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벌(5) >
디아고 헤밍턴은 성민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한정된 자원이다. 그리고 투수는 공을 던지는 재능을 타고 난, 공을 던지는 전문가다. 당연히 그 공평하게 한정된 자원을 공을 던지는 것을 훈련하는 데 보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부분 투수는 타격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물론 메이저리거가 됐다는 것은 운동에 재능을 타고났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아마 아마추어 레벨에서라면 메이저의 투수들도 최고의 타자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메이저 레벨이라면?
그들 대부분은 그저 방망이를 든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하지만 성민은 다르지.’
물론 녀석이라고 딱히 타격에 더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다른 투수들 하는 만큼, 혹은 그것보다 아주 조금 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녀석은 놀랍게도 타격에 아주 대단한 재능이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재능이냐면 다저스의 타격 코치인 게리 파월은 성민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었을 정도다.
“이봐, 성민. 솔직히 네가 10년만 젊었더라면 난 너에게 진지하게 타자 전향을 권유했을 거야.”
“제가 지금 강력한 사이 영 컨텐더인 건 알고 하는 말씀이시죠?”
“아무리 그래도 야구는 타격이지. 닷새에 하루 등판하는 투수보다는 타자 쪽이 훨씬 낫잖아?”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선발 투수가 낫죠. 게다가 저 10년 전에는 98마일짜리 공 던지던 유망주였다고요.”
“그래? 그런 어깨라면 최고의 우익수가 될 수 있었겠군. 참 아쉬워.”
물론 게리 파월이 타자 출신이고 약간의 장난과 과장이 섞인 말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사이 영을 경쟁하는 투수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성민의 재능을 증명했다.
그렇기에 방심하지 않았다.
보통의 투수가 상대라면 가볍게 속구, 속구, 속구 정도로 끝내도 무방하다. 가끔 체인지업이나 슬라이더를 결정구로 넣어주는 때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별 고민 없이 공을 던진다.
그리고 초구.
-부웅!!
“스트라잌!!”
지금까지 메이저리그의 수많은 타자를 울렸던 슬라이더가 성민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스윙!! 스트라이크!! 초구 88.7마일의 슬라이더가 김성민 선수의 방망이를 끌어냈습니다.]
[언제봐도 참 살벌한 슬라이더예요. 사실 역대로 슬라이더로 유명했던 선수들은 많잖습니까? 밥 깁슨에 스티브 칼튼. 클레이튼 커쇼 선수까지. 감히 말하건데 디아고 헤밍턴 선수의 슬라이더는 저 대단한 선수들의 계보를 이었다고 해도 될 만큼 훌륭합니다.]
[그렇죠. 실제로 디아고 헤밍턴 선수의 데뷔 초창기에는 저 슬라이더를 두고 클레이튼 커쇼의 재림이라고까지 했잖습니까? 물론 같은 다저스 소속 선수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말이죠. 재밌는 점은 클레이튼 커쇼 선수 같은 경우는 데뷔 초에 스티브 칼튼의 슬라이더를 가졌다고 평가를 받았었고, 스티브 칼튼 선수도 현역 시절에는 밥 깁슨의 슬라이더에 비길만 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점이겠죠.]
대단한 슬라이더다.
성민도 너클볼을 익히기 전 속구, 슬라이더, 체인지업으로 먹고 살았던 투수였기에 더욱 크게 와닿았다. 단순히 구속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을 놓는 릴리즈 포인트, 숨김 동작인 디셉션, 끌고 나오는 익스텐션. 그리고 공의 변화가 시작되는 터널 구간부터 마지막 커맨드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곳 없이 훌륭하다.
‘어휴, 저 녀석은 무슨 투수를 상대로 초구부터 이렇게 살벌한 놈을 던지는 거야.’
-그만큼 너를 경계한다는 뜻이겠지.
보통 솔리드한 선발 투수 소리를 들으려면 평균적인 구종 두 개에 플러스급 피치 하나면 충분하다. 혹은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플러스급 피치 두 개도 괜찮다.
거기서 도미넌트하다는 말을 들으려면 플러스급 두 개에 평균적인 구종 하나 정도? 사이 영을 경쟁하는 투수들의 경우 대부분 플러스급이 아닌 플러스플러스급 하나를 들고 있다.
사실 변화구를 그냥 던지는 건 어렵지 않다. 감각이 있는 투수라면 몇 번 던져보는 것으로 그 변화를 만든다. 문제는 그걸 실전에서 쓸 만큼 신뢰도를 높이는 과정이다. 최소한의 탄착군을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그 감각을 꾸준히 유지해야한다. 터무니 없는 난이도다. 그것이 대부분 선발 투수들이 쓰리 피치 정도에서 그치는 이유다.
디아고 헤밍턴은 플러스급 이상으로 평가받는 구종을 무려 네 가지나 구사한다. 선택의 폭이 터무니없다. 성민이 던지는 너클볼이 알아도 제대로 치기 힘든 공이라면, 디아고 헤밍턴은 예측도 어려운데 예측을 한다고 해도 치기 어려운 강력한 공을 던지는 셈이다.
두 번째.
-부웅!!
“스트라잌!!”
체인지업.
사실 공을 던지는 입장에서 90마일짜리 공을 못 치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63마일짜리 공에 타이밍을 놓치는 건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디아고 헤밍턴의 체인지업은 그 이해를 매우 훌륭하게 도와줬다.
아, 이래서 못 치는 거구나.
1루 주자를 잠시 바라 본 디아고 헤밍턴이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디아고 헤밍턴은 잘 알고 있었다. 성민이 제법 괜찮은 타격 성적을 기록했지만, 그건 딱히 선구안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체중과 힘을 제대로 실을 줄 아는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타격폼. 그리고 놀라운 배트 스피드.
실제로 장타가 너무 많을 뿐, 성민의 타율은 2할 3푼에 불과했다.
존을 상당히 많이 벗어나는 속구가 날아들었다.
-뻐엉!!
하지만 너무 많이 빠진 탓일까? 성민이 돌아가던 배트를 멈춰 세웠다. 당연히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1-2.
디아고 헤밍턴의 모든 공은 플러스급 이상으로 평가받지만, 디아고가 가장 편하게 던지는 공은 역시 슬라이더다. 신인 시절부터 사용한 가장 오래된 결정구였던 탓에 분석될 대로 분석됐음에도 여전히 가장 강력한 변화구 중 하나로 군림할 만큼 대단한 공이었으니까.
방금 존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공을 하나 보여줬으니, 이제는 존을 빠져나가는 척 안으로 들어오는 공을 집어 넣겠다.
디아고 헤밍턴이 네 번째 공을 뿌렸다.
그리고 타석의 성민이 그 공을 기다렸다.
함께 1년이나 함께 생활했던 만큼 디아고 헤밍턴이 성민을 잘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성민은 어떨까?
타자와 투수는 많이 만나면 만날수록 타자가 유리해지는 경향이 있다.
성민과 대부분의 사람은 만나면 만날수록 성민이 유리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지금 타석에 선 사람은 ‘타자’ 김성민이었다.
완벽하게 존 밖으로 빠지는 것 같은 89.1마일의 슬라이더.
성민의 방망이가 그 공이 향하는 곳과 전혀 상관없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디아고 헤밍턴의 슬라이더는 여전히 환상적이었다. 방망이를 움직이는 그 순간 성민 조차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딱!!
존 바깥에서 안쪽으로 절묘하게 휘어들어온 슬라이더를 성민의 방망이가 두들겼다. 완벽하게 때려낸 타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저스 시절 타격 코치인 게리 파월의 열정적인 지도와 사람의 몸속을 꿰뚫어보는 필 니크로의 적절한 조언으로 탄생한 성민의 타격폼이 그 부족함을 어느정도 메워냈다.
[2루수 키를 훌쩍 넘기는 커다란 타구!! 다저스의 우익수인 세실리아 마토스 선수!! 공을 쫓아 빠르게 물러납니다!!]
1루에서 달릴 준비를 끝내고 있던 미셸 에쉬만이 빠르게 질주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음에도 여전히 빠른 발이었다.
[주자, 2루 지나 3루까지!!]
성민 역시 1루에서 멈추지 않았다. 세실리아 마토스는 좋은 수비수다. 하지만 이건 어지간한 느림보가 아니라면 무조건 2루를 밟을만한 타구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보스턴의 3루 주루코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손이 힘차게 돌아갔다. 3루 베이스를 살짝 밟은 미셸 에쉬만의 몸이 왼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3루 베이스를 지나 홈을 향하여.
에드 맥밀란이 반쯤 홈플레이트를 열어둔 채 가장 적절한 위치에서 송구를 기다렸다. 거의 담장 앞까지 날아간 타구를 세실리아 마토스가 주워들었다. 그리고 몸을 반 바퀴 회전. 그의 시선이 한순간 경기장의 상황을 훑었다.
홈으로 다이렉트 송구? 아니, 좋지 않다. 자세가 불안하다. 만약 정면에서 공을 받았더라면 달리던 힘 그대로 세 걸음 달려 러닝쓰로우를 했겠지만 이대론 힘들다.
이루를 지키는 페데리코 수가 보였다. 그리고 빠르게 달리는 성민의 모습도 보였다.
설명은 길었지만, 세실리아 마토스의 머릿속에서 이뤄진 판단은 매우 짧았다.
2루를 향한 빠른 송구!!
그리고 그 순간, 2루에 조금은 어설프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배운 성민의 벤트레그 슬라이딩이 들어왔다. 물론 다리를 치켜드는 양아치 짓은 없었다. 그저 아주 약간의 방해.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뻐엉!!
“세이프!!”
타이밍 상 성민의 세이프는 당연했다. 중요한 것은 홈으로 달린 미셸 에쉬만의 생사였다. 페데리코 수가 던진 공이 에드 맥밀란의 미트를 향해 날았다.
-뻐엉!!
물론 그의 어깨는 매우 강력했다. 그나마 박빙의 상황이 된 것도 그의 그 강력한 어깨 덕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이프!!”
미셸 에쉬만의 발이 중계를 거친 공보다 아주 조금 빨랐다.
경기를 지켜보던 보스턴의 팬들이 그 뜻밖의 안타에 환호했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지명타자를 운영하는 아메리칸리그팀이다. 당연히 투수가 타격을 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1년에 고작 10경기 남짓에 불과하다. 그들 대부분에게 인터리그 투수타석은 그냥 투수가 서서 가만히 공을 구경하는 시간이었다.
“맙소사, 투수가 안타를?”
무엇보다 0:0 상황을 깨트리는 1타점 적시 이루타다. 성민의 안타는 더 크게 빛날 수밖에 없었다.
[0:0 상황을 깨트리는 1타점 적시타!! 맙소사. 김성민!! 김성민이 여기서 안타를 기록합니다.]
[물론 내셔널리그에 있던 시절에도 타격이 좋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여기서 그 디아고 헤밍턴 선수를 상대로 장타를 기록하다뇨. 이건 정말이지 그저 와우!! 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보시면 정말 제대로 받쳐놓고 공을 두들겼어요. 물론 디아고 헤밍턴 선수의 슬라이더가 좀 몰린 행잉슬라이더이긴 했지만 그래도 투수가 이런 타격을 보여주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입니다.]
디아고 헤밍턴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분노의 대상은 다름 아닌 디아고 헤밍턴 자신이었다. 더 좋은 선택지가 있었는데, 대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보통의 투수라면 그렇게 감정이 흔들리는 순간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디아고 헤밍턴은 보통의 투수가 아니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96마일의 강력한 속구가 제롬 스튜버츠에게 헛스윙 삼진을 빼앗았다.
하지만 이미 점수는 1:0.
5회 말 성민이 다시 마운드에 섰다.
경기를 지켜보는 보스턴의 팬들이 드디어 연패를 끊고 승리를 하겠구나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솔직히 니들도 양심이 있으면 투수가 이만큼 했으면 승리는 챙겨 줘야지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보스턴 야수들에게 양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LAD, BOS 2차전. LAD 3:2 역전승!!]
[보스턴 이대로 괜찮을까? 5회 말 터진 최악의 에러들. 김성민 8이닝 무자책 3실점 패배!!]
-와, 미친 진짜 이 보스턴 마린스 새끼들이?-
-야, 근데 그래도 솔직히 마린스보단 낫지 않냐?-
-낫긴 뭐가 나아. 똑같은 개판이구만.-
-그래도 9회 초에 디아고 상대로 1점 더 내줬잖아. 마린스였으면 마지막까지 무기력하게 있다가 패배했을걸?-
-그 희망 고문이 더 나쁘거든!!-
-젠장!! 이게 우리가 승리한 거라고? 아니지. 아니야. 이건 보스턴 애들이 떠먹여 주는 승리를 거부한 거야. 대체 케빈은 무슨 생각으로 성민을 보스턴에게 넘긴 거야?-
< 라이벌(5)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