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팀 동료(2) >
맥스 슈피겐은 지난 두 번의 등판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
12.1이닝 4.38.
훌륭하다.
퀄리티 스타트라는 말이 있다.
6이닝 3실점.
사실 작년 리그 평균자책점이 4.47.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로 봐도 4.69인 상황에서 그리 대단한 성적은 아니다.
게다가 나온 지 워낙 오래된 말이고 이제는 사실 기록이라고 신경을 써 주는 사람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분명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기록이다.
그것은 선발 투수가 경기의 2/3를 책임지고, 최소한 승리에 도전할만한 점수 상황을 만들어놨다는 뜻이다.
그것은 ‘좋은’ 선발의 조건이라기보다는 선발로서 ‘최소한’의 할 일은 다 했다는 느낌이다.
이번 시즌, 맥스 슈피겐의 역할은 4선발 투수다. 그 ‘최소한’의 일만 다 해준다고 해도 감지덕지다.
토론토와의 1차전.
-딱!!
맥스 슈피겐의 손가락이 좌측 담장을 가리켰다.
미셸 에쉬만이 빠르게 움직였다.
전성기의 미셸 에쉬만은 리그 최고 수준의 수비를 보여주는 좌익수였다. 탁월한 판단력과 빠른 발. 좌익수치고는 약하지 않은 어깨까지. 실제로 오직 수비만으로 평가받는 골드글러브를 2회나 탔고 필딩 바이블 어워드 좌익수 부문도 한 차례 수상했다.
비록 공격력에 조금 문제가 있긴 했지만, 1억 2천만 달러에 육박하는 그의 커리어 총 급여가 그의 수비실력을 증명했다.
그리고 35세인 지금.
그 빠르던 발은 조금 무뎌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경쟁력 있는 좌익수였다.
타구판단능력.
동체시력? 공간감각능력? 아니, 어쩌면 그 두 가지 모두일 수도 있다.
미셸 에쉬만의 타구판단능력은 리그 전체를 통틀어 최고 수준이었다.
[좌익수 방면 빠른 타구!! 미셸 에쉬만!!]
하지만 오늘 경기
미셸 에쉬만의 글러브가 공을 잡아내지 못했다.
‘젠장.’
사실 작년이라고 해서 딱히 여자를 만나고, 술을 마시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패턴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바뀐 것은 그의 늙어버린 몸이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컨디션이 조금 안 좋더라도 괜찮았다. 타구판단이 조금 부족해져도 쩔어주는 다리가 그것을 해결했으니까.
하지만 전성기의 빠른 발을 잃어버린 지금.
칼날 같은 판단이 조금 무뎌진 순간, 미셸 에쉬만은 리그 평균 미만의 어설픈 좌익수일 뿐이었다.
“시발!!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마운드의 맥스 슈피겐이 열을 냈다. 미셸 에쉬만 역시 그 장면을 똑똑히 지켜봤다. 슬쩍 미안하다는 제스쳐를 보냈지만 맥스 슈피겐의 열은 쉽게 식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그렇다.
잘못한 일이라도 사과를 거듭하다 보면 이게 이 정도로 해야 할 일인가 오히려 화가 난다. 미셸 에쉬만의 경우는 그게 조금 더 심했다.
‘저 새끼가?’
내야에 애송이들은 미셸 에쉬만 본인보다 더한 실수를 매일 저지른다. 고작 수비 실수 한 번, 아니 솔직히 말해 이 정도면 실수라고 할 수도 없다. 컨디션에 따라서는 못 잡을 수도 있는 공이다. 헌데 고작 그런 걸로 저렇게까지 짜증을 내다니.
마운드에선 맥스 슈피겐의 머릿속에 어제의 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함께 저녁을 먹겠다고 나간 두 사람.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한 사람.
먼저 돌아온 성민과 대화를 나누던 에두아르도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고 미셸 에쉬만이 호텔로 돌아온 시간은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망할 영감탱이.’
항상 선수라면 어째야 한다, 저째야 한다. 쓸데없는 잔소리만 늘어놓는 인간이 정작 선수로서 지켜야 할 기본조차 지키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주제에 지금 자신을 보는 시선은 여전히 재수가 없다. 사람이 염치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저 영감은 정도라는 것도 모른다.
경기가 계속됐다.
***
토론토의 지역 연예 신문 TAN의 기자 피터 스테빙스는 요즘 기자들이 다 그렇듯 현장을 돌아다니기보다 SNS를 탐구하는 남자였다.
“얜 뭐 이제 뉴스거리도 안 되고. 얜 한물 갔지. 얜 또 뭐야? 아론은 어제 그 시간에 LA에 있었는데 어디서 닮지도 않은 애한테 속아서는. 어휴 하여간 요즘 SNS를 보면 아주 머리가 텅텅 빈 것들 투성이라니까.”
나가서 움직일 생각은 조금도 없는 주제에 요즘 영 기사거리가 없음을 한탄하던 그의 눈에 무언가 특별한 사진 하나가 들어왔다.
“응? 이 친구는?”
누군가 그를 알아보고 찍은 사진은 아니었다.
사진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밥이다. 그 사진에서 그는 그저 주변인이었다.
“김성민. 김성민 맞는 것 같은데? 어디 보자. 맞네. 보스턴이 지금 토론토로 원정을 와 있네.”
조금 흐릿했지만, 그 정도로 커다란 덩치에 훤칠한 얼굴을 한 동양인은 흔치 않았다. 무엇보다 피터 스테빙스는 그의 옆에 있는 남자를 잘 알고 있었다.
미셸 에쉬만.
사생활이 난잡하기로 유명한 선수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유명했더라면 여기저기 빵빵 터졌을 만한 인물이다. 그의 난잡한 사생활이 널리 퍼지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들여 기사를 써봤자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가성비의 문제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성민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물론 야구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최근 SNS에서 김성민은 유명한 것으로 더 유명한 남자였다. 각종 유명인들이 해시태그로 그의 이름을 걸어주었고, 꽤 많은 유명인이 그의 경기를 찾았다.
특히 조이 제임슨과의 열애 의혹은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인기 시트콤인 라이프 오브 헐리웃에 등장했다는 소문으로 그 의혹에 한층 더 불을 붙은 상황이었다.
“이건 좀 파볼 가치가 있겠어.”
운동선수의 성욕이야 올림픽의 콘돔이라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국을 떠도는 스포츠 선수들이 각 지역마다 몇 명의 애인을 만드는 것은 그리 대단한 비밀도 아니었다.
도덕성의 문제는 없다. 애초에 그런 것을 걸고 넘어질 생각도 아니었다. 단지 조이 제임슨과의 열애설이 떠도는 남자가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기사를 올린다면 얼마나 많은 클릭을 가져올 수 있을지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하지.”
내용 없는 기사로 클릭 수를 벌어 오는 것이 일상이라고 해도 음식 사진 옆에 흐릿하게 찍힌 사진으로 그런 턱도 없는 의혹 기사를 써 갈기는 건 명예훼손으로 단단히 걸린다. 그리고 애초에 의혹 기사는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사실과 사실과 사실과 어쩌면 사실일지 모르는 것과 사실과 사실과 사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알아서 상상하게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재료가 필요했다.
“이거 오래간만에 필드를 좀 뛰어봐야겠네.”
피터 스테빙스가 먼지 쌓인 장비를 챙겨 들었다.
***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미셸 에쉬만이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그를 바라보는 맥스 슈피겐의 눈빛이 사나웠다.
사실 타석에서 미셸 에쉬만은 원래 이런 남자였다. 전성기에도 그는 3할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골드글러브급 좌익수가 타격까지 좋으면 저니맨이 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안 들면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법이다. 술이나 처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다음 날 멍청한 플레이를 한다는 인상이 눈에 박히자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미워 보였다.
‘들이박을까?’
맥스 슈피겐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차라리 매튜나 랄로 같은 녀석들이었다면 지랄 한 번 시원하게 하고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친하지 않은 어려운 상대라는 생각이 그를 막았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한 마음은 앙금으로 남는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결국 경기다. 결과만 좋다면 대부분 앙금은 사라지고 좋은 결과만 기억에 남는다.
다만 그렇다는 것은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1차전.
보스턴 레드삭스가 11:3으로 크게 패배했다.
그야말로 대패였다
안 그래도 짜증이 나는데 결과마저 엉망이다. 맥스 슈피겐의 열이 크게 치솟았다. 하지만 11:3의 결과는 누구 한 사람이 잘못해서 나올 수 없는 결과였다. 가장 짜증이 나는 대상은 미셸 에쉬만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만 뭔가 탁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분노를 속으로 삼키는 것뿐이었다.
그래, 본래의 맥스 슈피겐이었다면 딱 거기서 끝났을지도 몰랐다.
***
“TAN의 기자 피터 스테빙슨입니다. 이렇게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맥스 슈피겐이 메이저리거라고 하지만 기껏해야 3년 차의 애송이다. 무엇보다 항상 꼴찌를 다투는 팀이었고 특출난 커리어를 기록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유망주 시절에는 여기저기서 인터뷰를 했지만, 지금은 750명의 25인 로스터 1,200명의 40인 로스터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것도 하위권의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하나.
국경 너머의 기자가 보낸 인터뷰 요청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TAN은 타블로이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종이 잡지까지 내놓는 잡지사다.
1인 미디어니 뭐니 하룻밤 지나면 폐간하는 자칭 언론이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 TAN 정도면 양반이다.
처음에는 그저 맥스 슈피겐에 관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제법?’
피터 스테빙슨의 질문에는 맥스 슈피겐에 대해 아주 제대로 조사를 해온 티가 났다. 게다가 그 질문 자체가 맥스 슈피겐의 기분을 아주 좋게 만들어주는 질문들 위주였다.
예컨대
“고등학교 시절 5이닝 퍼펙트를 기록하셨던 적이 있잖습니까. 상대가 캘리포니아 랑겔이었죠?”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네요. 맞습니다. 당시 캘리포니아 랑겔도 자기 지역의 우승팀이었는데 제가 5이닝을 퍼펙트로 막아내면서 콜드게임으로 경기를 박살 냈죠. 하지만 사실 좀 아쉬웠습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만약 그때 팀이 점수를 내지 못 했더라면 콜드게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아예 퍼펙트 게임을 기록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오, 정확히 맞췄어요.”
“당시 맥스 슈피겐 선수의 커브는 정말 대단했죠. 이미 고등학생 수준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단순히 프로 시절을 넘어 아마추어 시절까지.
맥스 슈피겐은 그의 가장 영광스러웠던 기억을 언급하는 이 남자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이 남자는 좋은 사람이었다.
‘멍청이로군.’
운동선수가 멍청하다는 것은 편견이다.
실제로 미국의 엘리트 체육인들은 학업에도 놀라운 성취를 거두는 경우가 빈번했다. 하지만 대학을 아예 가지 못하고 바로 프로 생활을 시작한 선수 가운데는 지능과 별개로 사회생활 자체를 제대로 못 하는 인간들이 많았다.
그것을 구분하는 법은 간단하다. 굳이 지금 말할 필요 없는, 기사로 쓸 필요도 없는 영광스러웠던 과거 이야기를 꺼냈을 때 반응을 보는 것이다.
‘이 인간이 뭔가 원하는 것이 있나?’ 하며 경계하는 녀석들은 만만치 않은 놈이다.
‘역시 나를 모를 리가 없지.’ 하고 헤실거리는 놈은 보통 멍청한 놈이다.
피터 스테빙슨이 판단하건데 이 애송이는 명백하게 후자였다.
몇 번의 살살거리는 칭찬.
그리고 마침내 피터 스테빙슨이 오늘 이 애송이를 만난 목적을 꺼내기 시작했다.
< 팀 동료(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