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65화 (166/287)

< 3할(6) >

루시 알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본래 사람은 타인의 이야기에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 애초에 토론이라는 것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상대방을 승복시키는 것이 아닌 청중을 설득하는 것이라는 점이 그것을 증명한다. 다른 사람의 말에 자신의 결점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물론 성민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토론의 목적은 주변을 감화시키는 것이다.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미 성민의 이야기를 들은 팀원들과 코치진이 성민을 인정했다. 녀석이 성민의 말을 듣고 조금 더 과감하게 된다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대로 녀석의 팔자인 셈이다.

-하긴,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완전히 동엽화 되는 건 좀 그렇지만, 녀석은 조금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긴 하지.

‘에이, 마이너를 기준으로 하면 완전히 동엽이처럼 과감한 것도 괜찮죠. 기량을 키우려면 좀 과감한 짓을 계속 해보는 게 좋잖습니까. 저 녀석처럼요.’

성민의 시선이 그라운드로 향했다.

ㅁ   -딱!!

높게 뜬 타구가 외야로 솟구쳤다. 양키스의 중견수 찰스 워드가 달렸다. 타구 판단이 완벽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탄력적인 몸에서 나오는 걸음걸음이 시원했다.

[이루수 키를 크게 넘기는 빠르고 강한 타구!! 중견수 찰스 워드!!]

하지만 부족하다.

두 걸음? 찰스 워드가 과감하게 몸을 날렸다.

-글쎄다. 저 꼴을 보고도?

하지만 부족했다. 움직임은 생각 이상으로 빨랐지만, 애초에 출발이 늦은 탓이다. 아니, 어떻게 생각해보자면 걸음이 너무 빨랐던 탓에 가능성이 있다고 착각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찰스 워드!! 몸을 날려 보지만 살짝 부족합니다.]

찰스 워드의 글러브 끝을 스친 야구공이 바닥을 굴렀다. 그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우익수 에노모토 코이치가 바닥을 구르는 공을 주워들었다.

전성기 이치로의 그것에 미칠 수는 없었다. 그는 롱토스로 135미터를 던지는 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에노모토 코이치 역시 외야의 어지간한 위치에서 홈플레이트까지 단번에 공을 뿌리는 강견이었다.

그의 어깨가 불을 뿜었다. 외야에서 단번에 홈까지!!

-뻐엉!!

‘뭐, 결과야 조금 별로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안전하게 몸을 사리는 것보다는 저게 더 제 취향에 맞더라고요.’

-하긴, 넌 한국에 있을 때도 박동엽에게 이상하게 호의적이었지.

‘에이, 지금 현재 상태만 보면 동엽이한테 가장 호의적인 건 영감님인 것 같은데요?’

-그······, 그 무슨 참담한 망언을!!

하지만 조금 늦었다.

“세이프!!”

2:0

보스턴의 타선이 추가점을 기록하며 성민을 도왔다.

그리고 덕아웃에서 상황을 살피던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슬쩍 벤치에서 엉덩이를 뗐다.

-저 녀석?

‘저도 봤습니다. 근데 뭐, 야수들은 또 자기 나름대로 체계가 있잖아요. 에두아르도라면 알아서 해줄 겁니다.’

그가 루시 알베리에게 해바라기 씨 한 무더기를 내밀었다.

“오지랖 같지?”

“네? 아, 아닙니다.”

“아니기는. 얼굴에 다 쓰여 있구만. 뭐,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오지랖 맞아.”

“······.”

답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루시 알베리의 생각을 알려주었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이 어린 녀석을 향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니 고마운 거다.”

“네?”

“이 바닥에서 남한테 저런 이야기 해준다는 거 쉬운 거 아니야. 특히 우리 팀 분위기······, 아니다. 뭐 이건 너한테 할 이야기는 아니고. 어쨌거나 잘 생각해봐. 성민이 입장에서 자기 기분 풀려면 뭐가 더 좋겠냐? 너한테 이렇게 조언을 하는 게 편할까? 아니면 네가 수비 개판 쳤을 때 지랄 하는 게 편할까?”

“아니, 그게 아니라.”

“잠깐 변명하지 말고, 좀 들어봐. 만약 내가 있던 브레이브스에서 너처럼 했잖아? 그러면 성민처럼 이야기 해주는 선배들 엄청 많았을 거야. 그래서 난 참 너한테 미안하다. 난 망설였거든. 어차피 넌 이제 다음 주면 마이너로 돌아갈 거고 그 이후는 거기서 알아서 책임질 부분이니까.”

누군가를 설득하는 데 필요한 것은 논리와 이성이 아니다.

설득하는 사람의 태도, 혹은 그 사람과의 관계 같은 감성의 영역이다. 에두아르도는 야수들의 중심과 같은 남자였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루시 알베리가 느끼는 감정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너라면 성민의 의견에 일단 감사하겠어. 우리 팀의 어린 친구들이 작년의 일로 많은 상처를 받았다는 점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성민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해준 거야. 진짜 선배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었지.”

루시 알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같은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 느낌이 다르다.

또한, 안 그래도 성민을 호의적으로 보던 다른 선수들 역시 한층 더 성민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해졌다.

필 니크로가 감탄했다.

-저 녀석 좋은 녀석이로구나.

‘좋긴 뭐가 좋습니까. 그냥 멍청한 새끼죠.’

-응? 멍청한 새끼라니? 저 녀석 지금 너를 두둔해주고 있잖느냐.

‘두둔은 무슨 두둔입니까. 애초에 루시 알베리 녀석 빼고 이미 다들 저한테 홀딱 넘어와 있었는데.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이건 쓸데없는 어그로잖아요.’

-쓸데없는 어그로?

성민의 시선이 미셸 에쉬만에게 향했다.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이야기는 덕아웃의 선수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동시에 작년 베테랑들이 올바르지 않은 선배였다는 뉘앙스를 전달했다.

그것은 미셸 에쉬만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경기가 계속됐다.

전성기 욘 마르틴은 완벽에 가까운 투수였다.

그는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멘탈의 소유자였다.

이런 말이 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와전된 이야기다.

본래 이 이야기를 했던 유베날리스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지어다.’라고 자신의 희망 사항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의도로 이야기를 했는지와는 별개로 와전된 저 문구는 설득력이 있다. 사람의 정신과 육체는 별개가 아니다. 인간을 좌우하는 것은 호르몬이고, 이것은 육체의 컨디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전성기의 욘 마르틴은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철인이었다.

하지만 34세의 욘 마르틴은 그렇지 못했다.

“Shit!!”

욘 마르틴이 마운드를 발로 걷어찼다.

초조한 마음. 풀리지 않는 경기. 팀이 허점투성이임에도 점수를 내주지 않는 상대. 어느것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바로 욘 마르틴 자신이었다.

전성기의 공을 던지지 못하는 점은 그렇다고 치자.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그런 일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그가 생각했던 나이를 먹어가는 베테랑 투수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 양키스 덕아웃 움직이는군요. 사바시아 투수 코치가 마운드로 올라갑니다.]

“욘.”

“젠장.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꼴불견이었어요. 찰스도 충분히 해볼만한 시도였고, 사실 그 녀석의 빠른 발이 아니었다면 거기까지 가지도 못했을 텐데 말이죠. 진정하겠습니다.”

사바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화가 나면 화를 내야지. 아무도 그런 걸로 뭐라고 할 생각이 없어. 오히려 지금까지 욘 네 녀석이 너무 신사였던 거야.”

“하여간, 코치님은 제 응석을 너무 받아준다니까요.”

“알면 됐다. 4이닝 동안 고작 2점이야. 넌 아직 훌륭하게 잘 하고 있어.”

C.C 사바시아가 욘 마르틴의 어깨를 툭 두들기고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젊은 시절에는 너무 손이 안 가서 오히려 섭섭하던 녀석이 다 늙어서 저러는 것을 보고 있자니 느낌이 새롭다.

아마 로스 차일드 코치가 자신에게 느꼈던 감정이 이런 감정이었겠지.

마운드의 욘 마르틴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4월의 시원한 공기가 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이곳은 양키 스타디움. 점수는 2:0

‘그리고 난 욘 마르틴. 양키스의 에이스다.’

원아웃 주자 2루.

욘 마르틴이 추가점 없이 이닝을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성민이 아쉬운 표정으로 글러브를 쥐었다.

확실히 만만치 않다.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그걸 저렇게 재빠르게 수습하다니. 다저스 시절이었다면 4회 2:0의 점수에 가슴이 든든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뭐 그래도 표정은 훨씬 좋아진 것 같은데?

‘표정 좋아졌다고 못 하던 야구 갑자기 잘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무리 야구가 멘탈 스포츠라고 해도 말이죠.’

-뭐, 그건 그렇지.

‘게다가 저 자식들이면 오히려 안 하던 짓을 해서 더 뻘짓을 할 녀석들이에요.’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라는 점이 뼈아프군. 그런데 그걸 알면서 대체 왜 벌써 그런 이야기를 한 거냐?

‘에두아르도가 저 정도로 나설 줄은 몰랐죠. 그냥 루시 녀석이 루킹 삼진을 당했길래 딱 좋은 타이밍이다 싶었어요. 하지만 뭐, 괜찮습니다. 어차피 시즌 길게 생각하면 이런 분위기는 빨리 만들수록 좋죠. 게다가 혹시 압니까? 얘들이 만화 주인공처럼 각성이라도 해서 환상적인 수비를 보여줄지?’

과거 필 니크로는 성민의 단점으로 인내심의 부족과 방심을 꼽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저 무한한 긍정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성민의 저 방심이라는 속성은 긍정적인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속성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딱!!

[유격수 방면 빠른 타구!! 루시 알베리!!]

물론 현실은 만화가 아니고 연설 한 번에 각성을 하는 편의주의적 전개는 현실에서 쉽게 일어나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세이프!!”

[보스턴 레드삭스 양키스를 상대로 7:3 승리!!]

[9이닝 3실점. 김성민 마침내 시즌 첫 승 수확.]

[김성민을 상대로 커리어 첫 홈런을 쏘아 올리는 찰스 워드!!]

[찰스 워드 ‘운이 좋았다. 성민의 공은 가늠할 수 없는 공이었다. 그냥 눈을 딱 감고 휘둘렀을 뿐.’]

[김성민 ‘승리가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팀원 모두가 힘을 냈기에 가능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승리가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근데 팀원 모두가 힘을 냈기에 가능했던 결과라는 말도 거짓말인 것 같은데?-

-아니, 조금 다른 의미로 팀원 모두가 힘을 냈기에 가능했던 결과인 것 같은데?-

-하긴, 걔들 수비하는 거 보니까 정말 없던 힘까지 다 짜낸 것 같긴 하더라. 어떻게 하면 창의적으로 수비를 못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줄 알았잖아.-

-다들 평가가 너무 박한데? 난 그래도 오늘 보스턴 수비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함.-

-오늘 보스턴 수비가 나쁘지 않았다고? 너 제정신이냐?-

-[대략 마린스 어제 경기 하이라이트 링크] 이게 성민이 예전 KBO 시절 팀임. 참고로 시즌 하이라이트가 아니라 그냥 어제 한 경기 하이라이트임.-

-뭐지? 지금 대체 내가 뭘 본거지?-

-잠깐만. 성민 그 친구 KBO에서 팀을 우승시키고 MLB에 왔다고 하지 않았어? 설마 KBO는 전부 저런 수준인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저런 플레이가 가능한 팀은 KBO에서도 몇 팀 안 된다고.-

-맙소사. 김성민 그는 신인가?-

-이봐, 나 방금 우리 팀의 미래를 본 것 같아. 어쩌면 우리도 가능할지 몰라.-

< 3할(6)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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