 사람이 원래 나이를 먹으면 그 나이에 어울리는 포지션을 찾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생각해보니 제가 신인 시절에 형진 선배도 좀 그랬던 것 같긴 하네요. 제가 그래서 그 선배를 존경했죠. 제 롤모델 중 하나였습니다.”

성민이 필 니크로의 놀림을 뻔뻔하게 긍정했다. 이렇게 되니 오히려 필 니크로 쪽에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역시 이 녀석은 이런 종류의 싸움에서 무적인가?

루시의 짐이 치워진 라커룸.

교통사고로 DL에 올랐던 후안 칼초가 돌아왔다. 사실 그도 엄밀히 말하자면 보스턴의 주전 유격수는 아니었다. 올해 나이 31세. 25인과 40인 언저리를 오가는 평범한 선수다. 본래는 보스턴의 주전 유격수인 바그너 가이탄의 백업을 위해 영입한 내야 멀티에 가까웠다.

하지만 바그너 가이탄의 햄스트링 부상이 힘줄까지 손상된 생각보다 심각한 부상이었기에 최소 전반기는 쉬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후안 칼초에게는 뜻밖의 기회인 셈이다.

‘쉽게 잡기 힘든 기회야.’

그는 루시 알베리와는 달랐다.

25살에 룰5드래프트로 이적. 이후로는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청선수로 참가하여 스플릿 계약으로 메이저를 떠돈 기간만 벌써 6년이다.

NPB 그리고 KBO의 용병 제의도 받아봤다. 하지만 그는 메이저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실력이 메이저리그의 유격수 전체를 통틀어 30등 안에 속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때가 맞지 않았을 뿐이다. 그저 기회가 부족했을 뿐이다.

실제로 메이저리그에 그런 선수들은 널렸다.

후안 칼초는 이번 기회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라커룸을 슥 훑었다.

전체적으로 젊은 나이의 선수들. 베테랑들은 몇 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젊은 선수들을 휘어잡겠다는 허황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도 보스턴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작년에 팀이 아주 아작이 났었지.’

물론 그랬던 것 치고는 의외로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분명 스프링트레이닝 중반까지는 이보다 더 험악했던 것 같았는데.

라커룸의 파워를 결정짓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커리어, 그리고 폼.

물론 거기에 인맥이나 선수의 품성 같은 것들이 추가되긴 하지만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두 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후안 칼초가 주목하는 라커룸의 리더는 에두아르도 크루즈였다. 보스턴에서의 커리어가 부족하긴 했지만, 장차 명예의 전당급 포수로 주목받는 실력자다.

사실 폼으로 따지면 성민 쪽이 더 대단한 선수이긴 했지만, 녀석은 선발 투수다. 그리고 보통 선발 투수는 좋은 선수일수록 리더와는 거리가 멀다.

“몸은 좀 괜찮아? 부상이 제법 컸다고 들었는데.”

“그냥 뼈에 금이 좀 갔었어. 리햅에서 컨디션이 좀 안 올라와서 몇 경기 더 치르기는 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말짱해.”

“다행이네. 다들 뭐해? 눈치 보지 말고 인사하라고. 아무래도 거의 한 달만이라 좀 어색하긴 하지만, 앞으로 함께 할 우리 동료잖아?”

그리고 그의 생각은 그리 틀린 것 같지 않았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먼저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고 라커룸의 선수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역시 이 녀석이구나.’

31세.

어중간한 실력으로 이 팀 저 팀을 굴러다닌 눈칫밥 인생만 6년째.

후안 칼초가 자신이 잘 보여야 할 대상을 확정 지었다.

그리고 라커룸의 한편.

“저 녀석 눈을 너무 데굴데굴 굴리는데?”

“이제 막 라커룸에 합류했잖아. 한창 어색할 때지. 게다가 우린 그냥 유격수 자리에서 제 몫만 해주면 되잖아? 설마 루시보다 엉망이겠어?”

“하긴, 그건 그런가?”

성민과 미셸 에쉬만이 그들의 새로운 유격수를 바라보며 최소한 루시 알베리보다는 낫겠지라는 기대감을 품었다.

< 가심비? 가성비!(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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