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66화 (167/287)

< 팀 동료(1) >

“성민아 괜찮지?”

“어? 뭐가?”

“아니, 몸이 영 여위어서. 그래도 시즌 초에는 좀 살이 더 통통하게 올랐었는데 지금 볼도 핼쑥한 것이 뭐 몸에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지?”

권 여사의 걱정 어린 이야기에 성민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몸이 앙상하기는. 오히려 엄청 좋아진 거야. 몸무게는 오히려 더 쪘어. 오늘 아침에 쟀을 때 나 96kg이더라. 이것도 어제 등판해서 좀 빠진 몸무게야.”

“96kg? 너 원래 비시즌에도 그렇게까진 안 나갔었잖아.”

“어, 한국 있을 때보다 식단부터 해서 훨씬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어서 그래. 체지방은 15% 정도로 유지하면서 근육량을 늘렸거든. 그래서 보이는 것보다 무게는 더 나가지.”

“아니, 넌 원래 살이 찌는 체질도 아닌데 게다가 무슨 야구 선수가 식단 관리까지 하고 그런다니?”

“엄마, 나 이제 메이저리거잖아. 한국 있던 시절이랑은 다르지.”

“그래도 먹는 거 조절하면 스트레스가 여간 심한게 아닐텐데. 괜찮아?”

“이것도 적응되니까 그럭저럭 참을만해. 그러니까 이제 음식 진짜 보내지 말아요. 동료들한테 가끔 대접하기는 하는데 그렇게 처리하기에도 너무 많아. 게다가 김치 같은 건 먹는 애들도 드물다고.”

뉴욕에서 양키스와의 사흘. 그리고 이어지는 보스턴의 일정은 토론토 원정이었다.

“정말 괜찮지?”

사실 굳이 따라오려면 따라올 수는 있었다. 국경을 넘는 일이기는 했지만, 애초에 경기 일정은 나와 있었고 캐나다는 무비자 여행국이다. 미리 전자여행 허가신청만 해두면 별다른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

하지만 성민은 눈치가 있는 아들이었다. 엄마의 데이트를 방해할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비싼 돈을 들여 엄마의 데이트를 위한 선물까지 마련했다.

“어휴, 괜찮다니까. 내가 뭐 세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엄마 아들 이제 한국 나이로는 서른셋이야. 관광 잘하고 내가 엄마 좋아하는 뮤지컬 표도 좋은 자리 구해놨으니까 그것도 꼭 보고. 뉴욕까지 왔는데 해밀턴은 보고 가야지.”

“하여간, 엄마가 아들 하나는 잘 뒀다니까. 덕분에 이렇게 말년에 호강을 하네.”

“호강은 무슨. 그 호강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하셨으니까 미국이나 자주 놀러 오세요.”

성민과 권 여사가 웃으며 헤어졌다.

***

그루피라는 것이 있다.

시작은 락그룹을 쫓아다니는 열정적인 여성팬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그루피라는 말은 단순히 락그룹만이 아니라 유명인들과 성관계를 목적으로 하는 여성팬 정도로 바뀌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역시 그루피들은 존재했다.

“성민, 저녁 어때?”

“저녁? 어디 근사한 곳 알고 있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메이저에서 뛴 기간이 몇 년인데. 먹고 싶은 메뉴 말만 하라고. 제일 괜찮은 곳으로 안내할 테니까.”

토론토로 가는 비행기.

미셸 에쉬만이 성민에게 저녁 식사를 권해왔다.

그는 현재 팀에서 가장 겉도는 선수였다. 올해 35세로 팀의 최연장자였으며 12년 커리어 동안 무려 일곱 개의 팀을 떠돈 저니맨이었다.

“요즘 식단을 좀 조절하고 있는데, 단백질 위주로 담백한 식사였으면 좋겠어.”

“오케이. 뭐 어렵지 않은 조건이네. 그러면 이따 도착해서 8시에 호텔 앞에서 보자고.”

필 니크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친구 다른 사람이랑 잘 안 어울리려던 친구 아니었나?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뻔하죠. 이제 제가 유일하게 같은 편이라고 생각되니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제 유일하게 같은 편?

***

미셸 에쉬만이 테이블에 맥주잔을 쾅 내려놓으며 울분을 토해냈다.

“너도 알다시피 이 팀은 아주 엉망진창이야. 아무리 탱킹이니 뭐니 해도 팀에 중심이 되는 베테랑이 하나는 있어야 하는 건 기본이잖아. 그런 것도 없이 무작정 선수들 물갈이만 계속 시켰으니 뭐가 남아나겠어. 안 그래?”

“뭐, 그건 그렇지. 아무래도 팀 스피릿이라는 건 그냥 이름만 붙여둔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감독이나 코치가 만들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팀의 선배에서 후배로 끈끈하게 이어져야 하는 부분이니까.”

“그러니까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물론 작년에 그 친구들도 조금 과한 부분은 있었지. 하지만 원인을 살펴보면 그 애송이들이 먼저 머저리 짓을 했단 말이지. 그런데 결과를 좀 보라고. 원인 제공자들은 다 남아있고 그 친구들만 싹 갈려나갔어.”

“에이, 그건 미셸 너도 알다시피 저 녀석들은 어디 사갈 애들이 없어서잖아. 원래 어디 팔리는 것도 완전히 무능하면 답이 없는 거라고.”

“그래, 좋아. 뭐 그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녀석들 좀 보라고. 지들이 마치 피해자였던 양 구는 꼴이 아주 가관이야. 에두아르도 그 녀석은 이제 알만한 녀석이 그런 녀석들 부추기기나 하고 말이지.”

성민이 미셸 에쉬만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내가 뭐 이제 와서 나간 녀석들을 옹호하려는 것도 아니고, 뭔가 개인적인 이득을 원하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좀 야구다운 야구를 해서 성적은 내야 할 것 아니냐고. 그러려면 팀의 위계가 잡히고 착착착 굴러가는 맛이 있어야 하는 건데. 휴, 정말 답답하군.”

“맞아. 확실히 팀이 효율적으로 돌아가려면 선, 후배가 각자 적절한 역할을 해야지.”

“그래, 바로 그거지. 그런 의미에서 지난 경기에서 네가 보여준 모습은 참 좋았어. 후배가 잘못하고 있으면 따끔하게 이야기 해줘야지. 뭐, 이 망할 팀에선 그렇게 해줘도 딱히 제대로 알아듣는 녀석이 드물긴 하지만 말이야.”

필 니크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녀석, 뭔가 좀 이상한데? 분명 맞는 말 같은데 또 틀린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지.

‘당연하죠. 애초에 듣기엔 그럴싸한 이야기지만 결국 속내는 자기 짬대우 받고 싶다는 이야기잖아요.’

-응?

‘야구다운 야구를 해서 성적을 내는거랑 팀의 위계가 잡히는 게 무슨 상관입니까? 뭐 솔선수범 하는 베테랑이 앞장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그걸 멘토 삼아서 모두가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가 잡히는 건 좋죠. 근데 저 친구가 원하는 건 지는 아무것도 안 해도 애들이 알아서 대우 해주는 그런 거잖아요.’

-확실히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이야기 같기도 하고······.

성민이 미셸 에쉬만의 이야기에 답해주었다.

“시즌이 흐르다 보면 녀석들도 베테랑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올 거야. 초반이야 뭐 혈기로 바짝 치고 나갈 수 있을지 몰라도. 알잖아? 6월 7월 되면 다 나가떨어지는 거.”

“솔직히 지금 같아서는 녀석들에게 어떤 조언도 해주고 싶지 않아.”

“당연해. 조언을 간절히 원해도 이야기 해줄까 말까인데, 굳이 해줘봤자 고마움도 느끼지 못하는 놈들에게 해줄 필요는 없지.”

“크, 그래. 바로 그거야. 성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넌 나랑 성향이 좀 맞는 것 같아.”

성민의 이야기에 기분이 좋아진 미셸 에쉬만이 시원하게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성민아, 지금 이 말 설마 그냥 닥치고 있으라는 말이냐?

‘설마는 무슨 설마입니까. 그냥 대놓고 애들한테 개소리하지 말고 닥치고 있으라는 거죠.’

그래도 내가 이 정도는 이제 해석을 하는구나.

필 니크로가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좋았어!! 오늘 아주 오래간만에 기분이 좋군. 그래서 말인데······.”

맥주잔을 내려놓은 미셸 에쉬만이 주변을 힐끔 살피고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 오늘은 조금 더 놀까?”

“응? 벌써 10시도 넘었는데 이제 슬슬 호텔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 나야 괜찮지만, 미셸 넌 내일도 선발 출장이잖아.”

“에이, 야구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경기 하는 날에는 항상 새벽 2시 정도에 잠들잖아. 이 시간이면 초저녁이지.”

“그래도 맥주를 석 잔이나 마셨는데 오늘은 그만하는 게 좋지 않겠어?”

“맥주가 무슨 술이라고. 게다가 내가 또 토론토 쪽에는 잘 지내는 친구가 하나 있거든. 어차피 걔 만날 생각이었는데 관심 있으면 친구 하나 데리고 나오라고 할게.”

사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야구 선수는 1년 중 거의 절반을 떠돌아 다녀야 한다. 실제로 몇 개의 주에 여러 여자를 만나는 선수 역시 드물지 않다.

-저, 저. 망할 놈이? 성민아. 이 녀석 영 질이 안 좋은 놈이구나.

‘에이, 뭘 그렇게까지 그러십니까. 다저스 있을 때 에드도 몇 있었잖아요.’

-그거야 에드 맥밀란은 미혼이었으니까!! 이 녀석은 바로 작년에 결혼했고!!

그리고 그중에는 유부남 역시 적지 않다. 실제로 통계적으로 메이저리거가 바람을 피는 비율은 미국 평균의 2배가 넘는다.

‘뭐, 그야 그렇지만. 애초에 여기 미국이잖습니까. 다들 좀 프리 하잖아요.’

-성민아 거듭 이야기 하지만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이 미국의 평균은 절대 아니다. 하여간 괜히 저런 놈이랑 어울리지 말고 여긴 이만 일어나는 게 좋겠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사실 성민 역시 딱히 금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육체적인 행위가 마음으로 꼭 이어지리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했고, 쿨한 만남 역시 즐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뒤탈이 없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바람을 피는 유부남. 그 유부남과 놀아나는 그루피. 그리고 그 친구.

그야말로 최악의 조합이다.

“권유는 고맙지만 지금은 좀 곤란하네.”

“왜? 뭐 때문에?”

미셸 에쉬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흔한 유형의 인간이다. 자신의 호의가 거절당했다고 생각하면 앙심을 품는 소인배.

성민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나 지금은 만나는 여자가 있어서 말이야.”

“만나는 여자? 진지한 관계야?”

“아직은. 하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지.”

“어차피 아무도 모를 텐데.”

“그야 당연하지. 애송이도 아니고 그런 부분을 신경 안 쓸라고. 뭐 우리 팀의 머저리들이라면 동료의 일을 여기저기 떠벌릴지도 모르지만, 알잖아. 진짜 동료는 어떻게 하는지를.”

“흐흐, 역시 성민 너라면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어. 하여간 이 놈의 팀은 이런 당연한 일도 지켜질지 아닐지 조마조마하게 굴어야 한다니까. 아주 피곤해 죽겠어.”

“그래, 그 피곤 잘 처리하고. 내일 경기장에서 보자고.”

***

“성민, 일찍 들어왔네?”

“뭐야? 날 기다린거야?”

“그냥. 미셸이랑 나갔다고 그래서.”

에두아르도의 의미심장한 이야기에 성민이 가볍게 답했다.

“그냥 가볍게 밥만 먹고 왔어.”

“미셸은?”

“토론토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

에두아르도의 얼굴이 조금 딱딱해졌다.

지금 성민이 말한 그 ‘아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대충 짐작한 까닭이었다. 사실 여자를 만나는 건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라면 녀석이 유부남이라는 사실 뿐이다.

성민이 에두아르도의 어깨를 툭 두들겼다.

“신경 쓰지 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잖아.”

“애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야. 우리 프로잖아. 직장 동료가 마음에 안 든다고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넌 그냥 애들이나 물들지 않게 신경 써 줘.”

에두아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토론토와의 1차전.

마운드에 맥스 슈피겐이 올라왔다.

< 팀 동료(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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