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팀 동료(5) >
경기가 끝난 시간은 한국 시간으로 오후 12시 30분 경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커피 한 잔을 하면서 인터넷에 댓글을 달기 딱 좋은 시간이다.
처음에는 국뽕의 광풍이 몰아쳤다.
-맙소사. 니들 인터뷰 봄?-
-인터뷰? 무슨 인터뷰?-
-메튜 쿠퍼의 수훈선수 인터뷰.-
-경기 끝나고 바로 무슨 토크쇼 하던데? 그건 어디서 봄?-
-MLB.com 가면 있음. 성민이 수훈 선수 인터뷰면 했을 텐데, 아마 다른 선수라서 바로 돌린 듯. 설마 수훈선수 인터뷰에서 성민에게 이야기 할 줄은 몰랐겠지.-
-나 지금 보고 왔음. 대충 번역기로 돌렸는데도 국뽕이 막 차오르더라. 성민이가 진짜 난 놈은 난 놈인 듯. KBO에서나 베테랑이지 거기서는 그냥 메이저 2년 차 선수일 뿐인데, 벌써 클럽하우스 꽉 잡은 느낌이야.-
-메이저도 외국리그 짬밥 어느 정도 인정은 해준다고 하더라.-
-보스턴이면 작년에 메이저 짬밥도 인정 안 해줘서 개판 났던 팀인데. 짬밥 인정은 무슨. 이건 짬밥 문제가 아니라 그냥 성민이가 대단한 거.-
-근데 성민이가 말했다는 그 유격수······. 설마 박동엽이냐?-
-[2034시즌 박동엽 예능 수비 하이라이트.gif] 설마. 박동엽이면 이번 시즌 이제 15경기 했는데 예능 수비 하이라이트가 벌써 3분 분량인걸.-
-한국 시절에도 성민이가 동엽이를 이상하게 아끼기는 했음.-
-선배가 후배 아끼는 게 뭐 어때서-
-마린스는 부산 쪽 고등학교 출신이랑 비부산 출신이랑 차별 좀 심함. 그리고 성민이는 완전 성골이고 동엽이는 6두품임.-
-박동엽이 6두품? 완전 감독 양아들인데?-
-이런 말 나오는 것 자체가 6두품이라는 증거. 솔직히 박동엽만한 유격수가 또 어딨음. 걔 작년 골글임.-
-[2033시즌 박동엽 예능 수비 하이라이트.avi] 15분짜리 풀영상이나 보고 이야기하자.-
-아니, 근데 박동엽이고 뭐고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성민이가 보스턴에서 완전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는 거 아님?-
-걘 원래 한국 시절부터 핵인싸였음.-
그리고 약 5시간이 흘렀다.
토론토 시간으로는 새벽 3시 30분.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 4시 30분.
퇴근까지 남은 1시간 30분의 시간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월급 루팡해야 할지 고민하는 바로 그 시간.
피터 스테빙슨이 일을 터트렸다. 미국과 캐나다의 사람들은 이미 잠든 시간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하나 된 지구촌에서 해쉬태그의 힘은 굉장했다.
[특정 선수에 대한 선수단의 불만!! 삐걱거리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클럽하우스!! 시합 전날 술과 여자를?]
-이거 뭐야?-
-SNS 해쉬 태그에 김성민 있어서 들어가 봤는데 대박임. 기사에는 정확히 김성민이라고 안 하고 있기는 한데, 기사에 묘사되는 사람에 부합하는 게 성민이 밖에 없음. 그래서 현지 사람들도 성민이라고 확신하는 듯.-
-뭐야? 성민이 토론토에서 여자 만나고 다녀? 얘 지금 무슨 헐리웃 배우랑 썸 타는 중 아님?-
-어, 조이 제임슨이랑 썸타는 중이라고 소문이 자자한데. 이게 무슨 일이래?-
-메이저리거들 원래 현지처 유명하잖아. 뭘 새삼스럽게.-
-성민이는 토론토 이번이 처음일 텐데 현지처는 무슨 현지처야. 근데 기사 내가 읽어보니까 성민이 이야기가 아닌데? 그냥 성민이는 같이 밥 먹으러 나갔고, 그 밥 먹은 애가 술 마시고 여자 만나느라 헤롱하고 다음 날 경기 망쳤다는 기사잖아.-
-상식적으로 같이 나간 사람이 그렇게 놀았는데 성민이는 뭐 그거 보고만 있었겠냐?-
-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다음 날 등판도 아니었고, 사생활인데 존중해줘야지. 게다가 썸타는 여자가 있을 뿐이지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경기를 망쳤으면 문제겠지만 자기 등판일 전날도 아니었고, 컨디션 관리 잘해서 자기 경기는 잘했는데 뭐가 문제임.-
-아니, 그러니까 성민이는 애초에 여자 만났다는 이야기가 기사에 없다니까 그러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걔 한국에서도 술 마시고, 난봉질 하는 거로 유명했잖아.-
-신인 시절에도 잘 나가다가 몇 번 저러고 훅 갔었는데. 성민아 제발 정신 차리고 야구만 하자. 너 후년에 또 FA잖아.-
-난 일단 중립 기어 쎄게 박는다. 기레기가 또 기레기 한 걸 수도 있음. 미국도 기레기들 천지드만.-
-근데 저긴 미국 아니라 캐나다인데?-
딥러닝으로 발달한 번역기가 언어의 장벽을 크게 무너트린 세상이다.
이미 SNS에서 지구는 하나였다.
자고 일어난 사람들이 수십만 개 단위로 올라온 SNS에 관심을 기울였다. 캐나다에서 시작한 기사가 한국을 거쳐 다시 캐나다와 미국으로 확대된 것이다.
다만 한국에서의 반응이 성민이의 그것에 국한되어 있었다면, 현지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이 망할 새끼들이? 작년에 그 지랄로 부족했다 이거야?”
“아니, 간만에 한 경기 기분 좋게 이겼는데, 그 기분을 또 이렇게 망친다고?”
그것이 안티이건, 혹은 진짜 팬이건 간에 한국의 팬 대부분이 보스턴의 팬이라기보다 김성민 개인의 팬이라면, 현지에는 아직 김성민 개인의 팬보다는 보스턴의 팬 쪽이 더 많았다.
“야, 니들 그거 봤어?”
“뭐?”
“아니, 그 조이 썸남 있잖아.”
“그 친구가 왜?”
“지금 SNS 난리 났어. 그 친구 무슨 여자 만나고 다닌다고.”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몇 번이나 말했잖아. 조이가 이런 녀석이랑 사귈 리가 없다고.”
“아냐, 내 사촌이 라이프 오브 헐리웃 스태프인데 이번에 분명 촬영장에서 그 녀석을 봤다고 했어. 조이랑 꽤 다정해 보였다고 하던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민은 SNS에서 아직 야구 선수 김성민이라는 타이틀보다 조이 제임슨의 썸남이라는 타이틀로 더 유명했다.
보스턴의 팬들, 라이프 오브 헐리웃의 팬들. 그리고 그냥 가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건에 대하여 한마디씩을 내뱉을 때마다 막대한 트래픽이 쌓였다.
***
야구 선수에게는 너무 이른 아침.
“성민!! 성민!! 큰일입니다.”
미친 듯이 진동하는 전화를 받아 든 성민에게 그의 SNS 관리인인 토니 이시카와가 사색이 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슨 일인데?”
“지금 SNS 쪽에 난리도 아니에요. 저희 쪽에서도 뭔가 공식적으로 내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에이전시랑 구단이랑 이야기해서 기사 자체도 얼른 내려야 할 것 같고요.”
“기사?”
“제가 지금 링크 보내드릴 테니까 일단 확인해보세요.”
필 니크로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사실 기사에 내용 자체는 별 거 아니었다. 실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 행간에 잠재된 악랄한 의도가 너무 확실하게 읽혔다.
술과 여자 때문에 부진했던 베테랑 선수 A. 그와 함께 나갔던 올해 영입한 거물급 선수이자 헐리웃의 유명 여배우와 염문설이 도는 B. 그리고 A의 태도에 분노한 선수 C.
분명 기사에서 중심이 되는 주제는 맥스 슈피겐의 불평과 술과 여자로 밤늦게까지 노느라 다음 날 컨디션이 엉망이었던 미셸 에쉬만이었다.
하지만 그 묘한 논조.
그와 함께 나갔던 거물급 투수 B를 강조하는 그 논조가, 마치 도매급으로 함께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난 것처럼 느껴지는 그 기사의 논조는 분명히 성민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런 망할 자식이? 성민아. 이건 이대로 둬선 안 된다. 당장 에이전시에 연락해서 기사 내리도록 요청하고, 구단이랑 협의해서 분명하게 이야기를 해야 해. 그리고 그 토니인지 뭔지 하는 녀석한테도 일 좀 하라고 하고
성민이 책상을 톡톡 두들기며 기사를 곱씹었다.
-뭐해? 지금 이 순간에도 이거 계속 퍼지고 있어. 성민아 너도 잘 알겠지만, 언론을 절대 우습게 보면 안 된다. 테드 윌리엄스가 조 디마지오에게 뺏긴 MVP가 몇 개더냐. 기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무서운 힘이 있어.
여전힘 묵묵부답인 성민.
필 니크로가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지금 넌 더 위험해. 연예인들과 얽힌 야구 선수가 어떤 식으로 망가질 수 있는지 나는 잘 안다. 네가 하려던 일은 애초에 양날의 검 같은 짓이었어. 넌 미국문화를 섹스앤더시티로 배워서 미국이 아주 개방적이고, 미국인들이 그런 것을 쿨하다고 생각한다고 착각하지만 절대 아니다. 미국은 네 생각보다 훨씬 보수적이야. 문란한 사람을 결코 좋아하지 않아.
필 니크로의 열변 덕분일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성민이 마침내 스마트폰의 번호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아니, 잠깐만. 성민아?
하지만 성민이 전화를 건 곳은 필 니크로가 생각했던 곳과는 조금 다른 곳이었다. 게다가 전화의 내용은 아예 완전히 방향이 달랐다.
“조이?”
“성민!! 안 그래도 나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야? 그리고 어떻게 할 생각이고? 내 에이전시에서는 두 가지 방향 정도 생각하고 있던데 그래도 사실관계를 알아야 뭘 선택하든지 말든지 하지.”
“아직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소리네? 다행이다.”
“당연하지. 괜히 섣불리 움직였다가 서로 움직임 틀어지면 그게 무슨 개쪽이야. 그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별것 아니야. 같이 나가서 밥 먹은 것까진 맞는데 여자 만나서 술 마시자고 권하길래 난 혼자 먼저 들어왔어.”
“본 사람은? 바로 호텔로 돌아온 거야?”
“어, 10시였는데 당연히 많지. 호텔 CCTV에도 명확하게 찍혔고. 호텔 로비에서 에두아르도랑 다른 선수들도 만났었어.”
“잘됐다. 그러면 바로 기사 내리라고 하고 반박 기사 내놓자. 캐나다도 변호사 비용 제법 비싸다더라. 어차피 세금으로 나갈 돈 변호사한테나 쓰지 뭐. 그 자식 그 기사로 벌어들인 돈 다 토해내게 만들어야지.”
조이의 전투적인 이야기에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조이,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뭔데?”
“내가 좀 생각을 해 봤는데, 지금 이 상황 어떻게 보면 좋은 상황 아니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이 상황이 좋은 상황이라니? 네가 뭘 잘 모르나 본데 일단 이미지가 이렇게 박혀버리면 빼도 박도 못한다고.”
“에이, 그거야 나도 잘 알지. 그런데 잘 들어봐. 어차피 내가 안 그런 건 너무 명확하게 증거가 있어.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둬도 만약 후속 기사가 나온다면 무조건 밝혀질 수밖에 없는 사실이지. 게다가 너도 알잖아.”
“뭘?”
“일부러 작정하고 화제를 만들려고 해도 이렇게까지 띄울 수 없다는 거 말이야. 솔직히 고작 이 정도 일이 이렇게까지 화제가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어. 알잖아. 이 바닥에서 제일 나쁜 건 욕이 퍼지는 게 아니라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이라는 거. 게다가 지금 이 일은 딱히 욕이 될만한 일도 아니야. 물론 나중에 사실이 밝혀져도 못 믿는 애들은 있겠지. 하지만 그런 놈들은 내가 나중에 뭘 해도 어차피 싫어할 놈들이야. 안 그래?”
“그건 그렇지.”
조이 제임슨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게. 그러니까 이건 굳이 해명이고 어쩌고 하지 말고 그냥 잠깐만 내버려 두자. 어차피 이 정도 화제성이면 내버려 둬도 진짜 제대로 된 언론에서 현장 취재 나올 이야기야. 게다가 거기다가 괜히 해명 인터뷰 더해봤자 그 현장 취재의 신뢰가 떨어질걸?”
“그런가?”
성민의 이야기에 필 니크로가 새삼 감탄했다.
역시 괴물은 괴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상황을 수습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생각하다니.
조이에게 잠깐 사탕발린 말을 해준 성민이 전화를 끊었다.
“자, 그러면 일단 제일 쉬운 일은 해결했으니, 이제 좀 번거로운 일을 해결해보죠.”
< 팀 동료(5)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