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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벌써 온 거야? 한센이 이따 밤에나 도착한다고 그러던데. 그래서 내가 한센 대신 마중 나가려고 그랬는데.”
“아휴, 마중은 무슨. 안 그래도 네가 그럴 것 같길래 한센한테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어.”
“그래서 프레스톤 감독님은? 만났어?”
멍청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머뭇거리거나 혹은 거짓말을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권 여사는 멍청하지 않았고, 동시에 자신의 아들도 잘 알고 있었다.
“어, 공항으로 마중 나와서 지금 나 여기까지 데려다주고 갔어.”
“뭐야, 아예 프레스톤 감독님이 마중을 나갔던 거야?”
“응, 넌 오늘 쉬잖아? 자기네 팀은 오늘 경기가 있다고 보러 오라고 표도 주더라고.”
“흐흐, 우리 엄마 연애사업이 아주 순조롭게 잘 되고 계시는가 봐?”
“얘는? 다 늙은 엄마 연애사업이 잘 되고 안 되고가 뭐가 있겠어. 그보다 우리 아들은 요즘 만나는 여자 없어? 이제 나이도 있는데 결혼도 생각 해야지. 엄마는 편견 없다. 손자가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이라도 괜찮고, 빠글빠글한 곱슬머리에 까만 피부라도 괜찮아.”
“결혼은 무슨. 그리고 엄마 편견은 나도 없어요. 내 동생이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이라도 괜찮고, 빠글빠글한 곱슬머리에 까만 피부라도 괜찮아.”
-짜악!!
오래간만에 시원한 권 여사의 스파이크가 성민의 등에 떨어졌다.
“얘는 아주 엄마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못하는 소리가.”
“아, 아파!!”
“엄마 닮아서 덩치도 산 만한 녀석이 엄살은.”
“덩치가 산 만해도 아픈 건 똑같거든. 그보다 오늘 경기 같이 보러 가자.”
“어? 괜찮겠어? 매일 하는 게 야구인데 모처럼 쉬는 날에 엄마랑 다른 사람 야구 하는 거 보러가도?”
“에이, 하는 거랑 보는 건 다르지. 게다가 보니까 오늘 메츠 경기 필리스랑 하는 거네. 어차피 두 팀 다 올해는 우리랑 싸울 일 없는 팀이라서 마음 편하게 관전할 수 있어.”
“그래?”
“네, 그러니까 오래간만에 엄마랑 데이트나 하지 뭐. 그 전에 일단 뉴욕까지 왔으니 쇼핑이나 좀 하자고. 부자 아들이 오래간만에 효도나 좀 해줄라니까.”
“아휴, 효도는 무슨. 돈 많다고 함부로 쓰지 말고 따박따박 모으기나 해.”
“이 정도는 괜찮네요. 엄마는 뉴스도 안 봐? 이제 어디 가서 도박하거나 사업 한다고 날리지만 않으면 평생 돈 걱정 없으니까. 걱정말고 백화점에서 구경만 했던 비싼 거 마음껏 사라고. 딱 오늘까지만 사줄꺼니까.”
성민이 권 여사의 팔을 끌어당겼다.
확실히 프레스톤 감독과 데이트를 시작한 이후로 결혼에 관한 잔소리가 확 줄어들었다. 이번에도 프레스톤으로 이야기를 슬쩍 돌리니 말이 없어진다. 매우 만족스럽다.
권 여사가 성민을 슬쩍 살폈다.
이미 프레스톤을 통해 이야기는 충분히 전해 듣고 있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무슨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와 좋은 만남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업계에는 은밀하게 돌고 있단다. 언론에 화제가 안되는 것은 성민의 경기를 보러 와주는 스타들이 많은 탓에 하루가 머다하고 가짜 열애설이 난무하는 덕분이다.
오늘 성민의 반응을 보니 확실히 만나는 여자는 존재하는 것 같다. 평소였으면 결혼을 이야기하면 결혼은 무슨 연애부터 해야 지로 시작을 했을 텐데 오늘은 결혼은 무슨에서 끝이 났다.
‘조이라고 그랬나? 인터넷에서 사진 보니까 튼실하게 생긴게 괜찮더만.’
본래는 항상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성민은 얼굴이 자기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 곱상하게 귀공자처럼 잘 생겼지만 서른도 되기 전에 요절했던 그녀의 첫사랑. 다행히 몸 하나는 권여사 본인을 닮아 튼튼하게 태어났다. 하지만 문제는 성격이나 사람 보는 눈 같은 건 권 여사를 쏙 빼닮았다는 점이었다.
어디서 애 낳다가 죽을 것 같은 여자만 만나고 다닌다. 그녀는 배우자가 먼저 떠나간 삶이 얼마나 지옥 같은 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권여사 본인은 성민을 보고 버텼지만, 성민까지 그런 삶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서양인 며느리감은 권여사의 마음에 쏙 들었다. 확실히 서양인들은 뼈대부터가 다르다.
“어머, 성민아. 이거 예쁘네.”
“이거? 이거 사줘?”
“아니, 이건 엄마가 쓰긴 좀 젊고. 그 딱 니 또래 여자애들이 참 좋아할 디자인이야.”
“물건 쓰는 데 나이가 어딨어.”
“아휴, 다 나이에 맞는 디자인이라는 게 있는 거야. 엄마는 그래, 딱 이게 좋겠다.”
예전이었다면 더 강하게 밀어붙였겠지만, 딱 여기까지다.
성민은 권 여사가 프레스톤을 만나고 잔소리가 덜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이제 굳이 잔소리를 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
야구 선수로 성공하기 전의 성민은 지금이라도 뭔가를 다시 시작해야하는 조금 불안한 위치였다. 성민이 권 여사 자신을 닮아 제법 영리한 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세상이라는 것은 조금 영리한 정도로 헤쳐나갈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권 여사가 아직 돈을 벌고 있을 때, 뭔가 하나라도 더 도와줄 수 있을 때,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도와주고, 도와줄 수 있을 때 결혼까지 시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성민은 권 여사 자신보다 크게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아주 작은 도움. 그래, 여자한테 더 좋은 선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정도면 충분했다.
***
뉴욕 메츠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경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제법 괜찮았다. 성민은 닷새에 한 번 등판 하는 선발 투수였기에 덕아웃이라는 더 좋은 자리에서 자주 경기를 지켜봤다. 하지만 그 경기들은 직접 등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쨌거나 우리 팀의 1년 농사가 걸린 경기들이었다. 승패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옆에 앉은 권 여사는 메츠를 응원했지만, 솔직한 말로 성민은 어느 팀이 이기건 별로 상관이 없었다.
‘뭐, 어차피 이번 시즌은 두 팀 모두 만날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필리스도 메츠도 그럭저럭 괜찮은 팀이었다. 아마 운이 따른다면 지구우승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저들이 그 다저스를 이기는 그림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봐도 보스턴이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는 그림은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구나.
‘아, 저희 팀이 뭐가 어때서요.’
-뭐가 어떻기는. 지금 너희 팀 지구 꼴찌인 건 알고 있지?
‘아직 시즌 아홉 경기밖에 안 됐거든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이다. 솔직히 너희 팀 상태면 네가 등판하는 날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 줘야 하는데, 다저스랑 네가 그렇게까지 해줬는데 패배라니. 이거 아주 글러 먹었어.
‘영감님. 저 마린스에서도 정규시즌 우승했던 남자입니다.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어요.’
-그거야 네가 KBO 기준으로는 워낙에 규격 외였으니까 마린스가 우승하기 싫다고 그렇게까지 떼쓰는 걸 억지로 우승시킨거였지. 하지만 이 팀은······.
필 니크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히 힘든 상황인 것은 사실이었다. KBO와 MLB의 레벨 차이는 물론이거니와 MLB의 시스템도 문제다.
KBO는 144번의 경기를 9개의 팀과 16경기씩 모두 골고루 경기를 한다. 하지만 메이저는 다르다. 2개 리그, 6개 지구를 폼으로 나눠둔 것이 아니다.
1년 162번의 경기 중에서 다른 리그의 팀과 치르는 경기는 고작 20경기.
같은 리그, 다른 지구의 10개 팀과 치르는 경기도 66경기에 불과하다. 한 팀당 평균 6.6경기를 치르는 셈이다. 그리고 남은 76경기를 같은 지구의 4개 팀과 치른다. 무엇보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기준이 리그 승률같은 게 아니다.
지구 1등.
이건 마치 공부를 잘하는 고등학교일수록 내신을 받기 힘든 것과 똑같다.
물론 와일드카드를 통해 구제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같은 지구 팀들이 강하면 강할수록 포스트 시즌 진출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뉴욕 메츠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경기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4:2 승리로 끝났다. 투수전이었던 덕분에 경기가 끝난 시간은 상당히 일렀다.
9시 20분.
권 여사에게는 조금 늦은, 성민에게는 평소 시간대로의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게스트는 오늘의 패장인 프레스톤 윌슨 감독이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런 것처럼, 야구도 끝나기 전까지는 결과는 알 수 없는 일이지.”
그것은 올해 괜찮으시겠냐는 성민의 질문에 대한 프레스톤 윌슨의 답이었다.
너무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이가 프레스톤 윌슨이라는 시대의 거인이었기 때문일까?
그 뻔한 이야기에도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뭐,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은 여전히 많아. 성민이 너도 봐서 알겠지만, 오늘 경기가 치열한 투수전이었다고 보긴 힘들지.”
“뭐, 그렇긴 하죠. 필리스는 투수가 좋았고, 메츠는······”
“타자만 좋았지. 젠장. 내가 그렇게 선발을 보강해달라고 했는데 이번에도 꽝이었거든.”
“흐흐, 뭐 그래도 올해랑 비슷한 팀으로 작년에 챔피언십 시리즈까지 올라가셨었잖아요.”
“그래, 그리고 디아고랑 너한테 완벽하게 틀어막혔지.”
“저랑 디아고가 좀 잘 던지긴 했죠.”
프레스톤 윌슨이 작년의 챔피언십 시리즈를 떠올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런 피칭을 좀 잘 던졌다고 표현하는 건 겸손이지. 어쨌거나 항상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은 있기 마련이야. 하지만 그건 어느 팀이나 마찬가지지. 그러니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제나 변수는 생긴단 말이지.”
“좀 뻔한 말이네요.”
“세상의 진리는 원래 뻔한 이야기에 있는 법이지. 만약 지레짐작으로 포기했더라면 나의 첫 우승인 1999년도 없었을 거라고.”
“에이, 그거야 강진호 선수가 처음으로 폭발했던 때잖아요. 그 해에 MVP도 강진호 선수 아니었어요?”
“그야 그랬지. 하지만 그걸 진호 혼자의 힘이라고 할 순 없지. 녀석이 폭발한 것만으로 우승했다고 보기에 당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터무니없는 상대였거든. 솔직히 체감으로는 지금 다저스보다 당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쪽이 더 사기적이었어.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존 스몰츠. 거기에 치퍼 존스 녀석까지 말이지.”
잠깐,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던 프레스톤 윌슨이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하지만 뭐, 그걸 진호 덕분이라고 한다면 그렇다고 치자고. 하지만 2018년은 다르지. 알지? 보스턴은 그 해가 전성기였어.”
“11번째 반지 말씀이시군요.”
“그래, 솔직히 그때 보스턴은 정말 대단했다고. 아직도 가끔 호세 녀석과 하는 이야기지만 정말 10번 싸우면 한 3번 이길 만큼 전력 차이가 심했어. 진호 이후로 팀의 중심이 될 거라고 믿었던 데이비드는 몸도 안 좋았고 난 거의 퇴물이었지.”
“하지만 이기셨죠.”
“그래, 10번 싸워서 3번 이길 만큼의 힘이 있다는 말은 20번 싸우면 6번은 이길 힘이 있다는 이야기잖아. 뭐 그렇다면 그중에서 4번을 먼저 당겨 쓰면 우리가 이긴다는 뜻이니까. 결국 승부의 결과는 주사위를 던져봐야 안다 그런 이야기지.”
이미 그 모든 것을 경험해본 전설적인 선수의 이야기에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으셨죠? 메이저 역사상 가장 많은 반지를 손에 넣은 전설적인 선수의 이야기.’
-그래, 들었지. 근데 메츠는 10번 싸우면 3번은 이길 만큼은 힘이 있었잖아.
‘우리도 그 정도는 되거든요?’
-글쎄다.
4월.
양키 스타디움.
성민의 세 번째 등판이 돌아왔다.
< 3할(1) > 끝
ⓒ 묘엽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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