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할(4) >
놀라운 수비였다.
지켜봤던 필 니크로도, 공을 잡아 2루에 던진 매튜 쿠퍼도, 그리고 그 수비를 해낸 성민 자신조차도 그 결과에 깜짝 놀랄 만큼.
[노······, 놀라운 수비였습니다. 김성민.]
[지금 리플레이 화면을 보시면 공을 잡는 대신 글러브로 튕겨냈죠?]
[네, 이건 그런 표현이 더 어울리네요. 글러브 끝으로 공을 살짝 튕겨냈어요. 아마 공을 잡아 던졌더라면 조금 늦을 겁니다. 좋은 선택이었어요.]
[사실 조금 위험한 플레이이긴 했습니다만, 모든 훌륭한 플레이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 마련이죠.]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보스턴 팬들이 리플레이 화면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감탄했다. 저기 바다 건너 아침 일찍부터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그 장면에 흥분했다.
“그래, 이거지. 내가 이 아침에 야구 보는 건 이런 거 보려고 야구 보는 거지!!”
“성민이 아주 메이저 가더니 물이 올랐네, 올랐어. 한국에서는 이 정도 수비 보여준 적 없잖아.”
“어디 한국에서만 없었냐? 다저스에서도 이런 거 없었잖아.”
“에이, 그거야 다저스에서는 이런 거 할 필요가 없었던 거고. 마린스에서는 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런 거 없었잖아.”
“아, 하긴 그건 또 그렇네. 하여간 이 망할 보스턴 마린스 새끼들. 투수보다 수비도 못 하는 놈을 유격수로 박아 놓기나 하고 말이야. 그래도 우리 동엽이는 어? 에러가 좀 많아서 그렇지 저런 슈퍼 플레이는 종종 보여줬잖아?”
“여기서 박동엽 이야기는 왜 하냐? 그 새끼는 아주 말도 하지마. 걔 어제도 에러 했잖아. 하여간 그 자식은 메이저리그를 너무 봐서, 페데리코 수가 그런 플레이 한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매일 아주 겉멋 잔뜩 든 플레이만 하고 있잖아.”
공수교대.
루시 알베리가 멍한 눈으로 성민을 바라봤다.
아마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높은 확률로 투아웃 주자 2, 3루. 운이 없었다면 원아웃 주자 만루였을 것이다.
위험한 플레이였다.
성공했기에 망정이지 혹시라도 실패했다면 점수를 내줄 수밖에 없는 플레이였다. 도박이다. 게다가 실패의 확률 역시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그런 모험을 할 이유가 있었을까? 어차피 점수를 내주는 상황도, 1점으로 승패가 결정 나는 상황도 아니고 심지어 지금 보스턴은 1점을 이기고 있는데?
‘그래, 이게 옳았을 거야.’
화려한 플레이는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기록이고, 기록을 만드는 것은 견실한 플레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안전하게 공을 처리하려던 나의 생각은 옳다.
루시 알베리가 그렇게 자신에게 되뇠다.
하지만 저 수많은 한탄과 그 한탄 사이의 경악. 그리고 아무리 보스턴이라지만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박수는 대체 무엇일까?
“와우, 성민. 이건 진짜. 와우.”
포수마스크를 들어 올리며 성민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에두아르도 크루즈.
“이번 건 아주 괜찮더군. 마치, 그래. 마크 벌리 선수의 플레이를 보는 것 같았다.”
팀내의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는 고독한 꼰대. 좌익수 미셸 에쉬만 역시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건내주었다.
투수가 유격수가 해야 할 플레이를 대신하고 모두에게 칭찬을 받는 상황.
아직 어린 유격수인 루시 알베리는 자신의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그 감정이 부러움이라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했다.
경기가 이어졌다.
보스턴의 타자들은 욘 마르틴을 두들겼다.
무너질 듯, 무너질 듯. 위태위태한 상황이 이어졌다.
-너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저 녀석 강한 투수, 아니 강한 인간이다.
‘이해를 못 하기는 뭘 못합니까. 저도 긴 슬럼프를 경험했던 적이 있는데요.’
-그거랑은 달라. 슬럼프는 슬럼프지. 언젠가 빠져나올 수 있는 희망이 보이는 터널이야. 하지만 지금 저 녀석은 달라. 저건 늙은 투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야. 혹은 진짜 너클볼러만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암흑.
-저도 너클볼 투수거든요.
‘그래, 그것도 세계 최고의 너클볼 투수지. 다른 녀석들처럼 절망을 딛고 일어서거나, 혹은 나처럼 말도 안 되는 긴 수련 기간을 거치지 않은 세계 최고의 너클볼 투수.’
-아니, 그러니까 저도 그 절망을 딛고 일어나서. 여기 안 보이십니까? 토미 존 서저리 자국?
‘흥, 고작 그 정도로 절망은 무슨.’
차라리 어느 하나의 공이 압도적인 투수였다면 더 괜찮았을지도.
전성기의 욘 마르틴은 다재다능 그 자체였다. 다양한 구질에 팔 각도까지 종종 바꿔가면서 타자들을 농락했다. 심지어 그 모든 공이 결과적으로만 보면 특출난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결국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기본이 되는 속구의 위력 때문이었다.
속구가 단단히 받쳐주는 상황에서 여러 가지 변주들이 있었기에 타자들은 흔들렸다. 하지만 속구의 위력이 떨어진 지금은 다른 공들마저도 위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욘 마르틴은 꾸역꾸역 보스턴의 타자들을 막아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성민이 비교적 가볍게 양키스의 타자들을 요리하는 것과는 참으로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아오!! 저 자식은 진짜? 저럴 거면 야구 하지 말아야지!! 안정적? 웃기고 있네. 안정적이라는 말은 저런 때 쓰는 게 아니야. 저건 그냥 실수가 무서워서 도망 다니는 거라고.
‘동엽이는요?’
-크흠. 그 녀석이야 실전을 연습처럼 하는 녀석이었으니까 문제였던 거고.
물론 성민 역시 보이는 것보다는 제법 힘들게 경기를 이어나갔다. 내야진은 모두가 어딘가 하자가 있었지만 그 중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유격수인 루시 알베리였다. 잔뜩 위축된 채로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목적 만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플레이에 필 니크로가 분통을 터트렸다.
그렇게 3회 말.
선두타자로 8번 타자인 찰스 워드가 타석에 들어왔다.
-흐음, 확실히 젊긴 젊군.
‘21살이니 젊다기보다는 어린 나이죠.’
-그렇지.
‘근데 왜 새삼스럽게 저 녀석 나이에 감탄하시는 겁니까?’
-그냥, 몸이 튼실해서 말이야.
필 니크로가 성민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과는 다르다 뭐, 그런 말씀이로군요.’
-응?
다른 사람의 몸속을 실시간으로 살필 수 있는 필 니크로는 어떻게 보면 치트키나 다름없었다. 그는 좋은 코치, 좋은 트레이너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아낌없이 건넸지만, 마법과 같았던 치트를 보여줬던 순간은 가장 최초. 성민의 몸을 사용하여 직접 몇 년은 족히 연습해야 할 경험을 집어 넣어줬던 것 밖에는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했지만, 그것을 직접 말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물론 성민에게는 그게 그거였지만.
확실히 젊기는 젊다?보통 사람이 거기서 열흘 만에 뭔가가 크게 달라졌구나라는 뜻을 유추하기는 쉽지 않다. 체력이 좋단 의미인가? 회복이 빠르다는 의미인가? 여러 가지를 고민해볼만 하다. 하지만 이미 필 니크로와 함께 한 세월이 햇수로는 4년째다.
척하면 척이다.
성민이 신중하게 초구를 던졌다.
바깥으로 살짝 빠지는 너클볼.
-부웅!!
노아웃 주자 없는 상황. 의욕이 가득한 스윙이 허공을 갈랐다.
“스트라잌!!”
칼로 벤듯한 깔끔한 스윙. 개막전, 아직 어린 나이의 타자답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티가 역력했던 그 스윙과는 차원이 달랐다.
34세의 욘 마르틴은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통감하고 무언가를 더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음에도 바뀐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21살의 찰스 워드는 달랐다. 그저 선배의 조언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만으로 상황은 극적으로 개선됐다. 물론 이번 겨우내 흐트러졌던 신체의 밸런스가 완벽하게 조정된 것은 아니었다. 내전근 단련에 더 신경을 쓰고, 스윙에서 그 부분을 신경 쓰는 것만으로 저만큼이 더 나아진 것이다.
‘무슨 마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윙이 확 좋아지긴 했네요. 확실히 어릴 때는 하루하루가 다르죠.’
-너클볼 투수로 치자면 너도 아직 한참 어린 나이다. 그러니까 때는 1968년. 봄이었지.
‘워워. 저도 압니다. 아주 잘요. 10년의 마이너 시절을 걸쳐 28살의 늦은 나이에 풀 타임으로 데뷔하셨던 그 장대한 역사는 굳이 또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너클볼 투수는 은퇴의 순간까지 기술적 성숙이 이뤄지는 거니까. 이제 고작 4년 차인 전 한참 성장기라 뭐 그런 말씀이시죠.’
-흥, 그래. 바로 그 말이다.
찰스 워드가 자신의 헛스윙에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양키스를 응원하는 팬들로 가득한 경기장.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난다면 저들의 응원은 야유와 조소 그리고 악플로 바뀔 것이 분명했다. 이제 막 메이저에 올라온 애송이중 상당수는 그런 것을 신경 쓰는 데 한 세월을 보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미래를 조금도 상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확실히 크게 될 놈이다.
성민이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
몸쪽 높은 코스 깊숙하게 들어가는 빠른 공.
-딱!!
89.7마일의 위협적인 속구에 찰스 워드가 본능 적으로 반응했다. 타석에 저렇게 바짝 다가선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공을 쳐내다니.
다시 말하지만, 확실히 크게 ‘될’ 놈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안 그래도 제대로 각이 나오지 않는 스윙이었다. 열흘 동안 교정했던 내전근의 움직임이 제대로 이뤄질 리 만무했다.
내야를 넘지 못하는 높게 뜬 타구.
루시 알베리는 머저리였지만 어쨌거나 메이저의 내야수였다. 그의 글러브가 찰스 워드의 내야 플라이를 잡아냈다. 몹시 안정적으로.
-유망주도 어째 저쪽이 좀 더 나아 보이는데?
‘에이, 그럴리가요. 우리 매튜도 그렇고 루카스나 맥스 제롬 다들 괜찮은 녀석들이에요. 특히 매튜는 충분히 신인왕 노려 볼만한 녀석이죠.’
-그래도 양심은 남아있구나. 저 머저리 이름은 말하지 않는 걸 보니 말이야.
‘루시 녀석이라면······. 뭐, 원래는 어차피 다음 주에는 다시 마이너에 내려 갈 녀석이라 내버려 둘 생각이기는 했지만 한 마디를 해주긴 해줘야겠네요.’
지금 플레이가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과감한 플레이를 요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메이저리거다. 누군가의 플레이에 왈가왈부를 하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글쎄다, 어차피 네 일도 아니잖아. 다음 주면 후안 칼초가 부상에서 복귀해서 돌아올테고 말이야.
‘제 일이 아닌 건 맞는데. 슬슬 이 정도면 이야기를 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저 녀석 커리어에?
‘뭐, 겸사겸사 그것도요.’
-겸사겸사?
3회 말.
양키스의 1번 타자인 에노모토 코이치가 내야땅볼로 물러났다. 확실히 제롬 스튜버츠는 수비에서 만큼은 나무랄 곳이 없었다.
그리고 4회 초.
-뻐엉!!
“스트라잌!! 아웃!!”
선두 타자인 루시 알베리가 2-2의 볼카운트에서 바깥 코스 속구에 루킹삼진으로 물러났다. 그다지 분해 보이지는 않는 얼굴이었다.
“이봐, 루시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네?”
헬멧을 정리하는 루시에게 성민이 먼저 다가왔다.
< 3할(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