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72화 (173/287)

< 팀 동료(7) >

“하고 싶은 말이 참 많긴 했는데, 다행히 성민이 다 해준 것 같네. 이 빌어먹을 애송이 새끼야. 넌 프로 생활하면서 남들에게 못 볼 꼴 하나도 안 보일 것 같아? 아니, 그걸 떠나서 이제 대체 누가 널 신뢰할 거라고 생각하냐? 무슨 일만 있으면 쪼르르 달려가서 기자한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는 너 같은 새끼한테 말이야.”

“그, 그건······.”

“시발, 뭐 대단한 내부 고발이라면 차라리 어디 가서 고개라도 당당하게 들고 다니지. 고작 한다는 게 동료가 다른 여자랑 술 마시고 놀았어요. 이게 전부야? 그래서 이제 행복하냐? 지금 내가 누구랑 통화하고 왔는지 알아? 내 와이프야. 어?”

“죄송합니다.”

맥스 슈피겐이 고개를 숙였다.

이미 성민에게 한 차례 팀은 가족이라는 말을 듣고 충분히 납득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입놀림이 누군가의 가정을 파괴할 것 같은 상황이다. 그것도 언론에 치부를 완벽히 까발리는 최악의 방식으로.

성민이 미셸 에쉬만의 팔을 붙잡았다.

“미셸, 일단 진정하고 이야기를 좀 하자.”

“진정? 그래, 진정 좋지. 하지만 그 전에 오늘 저 자식 면상은 한 대 꼭 후려갈겨야 속이 풀리겠어.”

“이봐 미셸. 지금 네 마음 충분히 이해해. 만약 그거 한 대로 네 속이 풀릴 것 같다면 그것도 좋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고작 그걸로 네 속이 풀리겠어?”

루카스 버튼이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성민이 눈짓으로 막았다.

지금은 너희들이 끼어들 타이밍이 아니다.

“그리고 미셸. 죽빵을 한 대 갈기더라도 일단 벌어진 일은 수습을 하고 해야지. 이대로 있을 거야?”

“수습? 엎지른 물을 어떻게 담겠어. 이제 와서 기사 내리고 정정 기사를 쓴다고 해봤자 어차피 사람들은 외부에서 압력으로 했다고 생각할 거야. 게다가 내 와이프도 그걸 믿을 리가 만무해.”

“엎지른 물도 일단 잘 닦아 내야지. 안 그러면 마루까지 썩는다고.”

미셸 에쉬만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후, 성민. 넌 열 받지도 않아? 이번 일로 피해를 본 건 나뿐만이 아니잖아. 그런데 이 녀석이 용서가 되는 거야?”

성민이 웃으며 답했다.

“내가 말했잖아. 팀은 가족이라고. 철없는 사춘기 막냇동생이 멍청한 짓을 했다고 내다 버릴 수는 없지. 안 그래? 두들겨 패서라도 끌고 가야지. 그게 가족 아니겠어?”

사실 이번 기사가 정조준하는 대상이 성민이라는 것은 너무 명백했다.

그렇기에 지금 성민이 보여주는 태도는 선수들에게 너무나도 놀라웠다. 미셸 에쉬만과 함께 분노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그를 다독이다니.

누구나 입바른 정론을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당사자가 손해를 보는 상황에서 그런 정론을 말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금 성민은 그 어려운 일을 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미셸 에쉬만을 말리기 위해 따라온 보스턴의 선수들이 반짝이는 시선으로 성민을 바라봤다. 그것은 명백한 존경의 눈빛이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팀은 가족이지. 실수를 저질렀다고 어떻게 가족을 내다 버리겠느냐. 어떻게든 잘 타이르고 다독여서 함께 해야지.

‘에이.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가족도 너무 엉망진창이면 연을 끊어야죠. 경효 선배 아시죠? 그때 그 일본 애들 소개해줬던 마린스 스카우트 팀 선배.’

-응?

‘그 선배 동생이 글쎄 도박보다 무섭다는 사이비에 빠져서 집안을 아주 난장을 냈다잖아요. 글쎄 명절에 어머니가 제사상에 안 올린 음식 따로 빼놨는데, 그걸 어떻게 믿냐고 음식을 싹 새로 하라는 소리를 해대서. 에휴. 하여간 아무리 가족이라도 선을 넘으면 쳐내야죠.’

-잠깐만. 성민아. 방금은 분명 두들겨 패서라도 끌고 가야 한다고······.

성민이 필 니크로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아, 이 새끼. 구라구나.

내가 받은 이 찡한 감동은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 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서부터가 구라였던 걸까.

필 니크로가 혼란에 빠졌다.

성민이 미셸 에쉬만에게 한 걸음 크게 다가갔다.

“미셸. 지금 상황이 최악인 건 나도 알고 있어. 나보다 네가 더 힘들 거라는 것도. 나야 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욕 좀 먹고 만나는 사람과 다투는 정도겠지. 하지만 넌 가족에게 굉장히 곤란한 상황이잖아.”

“후, 그래. 안 그래도 지금 와이프가 아주 난리가 났어. 대충 오해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믿을 리가 만무하지. 아마 집에 돌아가면 휑한 집에 내 물건들만 다 박살 난 채로 있을걸?”

보스턴의 선수단은 전체적으로 젊었다. 하지만 야구 선수들의 평균적인 결혼 연령은 의외로 낮았다. 선수단 가운데 이미 결혼을 했던 몇몇 선수들이 미셸의 말에 공감했다. 그들 중에도 어딘가에 현지처를 따로 두고 있는 선수도 있을 수 있었다.

“미셸 사실 내가 한 가지 방법이 생각이 났거든?”

“방법?”

“어, 솔직히 말하자면 난 좀 어렵긴 해. 난 이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십만, 아니 어쩌면 수백만의 생각을 돌려놔야 하는 일이야. 하지만 넌 그냥 네 와이프만 믿게 하면 되는 일이잖아? 물론 그것도 충분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래서? 네가 생각한 방법이 뭔데?”

“네 와이프를 설득하는 거야.”

미셸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거 안 해본 것 같아? 눈 뜨자마자 기사 확인하고 그것부터 했다고. 하지만 말이 안 통해.”

“그야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지. 하지만 잘 들어봐. A와 B와 C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 그런데 그 중 A랑 C가 거짓말로 밝혀져. 그러면 그 사람이 말한 B는 진실일까? 거짓일까?”

“글쎄? 그야 당연히 거짓말 아닐까?”

“아니지, 정답은 알 수 없다지. 하지만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대부분 사람이 A와 C에서 거짓말을 한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이 말하는 B의 신뢰성도 의심하게 되거든.”

이야기하는 성민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적절한 성량과 호흡. 그리고 말을 내뱉는 타이밍. 한국 시절에도 그랬지만, 성민의 말에는 기이한 흡입력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뻔한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민을 둘러싼 선수들은 모두 성민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성민이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사람은 참 묘해서. 언제나 더 최신의 정보를 신뢰하는 경향이 있고, 무엇보다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경향도 있단 말이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자 생각해보자고. 일단 그 피터 스테빙슨이라는 기자가 했던 이야기 가운데 몇 가지는 확실한 거짓이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기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지. 하지만 일부러 오해하도록 이야기를 했고, 그 오해는 확실한 거짓이야. 난 너랑 함께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여자를 만나는 순간에는 자리에 없었어.”

“그래, 그건 그렇지.”

“게다가 어차피 피터 스테빙슨은 여기 토론토에 살아. 그리고 네 와이프는 보스턴에 살지. 둘은 딱히 만날 수도 없고 연락할 길도 없어. 그리고 피터 스테빙슨의 기사는 이제부터 진위 자체를 의심받을 거야. 그러면 그 과정에서 유일하게 네 와이프에게 이번 일에 대해서 강력하게 설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그리고 과연 미세스 에쉬만은 어떤 이야기를 더 믿고 싶을까? 네가 말해주는 이야기 아닐까?”

미셸 에쉬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그거야.”

“하지만 그의 기사가 진위 자체를 의심받을 거라는 건?”

“이봐, 미셸. 지금 이 정도로 화제가 되는 일이야. 게다가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너도 알잖아. 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슈퍼스타라는 거. 매일 라커룸에 나를 찾는 기자만 대여섯 명인 거 잘 알지? 지난 경기에서도 그랬잖아. 그 기자들이 과연 이런 기사를 보고 뭘 할까? 지금쯤 내 에이전시에서는 사실관계 분명히 밝혔을 거고, 그거 기반으로 기자들은 호텔 CCTV 자료 쫙 돌릴 거야. 물론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법이니까. 여전히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나를 의심하겠지. 하지만 SNS의 전반적인 여론은 바뀔 거야. 거기에 이제 화룡점정으로 붐!!! 조이가 나를 믿는다는 멘션 하나 정도 날려 줄 거야. 이해돼?”

“확실히 네 말처럼 그렇게 되면······.”

“확실히 그렇게 될 거야.”

성민이 미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자, 그러면 이제 어서 미세스 에쉬만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할지를 고민하는 게 어떨까? 뭐 어차피 우리 곧 보스턴으로 돌아가긴 하지만, 일단 네 말처럼 짐 싸서 집 나가기 전에 얼굴 보고 이야기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맞아. 그래야지.”

미셸 에쉬만의 시선이 맥스 슈피겐에게 향했다. 두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이다. 물론 고작 그 정도로 미셸 에쉬만의 마음이 풀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성민의 이야기처럼 상황을 수습하는 게 우선이다.

“맥스. 일단은 급한 일이 있으니 그것 먼저 처리하자. 하지만 똑똑히 기억해둬. 오늘 일은 절대 이대로 끝난 게 아니니까.”

선수들 사이에서 함께하던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미셸 에쉬만의 어깨에 팔을 얹은 채 함께 그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미셸 에쉬만이 사라진 방.

보스턴의 선수들이 맥스 슈피겐에게 다가가 한 마디씩을 건넸다.

“이봐, 맥스 이번엔 네가 너무 경솔했어. 이건 미셸이 화를 낼 만한 일이었다고.”

“제롬, 안 그래도 성민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게 잘 이야기 해줬어. 맥스도 이만큼 말을 들었으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야. 안 그래 맥스?”

“하여간. 루카스 넌 너무 맥스를 싸고도는 경향이 있어.”

“아냐, 루카스 말도 맞아. 지금 맥스는 충분히 혼쭐이 났다고. 우린 맥스의 친구, 아니 가족이잖아. 충분히 반성하는 가족은 꾸짖는 게 아니라 그냥 한번 꼭 안아주는 거로 충분하다고.”

“큭큭, 그래서 랄로, 네가 맥스를 꼭 껴안아 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 소란 속에서 맥스 슈피겐이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성민에게 물었다.

“성민, 제가 미셸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랄로가 이야기했잖아.”

“네?”

“가족끼리는 원래 한번 꼭 안아주는 거로 충분하다고. 지금 당장은 미셸도 열이 머리끝까지 뻗쳤어. 하지만 녀석은 베테랑이야. 너희는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 바닥에서 베테랑이라는 말은 이런 일 저런 일 다 경험하면서 10년 넘게 버텼다는 뜻이라고. 미셸도 일이 잘 해결만 된다면 아직 어린 녀석의 실수 정도는 맥주 한 잔과 진솔한 사과면 용서해줄 수 있는 남자야.”

“베테랑······.”

성민이 맥스 슈피겐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를 바라보는 선수들의 눈동자는 여전히 반짝거렸다.

그것은 어린 시절. 어떤 어려운 일도 척척 해결해주던 아버지를 슈퍼맨처럼 바라보던 아이들의 눈빛이었다.

“자자, 다들 자기 방 가서 짐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 해야지.”

성민의 호령에 선수들이 그제야 시간을 파악하고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 밖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코치도 성민의 완벽한 대처에 감탄했다.

-마지막에 베테랑 이야기 아주 자연스러웠다.

‘영감님이 눈치를 챈 시점에서 이미 자연스러운 건 아니거든요. 하지만 뭐 나쁘지 않죠. 말했잖아요. 사람은 원래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고요.’

-응? 잠깐만. 설마 너?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맥스랑 저 애송이들이?

‘에이, 아니죠.’

-그렇지? 그렇게 넓은 의미로 한 이야기는 아니었지?

‘당연히 이 광경을 지켜본 모두죠. 미셸도, 저기 코치들도. 이제 각자가 믿고 싶은 대로 생각하겠죠. 뭐, 그 믿고 싶은 대로가 저에게는 상당히 좋은 환경인 것 같지만요.’

***

“허, 김성민 선수가 그렇게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줬다고요?”

매사추세츠주의 보스턴시.

펜웨이파크의 두 번째로 커다란 사무실.

어느 반들반들한 대머리 사내가 비행기보다 빠르게 도착한 보고에 감탄을 표했다. 왠지 작년 스트레스로 사멸해버린 모근이 부활이라도 해줄 것 같은 기쁜 소식이었다.

물론 그런 기적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 팀 동료(7)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