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61화 (162/287)

< 3할(3) >

NPB는 KBO보다 수준이 높은 리그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리그의 수준은 결국 자본의 규모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단적으로 메이저리그 출신의 용병만 보더라도 더 많은 돈을 주는 리그에 더 수준 높은 선수가 수급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리그의 역사 역시 훨씬 길다. 2034년 현재 기준으로 54년째를 맞이하는 KBO보다 31년에서 45년 정도 더 오래됐다.

그리고 결정적인 또 한 가지.

규모의 문제다.

재능은 선천적인 요소다. 그리고 유전자 레벨로 따질 때 특정 종목에 더 유리한 유전자는 분명 존재한다. 한국과 일본의 평균적인 신체조건을 따졌을 때, 유리한 것은 한국이다.

하지만 풀의 크기가 다르다.

1억 2천만과 5,200만.

단순하게 봤을 때 한국이 로또를 한번 긁을 때마다 일본은 그 2.3배를 긁는 셈이다. 물론 단순히 인구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구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인 인프라 역시 일본은 한국에 뒤지지 않는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훌륭하다.

어찌 됐건 일본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가장 인기 있는 프로 스포츠는 야구였고 학창 시절 아마추어 레벨에서 야구를 접할 기회 역시 한국보다 훨씬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KBO와 NPB의 격차는 꾸준히 좁혀지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한국의 경제력이 상승했기 때문이라는 말로 퉁을 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시스템.

물론 한국 야구의 시스템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KBO와 KBSA(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의 시스템이? 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일반인의 눈으로 봤을 때 그들 협회는 엉망이었으니까.

하지만 원래 1층 밑으로는 지하가 있는 법이고, 지하 밑으로는 내핵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스즈키 이치로.

물론 그는 시대의 거인이었다. 보통은 전무후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쉽지 않다. 전무는 가능해도 후무는 장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무후무한 사람이다.

그런 비효율적이며 변태 같은 재능 낭비는 그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뛰던 시대는 타율에 대한 로망이 남아있던 시대였다. 2할 2푼에 40홈런보다 3할에 10홈런이 더 좋은 타자라는 이야기가 먹히던 시대인 것이다.

그는 분명 일본 야구의 영웅이었다. 메이저에서도 몇 되지 않는 신인왕 MVP 동시 석권은 물론이거니와 10년 연속 올스타 골드글러브. 명예의 전당 첫 턴 입성까지.

하지만 개인의 위대한 업적과 별개로 그가 남긴 영향력은 NPB에 그리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그는 명백한 이레귤러였고,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선수였다. 그리고 그를 보고 자라난 아이들은 시대에 역행하는 그의 스타일을 따라 했다.

에노모토 코이치는 그런 아이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단한 재능을 타고 태어난 그는 NPB에서 스즈키 이치로의 재림이라는 평가까지 받았을 정도다. 하지만 그가 메이저에 진출한 이후 적응하는 데는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나마도 그의 재능이 역대 최고 수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부웅!!

NPB 시절과 비교해 명백하게 부푼 몸으로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부푼 몸만큼 한층 빨라진 배트. 하지만 춤을 추는 공이 마치 배트를 농락하듯 스쳐 지나갔다.

“스트라잌!!”

73.1마일의 빠른 너클볼.

에노모토 코이치가 혀를 찼다.

메이저에와서 확실히 깨달았다. 장타를 때리지 못하는 타자를 두려워하는 투수는 없다. 타율에 집착하여 단타를 양산하고, 내야 안타에서 살아나가기 위해서 벌크업을 게을리 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멍청한 짓이 조금 그리웠다.

두 번째.

63.2마일의 느린 너클 볼.

-부웅!!

“스트라잌!!”

에노모토 코이치의 방망이가 또 한번 허공을 갈랐다. 최대한 공을 지켜보고 밀어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방망이와 공이 5센티는 차이난다.

지난 3년.

몸을 키우고 타격폼을 고치고 스윙 궤적을 바꿨다.

분명 지금의 에노모토 코이치는 3년 전의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타자다. 하지만 성민을 상대하기에는 3년 전의 자신이 훨씬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공을 어떻게든 건드리기라도 하고 1루까지 달려나가는 쪽이 훨씬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든 저쪽으로만 공이 날아가면 무조건 안타가 될 것 같단 말이지.’

보스턴의 내야진은 이루수를 제외하면 제 몫을 해내는 녀석이 하나도 없다. 특히 저 유격수는 심각하다. 에노모토 코이치가 보기에 NPB 최고의 유격수도 MLB에서는 절대 유격수로 뛸 수 없다. 하지만 보스턴의 저 유격수는 예외다. 저 녀석 NPB 유격수 평균도 안되는 것 같다.

필 니크로가 에노모토 코이치의 시선을 읽었다.

-성민아.

‘압니다. 저 자식 밀어치고 싶어서 아주 안달이 났잖아요.’

너무 뻔한 답을 두고 돌아가는 것은 취향이 아니다.

밀어치기의 약점은 몸쪽 공.

앞서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애초에 스트라이크 존을 구분해서 쓰는 투수는 드물다. 더군다나 조금 잘못해도 그냥 밖으로 빠질뿐인 바깥 코스와 달리 몸쪽 공은 조금만 잘못하면 히트 바이 피치로 이어진다. 자신 있게 몸쪽에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는 드물다.

그리고 성민은 그 드문 투수 중 하나였다. 제구력도 제구력이지만 무엇보다 멘탈이 훌륭하다.

‘뭐, 맞으면 어쩔 수 없는 거죠.’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을 주저 없이 넣을 수 있는 강력한 멘탈리티.

89.7마일.

성민의 세 번째 공이 날았다. 35마일 이상 차이나는 기습적인 속구다. 에노모토 코이치의 방망이가 빠르게 움직였다.

-딱!!

하지만 완벽하게 밀렸다.

높게 뜬 타구. 성민이 세 걸음을 움직여 높게 뜬 타구를 받아냈다.

“아웃!!”

21세기.

관측 기술의 발달은 수비 시프트의 발전을 불러왔다. 타자들은 시프트를 깨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다행히 발달한 관측 기술이 도움을 준 것은 수비 시프트만이 아니었다. 수비가 없는 곳을 노리는 스프레이 히팅인가, 아니면 시프트를 뚫을 수 있는 더 빠르고 강한 타구인가.

정답이 나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대단한 타자라고 해도 수비의 빈 곳으로 타구를 날려 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더 빠르고 강한 타구를 만드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인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각각의 기댓값이 다르다. 수비의 빈 곳으로 타구를 날려 봤자 결국 대부분은 단타로 이어진다.

하지만 더 빠르고 강한 타구라면? 높은 확률로 장타, 혹은 홈런이다. 어느 쪽이 더 좋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상대하는 투수가 성민이고, 그의 등 뒤에 선 야수들이 보스턴인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애초에 제대로 된 타구를 기대하기 힘든 강력한 투수다. 그런 상황에서 멍청한 수비 덕분에 BABIP은 또 비정상적으로 높게 잡힌다. 어떻게든 타구를 굴려 보내는 방향을 노리는 게 현명하다.

경기가 이어졌다.

이어지는 양키스의 타자들이 성민의 공을 슬쩍슬쩍 건드렸다.

-망할, 내가 이래서 보스턴은 안된다고 했던 거다. 에러만 없으면 뭘 하냐고. 애초에 에러가 아니더라도 제대로 수비를 못 하는데.

에러는 아니었다.

애초에 에러라는 것 자체가 기록원의 주관적 판단이 필요한 영역이다. 타구 판단이 늦어 아예 근처에 가지 못하는 상황을 에러로 기록할지, 아니면 안타로 기록할지는 그들의 판단에 달렸다.

[아, 이게 안타라뇨. 이건 좀 아니죠. 방금은 루시 알베리 선수의 판단 자체가 늦었거든요. 아무리 미스 플레이가 아니라 동작이 늦는 건 에러로 처리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정도는 에러로 기록을 해 줘야죠.]

[제 생각에는 방금 이건 나중에 정정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이런 경우는 추후에 정정이 되는 경우가 제법 있거든요.]

원아웃 주자 1, 2루.

타석에 보이드 머피가 올라왔다. 2미터가 넘는 키에 두꺼운 몸뚱어리. 언제 봐도 위압감이 넘치는 덩치였다. 손에 쥔 방망이가 앙상해보인다. 작년 홈런만 46개. 올해에 9경기 동안 이미 3개의 홈런을 쏘아 올렸다.

다만 성민을 상대로는 성적이 썩 좋지 못했다. 작년 월드 시리즈부터 올해 개막전까지 타율이 1할 2푼 5리에 불과하다. 차라리 앞선 에노모토 코이치쪽이 더 많이 출루했다. 하지만 둘 중 누가 더 까다롭고 긴장이 되는 타자인가를 고르라면 망설일 것도 없이 보이드 머피 쪽이었다.

저 녀석은 빗맞은 타구도 담장 밖으로 넘겨버릴 수 있는 괴물이다. 또한, 성민이라고 항상 좋은 공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실투의 비율이 지극히 낮긴 했지만 어쨌든 100개를 던지면 서너 개는 실투다. 에노모토 코이치라면 기껏해야 이루타다. 하지만 보이드 머피라면?

‘높은 확률로 담장을 넘어가겠지.’

초구.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바깥으로 반걸음을 옮겼다.

-부웅!!!

존을 상당히 벗어나는 너클볼.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빠진 공을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무사히 받아냈다.

“스트라잌!!”

두 번째.

낮게 깔린 너클볼.

보이드 머피의 방망이가 이번에도 힘차게 돌아갔다.

애초에 어떻게 날아올지 모르는 공이다.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는 것은 보이드 머피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차피 야구다. 리그의 평균 타율은 2할 7푼밖에 되지 않는다. 한 경기에 안타 하나만 쳐도 평균은 하는 타자다.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다가 범타를 만드느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스윙을 휘두르는 편이 훨씬 낫다.

존의 낮은 곳으로 날아오던 성민의 공이 뚝 떨어졌다.

원바운드.

보이드 머피의 오른팔이 더 바짝 붙었다. 그리고 손목의 각도가 조금 움직였다. 바닥을 찍고 튕긴 공을 그의 방망이가 정확하게 두들겼다,

-딱!!

아무리 그가 괴물이라고 해도 이것을 장타로 연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보스턴의 내야는 앞서 본 것처럼 엉망진창이다. 이미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TV로 경기를 관전하던 보스턴의 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경기장에서 경기를 직관하던 양키스의 팬들 역시 비명을 내질렀다.

놀랍게도 그 두 가지 비명에 담긴 감정은 동일 했다.

TV가 보이드 머피의 타격을 비추는 바로 그 순간.

성민은 지난 3년 사이 최고 96마일짜리 속구가 90마일로 줄어들었다. 사실 그것은 너클볼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너무 빠른 퇴보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직 빠른 공을 던지기 위해 집중하던 폼이 서서히 커맨드와 손끝의 감각에 더 집중하는 폼으로 변화한 탓이다.

공을 던진 직후 기우뚱하던 몸이 빠르게 균형을 되찾았다.

다저스에서 생활하며 한 단계 꺼풀을 벗은 수비에 대한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오른쪽.

날아드는 타구를 향해 성민이 몸을 날렸다. 보스턴의 유격수 루시 알베리는 빠르지 않은 타구에 전진하는 대신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만약 그대로 뒀더라면 그대로 만루가 될 상황이었다.

바닥을 튕기고 날아가는 공.

성민이 오랜 시간 학습한 수비의 습관은 글러브로 공을 잡고 침착하게 공을 뽑아 일루에 송구하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지난 1년 꾸준히 지켜봤던 페데리코 수의 한 차원 높은 수비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냥 토스 해버려!!

성민의 글러브가 공을 움켜쥐지 않았다. 날아가는 공을 그대로.

-툭

마치 글러브로 공을 잡아채 던지는 것처럼.

삼루 베이스를 밟고 있던 매튜 쿠퍼의 글러브가 두둥실 떠오른 공을 잡아냈다.

“아웃!!”

공을 잡은 매튜 쿠퍼도 대체 이게 뭔가? 머릿속이 멍해지는 놀라운 수비였다. 하지만 멍때리고 서 있는 일은 없었다. 이래저래 욕을 먹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도 15년 가까이 야구를 해온 메이저리거였다. 몸에 새겨진 버릇 그대로 공을 잡아 이루에 송구했다.

멀뚱하게 서있던 루시 알베리를 넘어 이루 베이스를 지키던 제롬 스튜버츠에게!!

-뻐엉

“아웃!!”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 힘든 상황.

TV를 통해 중계되는 리플레이 화면에 보스턴 팬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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