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71화 (172/287)

< 팀 동료(6) >

-번거로운 일?

“이건 엄마한테 배운 건데요. 뭔가 일이 막 밀려오면 일단 생각을 해야 한답니다.”

-생각?

“네, 상황을 침착하게 파악하고, 분류하는 거죠. 나쁜 일과 나쁘지 않은 일. 급한 일과 급하지 않은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그러면 아무리 복잡한 상황이라도 결국 내가 할 일은 명확해진다는 거죠.”

예시로 들었던 상황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아 울고 있는 자신을 바라볼 때였다는 점은 좀 그랬지만, 어쨌거나 어머니가 해줬던 그 이야기는 성민이 삶을 사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됐다.

“지금 상황은 한 덩어리 같지만 사실 크게 보면 두 가지잖아요. 저랑 조이.”

-그리고 보스턴 레드삭스의 팀워크.

“그렇죠. 뭐 세세하게 유부남 미셸의 불륜도 섞여 있긴 하지만 그건 어차피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어쨌거나 저랑 조이의 문제는 사실 그리 나쁘지는 않은 일이에요. 조이랑 말했던 것처럼 어차피 CCTV도 다 있고, 앞으로 몇 시간 정도 더 크게 확 일어났다가 후속 기사로 싹 사라질 문제니까요.”

-하지만 괜히 트집 잡힐 거리를 만드는 건 좋은 생각은 아니다.

“에이, 뭐 그냥 그렇게 믿어버릴 애들도 있긴 하겠죠. 하지만 그런 애들은 뭘 해도 그냥 저를 싫어할 멍청한 애들이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차피 모두가 저를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완벽하게 해명된 부분을 물고 늘어지는 머저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해명 기사가 나오는 것도 그리 길지도 않을 거예요. 헐리웃 스타와 관련된 스캔들 기사만큼 트래픽 모으기 좋은 기사도 드물죠. 아마 오후 정도면 나올 껄요?”

-그렇군.

“하지만 이 나쁘지 않은 일도 괜히 조이와 제가 다르게 움직이면 나빠질 수 있는 문제였죠. 조이가 먼저 나와의 관계를 부정한다든지, 혹은 나를 비난하는 SNS라도 하나 올리면 굉장히 문제가 커지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나쁘진 않지만 급한 문제였어요. 어쨌거나 이건 해결했으니 됐고. 이제 나쁘면서 급하지는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좀 섞여 있는 번거로운 일을 건드려볼 차례네요.”

성민이 조이 제임슨과 자신의 스캔들에 관한 움직임을 정리하던 그 시간.

보스턴의 다른 선수들 역시 이 기사를 접했다.

“이 망할 새끼가?”

기사를 처음 본 맥스 슈피겐이 느낀 것은 분노였다. 자신의 가려운 곳을 살살 긁어주던 피터 스테빙슨이었다. 그리고 절대 이런 기사를 내보내지 않겠다고도 약속했다. 하지만 대체 이게 무슨 재앙이란 말인가.

당장에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걸었다. 저장된 번호는 아니었지만 바로 며칠 전 번호였던 만큼 찾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이봐!! 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네? 다짜고짜 아침부터 전화해서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분명히 내 불평은 기사로 나가는 일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었잖아!!”

“아,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오해?”

“전 분명 맥스 슈피겐 선수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기사가 나갈 일은 없을 거라고 했었죠. 그래서 익명의 제보자 C 선수라고 밝혔잖습니까.”

능글맞게 이야기하는 피터 스테빙슨의 목소리에 맥스 슈피겐이 분노했다.

“당신, 이러고도 멀쩡할 줄 알아? 어?”

“이 멍청한 자식. 넌 대체 생각이라는 걸 하기는 하는 거냐? 여기서 협박을 해서 뭐 어쩌겠다고.”

그리고 그 분노에 대답한 것은 피터 스테빙슨이 아닌 성민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성민이 맥스 슈피겐의 스마트폰을 빼앗았다.

“성민? 여, 여긴 어떻게?”

“어떻게 오기는. 너 카드키 하나 루카스한테 맡겼잖아. 하여간. 지금은 이쪽이 더 급하니까 네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그제야 성민의 뒤에 서 있던 루카스 버튼의 얼굴이 보였다. 루카스 버튼이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성민의 뺏어 든 맥스 슈피겐의 폰에 귀를 가져다 댔다.

“피터 스테빙슨씨?”

“누구?”

“술과 여자 때문에 부진한 선수 A와 함께 밥을 먹은 염문설의 선수 B입니다.”

“기, 김성민 선수?”

“기사는 잘 봤습니다. 참 재밌더라고요. 제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소설가가 하나 있는데 그 녀석보다 훨씬 노련한 것이 역시 짬밥이라는 건 무시할 수가 없겠더군요.”

“전 사실관계만 명시했을 뿐입니다.”

피터 스테빙슨의 이야기에 성민이 피식 웃었다.

“누가 뭐랍니까? 왜 이렇게 긴장을 하고 그러세요. 어차피 그런 일은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

“긴장은, 누가 긴장을 했다고. 크흠······.”

길어지는 피터 스테빙슨의 말에 성민이 눈치를 챘다.

이 인간, 의도한 게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의도하긴 의도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사건이 커지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성민을 그냥 헐리웃 유명 배우와 염문설이 있는 야구 선수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민은 2034년 기준으로 총 5,200만. 4,200만의 캐나다보다 무려 천만 명이나 많은 그리고 그 대부분이 인터넷을 손에서 놓지 않는 대한민국의 슈퍼스타였다.

딥러닝에 의한 번역기의 발달로 언어의 장벽이 일정 부분 무너진 지금. SNS에 한정했을 때 성민의 영향력은 피터 스테빙슨이 생각한 최대치를 훌쩍 뛰어넘는다.

“뭐, 좋습니다. 어차피 관련된 일은 에이전시들과 구단의 변호사들이 해결할 문제니까요. 아, 그런데 그거 아시죠?”

“뭐를?”

“우리 구단이나 스포츠 에이전시는 이런 문제에 조금 덜 예민하지만 연예인들 에이전시는 이런 거 엄청 예민한 거요. 아, 맞다. 애초에 연예 전문기자님이시죠? 이전 기사들 보니까 주로 연예인들 가십을 쓰시던데. 뭐 그러면 잘 알고 계시겠네요.”

“하지만 저는 사실관계만······”

성민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건 법원에서 따질 일이라니까요.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니죠. 어차피 제가 에이전시에게 지불하는 천문학적인 돈도 그렇고, 제가 내는 세금도 그렇고 다 이런 거 하라고 있는 거잖아요. 아 그건 아시죠? 저 이번 시즌 연봉이 2,200만 달러인 거.”

애초에 피터 스테빙슨은 토론토 지역 타블로이드에서 SNS의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기사로 올리는 기레기다. 담이 작은 남자다.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캐나다 역시 변호사 비용은 만만치 않다. 이번 클릭으로 벌어들인 돈? 연 2천만 달러 이상의 소득을 벌어들이는 선수가 비용처리를 해서 사용하는 변호사를 따라갈 수 있을까?

이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김성민 선수. 혹시나 오해가 있었다면 제가 죄송합니다. 우리 진정하고 이성적으로 대화를 해보죠.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기사도 얼마든지 내릴 수 있습니다.”

“아, 피터 스테빙슨 기자님. 혹시 닥터 스트레인지라고 아십니까? 마블 영화에 나오는 마법사인데 타임스톤이라는 걸 다루거든요.”

“네? 갑자기 닥터는 왜?”

“찾아가서 시간을 돌려달라고 해보세요. 기자님이 할 수 있는 해결방법은 그것뿐이니까요. 아시잖습니까. 엎지른 물은 다시 담아봤자 구정물인 거. 이만 끊겠습니다.”

성민이 스마트폰을 접어 맥스 슈피겐에게 툭 던졌다.

조곤조곤 피터 스테빙슨을 조지는 성민을 지켜보던 맥스 슈피겐이 입을 열었다.

“늦었지만 기사를 내리기라도 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보니까 정정기사를 요청해도 할 것 같던데.”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애초에 자극적인 기사였으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퍼 날랐고, 그렇게 퍼 날라서 유명해진 거지 그깟 지역 타블로이드에서 정정기사 낸다고 사람들이 거들떠나 볼 것 같아? 그리고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그게 아닐 텐데?”

본래 건방짐의 끝을 달리는 맥스 슈피겐이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염치라는 것은 있었다. 성민은 지난 스프링 트레이닝 때부터 개인 훈련에 굳이 자신을 끼워주며 그를 배려해줬다. 그것은 솔직히 비용적인 부분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굳이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맥스 슈피겐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다.

그가 벌게진 얼굴로 변명했다.

“그게 나는 분명 성민은 먼저 들어왔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망할 새끼가!!”

“그러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것 같아?”

분위기를 살피던 루카스 버튼이 슬쩍 끼어들었다.

“이봐, 맥스. 지금 일단 성민에게 사과하라고. 그게 의도였건 아니건 간에. 너 때문에 성민은 정말 큰 피해를 입었잖아.”

“그,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 사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민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성민, 맥스도 나쁜 의도는 아니었어요. 아시잖아요. 맥스가 가끔 생각 없이 말하는 거. 이건 그 쥐새끼 같은 기자 놈이 교활했던 겁니다.”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루카스. 너도 지금 뭘 착각하고 있어.”

“네?”

“지금 내가 내 스캔들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휴, 이 멍청한 놈들아. 어차피 내 이야기는 오늘이 가기 전에 에이전시랑 여기저기서 정정해줄 거야. 완전한 헛소리니까. 애초에 조이랑도 이야기가 잘 끝났고.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잖아.”

맥스 슈피겐과 루카스 버튼 모두 멍청한 표정으로 성민을 바라봤다.

성민이 잠시 타이밍을 살폈다.

이쯤이면 슬슬 시간이 됐는데?

그들이 묵는 곳은 특급 호텔이다.

푹신한 카펫이 소음을 잡아준다. 하지만 그 카펫으로도 막을 수 없는 거친 소리가 성민의 귀를 스쳤다.

지금이다. 성민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 멍청한 새끼들이? 정말 이해를 못 하는 거야? 너희들은 대체 팀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직장 동료? 그냥 같이 공놀이하는 사람들? 우린 1년 365일 중에서 무려 270일이 넘는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이야. 이래도 이해가 안 돼? 너희들 학교 다닐 때 부모님 얼굴 보는 시간이 얼마나 됐냐? 나중에 결혼하면 와이프나 애들 얼굴 보는 시간은 얼마나 될 것 같냐?”

여전히 멍청한 맥스 슈피겐의 얼굴.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루카스 버튼의 얼굴.

그리고 멈춘 발걸음 소리.

성민이 말을 이어갔다.

“팀이라는 건 말이다. 가족이야. 형제라고. 물론 너희 형이 가끔 재수 없을 때가 있을 거야. 엄마가 사준 치즈 케잌을 혼자 2조각 다 먹을 때도 있을 거고, 마지막 남은 시리얼을 탈탈 털어먹고 갈 때도 있겠지. 너무 재수 없으면 죽빵을 갈길 수도 있어. 사이가 나쁜 형제라면 죽도록 싸울 수도 있지. 하지만 그래도 형제는 결국 형제야. 아무리 재수 없어도 그 자식 죽빵을 칠 수 있는 건 너뿐이라고. 이름도 모르는 자식이 그 녀석을 두들겨 팬다? 그러면 넌 주먹을 쥐고 그 개자식한테 달려들어야 해. 그 개자식 편을 들 수는 없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맥스 슈피겐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단순한 녀석이다. 루카스 버튼 역시 뭐라 변명하지 못했다.

“너희들과 미셸의 사이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어. 난 그래도 그걸 사이가 좋지 않은 형제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맥스. 넌 이번에 분명 선을 넘었어. 그게 실수건 뭐건, 가족의 허물을 바깥에 그런 식으로 알리다니. 심지어 이건 미셸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일이었어.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대체 누가 팀원을 신뢰할 수 있을까? 안 그래?”

맥스 슈피겐이 고개를 푹 숙였다. 루카스 버튼이 성민에게 말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 매우 짧았지.”

“맥스, 지금 당장 미셸에게 가서 일단 사과를 하도록 하자.”

그리고 바로 지금.

“아니, 사과는 할 필요 없어. 어차피 받아 줄 생각이 없으니까. 너희들 덕분에 이미 내 상황은 충분히 좆됐거든.”

문밖에서 성민의 큰 소리를 듣고 있던 미셸 에쉬만. 그리고 보스턴의 다른 선수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 팀 동료(6)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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