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할(5) >
덕아웃.
선수들의 시선이 성민에게 모였다.
‘드디어?’
‘저 정도면 많이 참았지.’
‘얼마 전엔 맥스도 지랄 한 번 크게 했잖아. 근데 성민은 어떻겠어.’
‘근데 성민은 등판일이라고 특별히 지랄하는 타입은 아니었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래도 세상 일에는 정도라는 게 있는 거니까. 다만 아쉬운 건, 왜 하필 지금이냐는 거야. 타격이야 못 할 수도 있는 건데. 차라리 수비에서 그 난장 부렸을 때나 지랄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참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터졌나 보지.’
루시의 시선이 흔들렸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는 딱히 잘못한 것이 없다. 그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말씀하세요.”
그 건방진 모습에 깜짝 놀란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서둘러 성민에게 다가왔다.
“성민, 무슨 생각인지는 잘 알겠는데······, 아니 루시. 너도 네가 성민한테 이러면 안 되지.”
“괜찮아. 에두아르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성민이 에두아르도를 달랬다.
그리고 루시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워낙에 팔다리가 길고 늘씬한 모델 체형이라 커다랗다는 느낌이 덜하지만, 성민은 194cm에 98kg의 거한이다. 가까이에서 볼 때 위압감은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루시 알베리는 운동선수 치고는 매우 왜소한 편에 속한다. 174cm에 69kg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봐, 루시. 한 가지만 물어볼게.”
“뭐, 뭡니까!!”
루시가 자신도 모르게 쫄았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소리를 높였다.
‘쫄았네.’
‘쫄았어.’
물론 그럴수록 더 티가 난다는 것은 소리를 높이는 본인만 모른다. 덕아웃의 감독과 코치가 슬쩍 그들을 바라봤다. 카일 몬타나 코치가 감독에게 눈짓했지만, 엔리케 로만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팀 내에서 발언권이 누가 더 강한지, 그리고 단장이 누구를 더 신경 쓰는지는 명확하다.
“너,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거냐?”
“네?”
“설마 최선을 다하는 게 쿨하지 않다. 뭐 이런 생각을 하는 건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성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대부분 선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만 주전 좌익수인 미셸 에쉬만과 몇몇 코치는 성민의 그 말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 바로 저거다. KBO였다면 코치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MLB. 워크 에씩이 좀 부족하더라도, 그 부족한 채로 빅리그에 올라왔으니 그것 자체가 그 선수의 스타일이 되는 곳이다. 코치가 그걸 뭐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런 것을 이끌 수 있는 것은 함께 경기를 뛰는 베테랑이다. 하지만 보스턴 레드삭스는 탱킹을 위해 전통을 이어갈 만한 선수들을 다 처분했고, 작년에는 터무니없는 감정싸움까지 경험했다. 그리고 FA로 영입됐던 베테랑 대부분이 갈려 나갔다.
보스턴의 주전 좌익수인 미셸 에쉬만은 작년의 사태를 경험했던 베테랑이었다. 본래의 그는 조금 더 적극적인 꼰대였지만 작년의 그 사태 이후로 그는 그저 다른 사람을 비웃기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평생을 살아온 성격이 쉽게 바뀔 수는 없었다. 항상 고구마 삼백 개쯤 먹은 것처럼 답답하던 그 속이 성민의 한 마디에 시원하게 뚫렸다.
‘그래, 빌어먹을 새끼야. 21살 애송이 주제에 세상일 다 아는 것처럼 거지같이 찔끔거리기나 하고.’
보스턴의 젊은 선발인 맥스 슈피겐을 비롯한 다른 선발 투수들 역시 성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두 번의 등판에서 루시 알베리의 어처구니없는 수비에 짜증이 날 만큼 난 상황이었다. 몇 번이나 화를 내봤지만,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녀석이다. 성민의 이야기에 심적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다른 야수들 역시 딱히 불만을 갖지 않았다. 애초에 성민은 팀 내에서 절대적인 입지를 가진 에이스다. 실수나 능력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닌,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건네는 것은 그들의 기준에서 딱히 기분 나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렇게 성민의 이야기를 납득했다.
아, 한 사람.
루시 알베리 본인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뇨. 지금 제가 태업이라도 했다 뭐 이런 말씀이십니까? 고작 방금 루킹 삼진을 당했다는 이유로요? 전 방금 그 공이 슬라이더인 줄 알았습니다. 제 판단이 틀린 건 문제죠. 하지만 그걸로 태업까지 이야기 하시는 건 조금 과한 거 아닙니까?”
오히려 선수들은 성민의 이야기가 아닌 루시 알베리의 날 선 반응에 당황했다.
성민이 슬쩍 인상을 굳혔다.
루시 알베리가 주먹을 불끈 쥐고 물러나지 않았다.
-이 새끼 왜 이래? 자기가 뭘 잘했다고?
‘원래 사람은 다 그런 겁니다. 아시잖아요. 잘못하면 원래 화를 내는 사람이 태반인 거. 자기 보호 본능이죠.’
-와, 그러니까 넌 이게 이해가 된다고?
‘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야 이해 돼죠. 다만 이해가 되는 거랑, 봐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거랑은 별개지만요.’
성민의 시선이 주변을 슬쩍 훑었다.
루시 알베리의 반응은 성민이 생각한 것보다 나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사람들의 반응은 성민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호의적이었다.
‘저 새끼 왜 저래?’
‘하여간 이 팀은. 아주 루키 새끼들이 죄다 미쳐 날뛴다니까. 어휴, 나도 다른 애들처럼 차라리 트레이드나 시켜줄 것이지.’
‘선발 투수가 등판하는 날에는 아무리 지가 잘 났어도 알아서 좀 맞춰 줘야지. 저 새끼 야구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 알베리는 그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 그리고 코앞에서 자신을 압박하는 성민에 대한 반발이 눈을 가린 탓이다. 성민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갔다.
“너 정말 내가 그 타석 때문에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니?”
“······, 그러면 뭡니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 그래서 나도 다는 아니지만, 최대한 네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어. 마이너에서 구르고 있었고,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덜커덕 주전 유격수로 빅리그에 콜업됐잖니? 게다가 어차피 3주 뒤에 후안이 부상에서 돌아오면 마이너로 돌아가는 것도 확정이야. 최대한 흠 안 잡히고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싶겠지. 물론 초반에는 안 그랬지. 실책도 많이 했고, 덕분에 욕도 많이 먹었었지?”
“그래서 지금은 실책도 최대한 줄였잖습니까.”
루시 알베리의 볼멘소리에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바로 그게 문제야. 넌 너 자신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리고 존 맥도웰 단장부터 해서 다들 네게 바라는 게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바라는 것······?”
“이봐 루시. 어차피 넌 아직 마이너에서 박박 굴러야 하는 유망주야. 아무도 너에게 메이저 올스타급의 완벽한 모습을 바라지 않아. 물론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면 좋겠지. 하지만 다저스의 저 페데리코 수 녀석도 빅리그에 처음 올라왔을 때는 아주 엉망진창이었어. 그건 너무 당연한 거라고.”
귀를 쫑긋하고 있던 덕아웃의 사람들이 성민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필 니크로가 물었다.
-페데리코 수가 정말 그랬다고?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냥 일단 분위기상 그렇게 이야기하고 보는 거죠.’
성민이 말을 이어갔다.
“이봐, 루시. 네 마음은 잘 알겠어. 뭐, 우리 팀의 팬들이 좀 과격하지. 그 다채로운 욕설을 듣다 보면 위축될 수밖에 없을 거야. 나도 그랬었어. 내가 있던 KBO에서도 우리 팀 팬들의 표현은 매우 과격했거든. 조금만 못하면 우리 부모님 안부 묻는 건 아주 일상이었지. 하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욕을 먹지 않는 플레이를 추구해선 안 돼. 지금 너에게 욕을 하는 사람들은 너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아. 너 야구 하는 목표가 욕을 안 먹는 일 아니잖아? 야구로 성공할 생각인 거 아니야?”
루시 알베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욕이 사라지는 건 절대 성공이 아니야. 진짜 성공은 그 욕설을 욕설이 아닌 감탄사로 만드는 게 진짜 성공이지. 아무 욕도 먹지 않는 선수가 되고 싶어? 아니면 욕으로 시작하는 감탄사를 듣는 선수가 되고 싶어?”
“그야 당연히, 감탄사를 듣는 선수가 되고 싶죠.”
“그렇다면 할 수 있을까? 없을까? 망설여질 때 멈추는 사람이 아니라, 달려드는 사람이 돼야지.”
“하지만 실패한다면요?”
“뭐, 별 수 있나. 실패하면 그냥 욕 먹는 거지 뭐. 하지만 말이야. 애초에 야구는 10번 타석에 들어와서 3번 성공하면 그걸 성공이라고 보는 스포츠야. 터무니 없는 수비에 10번 도전해서 3번 성공한다? 그거면 됐지. 그리고 넌 인마 이제 21살이야. 게다가 어차피 다음 주면 마이너로 내려갈 몸이라고. 한계를 정해놓고 그 안에서 움직이면 아무것도 되지 않아. 네 나이 때의 한계라는 건 원래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넓어지기 마련이라고. 내가 아는 어떤 녀석도 그랬거든.”
“어떤 녀석이요?”
“어, 한국에 있던 시절의 어떤 녀석이야. 그 녀석은 너랑 완전 정반대라서 좀 문제이긴 했지만, 그래도 유망주라면 오히려 그쪽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렀을 때 더 좋은 선수가 돼 있는 건 결국 그런 쪽이거든.”
“그래서 그 선수는 어떻게 됐는데요?”
“작년을 기준으로 한국 최고의 유격수가 됐지.”
필 니크로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성민아, 이건 아니다.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순진한 어린 양을 박동엽으로 만들 생각이냐!! 게다가 10번 도전해서 3번 성공하면 O.K라니. 타석이야 실패해도 별 리스크가 없지만 수비는 그거 실패하면 리스크가 어마어마하잖아. 수비는 안정적이어야지.
‘그거야 그렇지만 이 자식은 지금 그게 너무 심하잖아요. 오히려 좀 역으로 보낼 필요가 있어요. 게다가 솔직히 이 자식보다는 차라리 동엽이가 낫죠.’
-박동엽이 낫다고?
필 니크로를 제외한, 박동엽을 모르는 모든 보스턴의 선수들이 성민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겁먹지 말고 부딪혀라. 사실 누구나 해줄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아무도 해주지 않던 이야기였다.
성민은 빅리그 2년 차의 투수였다. 프로 경력은 길지만 분명 빅리그 경력은 2년 차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가 모두의 존중을 받은 이유는 압도적인 실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건방진 루키를 다독이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성민을 실력이 아닌 다른 쪽에서 인정했다.
아무도 하지 않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의 다른 말은 모두가 하기 싫은 일이다. 그리고 모두가 하기 싫은 일을 앞장 서서 하는 사람을 우리는 보통 호구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호구가 모두의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 우리는 그 호구를 솔선수범하는 ‘리더’라고 칭한다.
사람들이 성민의 이야기에 홀딱 넘어갔다.
-야, 그런데 성민아. 이러다가 이 자식이 박동엽처럼 매일 무리수만 던지고 실패하면 어쩔 생각이냐?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무슨 상관이냐니?
‘어차피 저랑 메이저에서 뛰는 건 이번 경기가 마지막이잖아요. 다음 주에 제 등판에는 후안이 올라올 겁니다.’
-응?
< 3할(5) > 끝
작가의 말
피리911님 후원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