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51화 (152/287)

< 시작부터 끝판왕(2) >

헐리웃의 한 드라마 세트장.

“괜찮겠죠?”

“기본은 해줄 거야. 조이뿐만 아니라 엘렌도 장담한 친구잖아. 게다가 애초에 스포츠 스타한테 배우만큼 잘 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잖아?”

“하긴, 뭐 그건 그렇죠.”

“어차피 스포츠 스타를 하나 쓰고 싶다며. NFL이 아니라 MLB인 건 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아시안이니까. 아시안이면 MLB 선수인 게 오히려 좋을 수도 있어. 안 그래도 우리 아시아 쪽 성적은 조금 아쉬웠잖아.”

총괄 PD의 이야기에 메인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OTT 플랫폼의 성행 이후 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해외 시장을 무시할 수는 없어졌다. 특히 동북아시아 3개국의 경우, 다 합치면 총 GDP가 미국에 육박한다. 야구에 인기가 덜한 중국을 빼놓은 한국과 일본만 따져본다고 해도 인구수로는 미국의 절반. GDP로도 미국의 1/3이나 되는 커다란 시장이다.

작년부터 조이가 출연하기 시작한 시트콤인 라이프 오브 헐리웃은 조금 특이한 형태의 시트콤이었다. 올해로 일곱 번째 시즌을 맞이하는 이 시트콤은 등장인물들 상당수가 ‘실제’였다. 왕년에 잘 나갔던 헐리웃 스타가 실명으로 마치 현실의 자신인 것처럼 등장하고, 새롭게 떠오르는 헐리웃 스타 역시 그렇게 등장한다. 그들의 주변 인물들 역시 과거 매니저나 코디 등을 해봤던 배우들을 활용하여 시트콤 자체를 리얼리티쇼처럼 만들었다.

조이 제임슨의 경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운의 꿈을 안고 LA에 상경한 배우 지망생으로 출연했는데, 그녀의 설정 가운데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명목상으로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가 스포츠맨이라는 설정이 존재했다.

“문제는 조이의 남자친구가 핫한 스포츠 스타라는 점이에요. 기본적으로 야구 선수는 핫하지가 않잖아. 게다가 아시안이면······.”

메인 작가의 걱정 어린 이야기에 총괄 PD가 고개를 저었다.

“야구 선수가 핫하지 않다니. 휴스턴의 아론 브라이언을 좀 생각해보라고.”

“아론 브라이언?”

“그 있잖아. 펠릭의 쇼 지난 시즌 여름 에피소드에 3화 연속으로 나왔던 그 친구. 금발에 푸른눈. 턱도 두툼하고 섹시했던 그 친구 말이야.”

“아, 그 짧은 바지가 어울렸던 그 남자요? 맙소사. 그 친구가 야구 선수였어요?”

“그래. 그 친구도 야구 선수였지.”

“와우, 야구 선수는 좀 뚱뚱하고 둔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친구는 마치 쿼터백 같았잖아요.”

“야구 선수도 포지션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다고. 게다가 조이도 그렇고 엘렌도 그를 섹시하다고 평가했었잖아. 듣기로는 이바 타일러도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고 하더라고. 너도 사진으로 봤잖아. 괜찮던 거. 나도 직접 봤을 때 비주얼이 나쁘지 않았어. 조이나 엘렌, 이바가 대체 어느 면을 보고 그를 섹시하다고 했는지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말이야.”

“아무래도 동양인이니까요. 뭐 곱상할 수야 있죠. 하지만 섹시한 스포츠 스타 느낌이 나기는 힘들 거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정 그러면 이번 화만 출연시키는 거로 끝낼 수도 있어. 어차피 이번 시즌 마지막 회차잖아?”

“그건 그렇죠.”

“아, 저기 조이 도착한 것 같네. 차 타고 같이 온다고 했으니, 그도 왔을 거야. 가서 직접 눈으로 살펴보라고.”

조이 제임슨의 뒤편.

생각보다 훨씬 길쭉하고, 훨씬 하얗고, 훨씬 단정한 외모의 남자가 걸어왔다. 올해로 30세라고 들었는데 동양인답게 훨씬 젊어 보인다.

‘아니, 이건 너무 인종차별적인 생각인가?’

쌍꺼풀 없는 커다란 눈. 높은 콧대. 깨끗한 피부. 동북아시아 쪽 동양인들 피부가 원래 하얀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오히려 자신보다 훨씬 하얗다. 아니? 함께 걸어오는 조이 제임슨보다 훨씬 깨끗하다. 저 남자에 비하자면 조이 제임슨의 피부는 하얗다기보다는 빨갛다.

메인 작가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드라마를 향한 커다란 책임감이 그 감탄을 금방 잠재웠다.

분명 저 야구 선수의 외관은 훌륭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너무 얌전하게 생겼다. 차라리 아이비리그에 운동을 좋아하는 모범생 정도라면 어울리는 비주얼이다. 하지만 섹시한 스포츠 스타?

“반갑습니다. PD님은 일전에 한 번 뵀었는데, 작가님은 처음이네요.”

“안녕하세요, 에밀리 체임벌린이라고 합니다. 보내드린 대본은 다 읽으셨죠?”

“네, 시트콤도 다 살펴봤습니다.”

“아, 원래 저희 시트콤 팬이신가요?”

“하하, 아쉽게도 그건 아니에요. 여가 시간이 그리 많은 직업은 아니라서요. 다만 이번에 살펴보면서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에밀리가 성민의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부터 팬이었다고 이야기했다면 의례적인 립서비스겠거니 하고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뭐 어차피 이런 자리에까지 와서 시트콤이 재미없다고 이야기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왜 인기가 많은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니? 호기심이 생긴다.

“어떤 이유인 것 같나요?”

하지만 막상 질문하고 나니 또 후회됐다. 뭐 기껏해야 왕년의 인기 스타, 톡톡 튀는 배우들, 재밌는 스토리 같은 피상적인 이야기나 할 게 뻔한 것을.

“드라마와 리얼버라이어티의 경계를 적절하게 잘 잡아낸 점이 우선 제일 컸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리얼리티 쇼에 환호하잖아요. 그 리얼리티 쇼가 대본이 있는 쇼라고 해도 말이죠. 게다가 캐스팅도 적절했어요. 전직 코디네이터, 매니저, 경비원. 배우들이 하나 같이 자기가 직접 경험해 본 직업들로 출연을 한다는 점이 그 리얼한 연기의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대단한 점은, 작가님들이 그런 부분을 다 고려해서 대본을 써 내려간다는 점이겠죠. 사실 제가 등장하는 이번 대본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실제로 이런 상황이라도 이렇게 움직일 것 같았거든요. 뭐랄까? 야구 선수를 정말 깊숙하게 이해하고 대본을 쓰셨구나. 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성민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생각했던 이야기 그 이상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서 성민에 대한 평가가 한 단계, 아니 두 단계나 세 단계쯤 올라갔다.

“알아봐 주시니 고맙네요. 사실 실제 선수들에게 정말 많은 인터뷰를 하면서 완성한 원고거든요. 비록 길지 않은 등장이지만, 그래도 2시즌 내내 말로만 등장했던 조이의 남자친구에 관한 부분이라서 꽤 많은 공을 들였어요.”

“네, 안 그래도 그런 티가 확 나더라고요.”

“상당히 꼼꼼하게 대본을 읽은 것 같은데 혹시 뭐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아, 사실 아홉 번째 씬에서 제 행동이 잘 이해가 안 갔었거든요.”

아홉 번째 씬? 아, 그 부분. 에밀리가 대답을 해주려는 찰나.

성민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실재하는 야구 선수 김성민 말고, 시트콤에 등장할 김성민이라는 캐릭터를 짧은 기간 내에 확실하게 보여주려면 그런 약간의 과장도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네, 맞아요!! 바로 그거죠. 극은 본래 인생에서 지루함을 제거한 거니까요. 지루한 부분들을 도려냈음에도 인간 같음을 부여하려면 그런 과장은 필수에요.”

어지간한 경력의 배우도 쉽게 알지 못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캐치 해내는 성민의 모습에 에밀리가 신이 났다.

불과 몇 분 전의 걱정은 이미 봄날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필 니크로가 이렇게 또 멀쩡한 사람 하나가 말 몇 마디에 홀라당 넘어갔구나 하며 감탄했다.

사실 성민이 오늘 출연하는 분량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애초에 조이 제임슨 자체가 지난 시즌 일종의 단역이었다. 왕년의 슈퍼스타였던 주인공 허버트 로렌스가 자주 가는 카페의 새로운 알바생으로 그가 꼬시려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러던 것이 점점 이야기가 길어지고, 결국 이번 시즌에 주역 6인방 바로 다음 가는 비중으로 참가하게 됐다.

그리고 오늘 성민이 등장하는 부분은 조이 제임슨이 매일 남자친구가 있다며 버트 로렌스를 거절하는 것이 거짓말이 아닌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부분이었다.

지난 6시즌과 이번 7시즌 내내 허버트 로렌스를 거절하기 위한 일종의 변명처럼 사용하던 것이 진실로 밝혀지는 나름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즌의 마지막 화였던 만큼 크게 공을 들인 회차였다.

촬영이 시작됐다.

등장하는 부분이 길지 않다고는 해도 애초에 성민의 시간 자체가 많지 않았던 만큼 걱정이 많았던 PD였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컷!! 와우, 성민. 아주 좋았어요. 굿. 베리 굿!! 생각보다 훨씬 카메라에 익숙하네요. 혹시 경험이 있나요?”

“아뇨. 극을 찍었던 경험은 없고, 그냥 TV CF만 좀 찍어봤습니다.”

“그걸 감안해도 너무너무 훌륭했어요. 이봐. 버트는 도착했어?”

“네, 5분 전에 도착해서 지금 대기실에 있습니다. 지금 막 화장 시작했습니다.”

“좋았어. 버트한테 얼른 준비해달라고 전해 줘. 성민이 너무 훌륭하게 끝내줘서 아무래도 오늘 촬영이 빨라질 것 같아. 성민, 곧바로 버트와 성민이 처음 만나는 씬 촬영 들어갈게요. 괜찮죠?”

“네. 괜찮습니다.”

성민은 그가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 그 이상으로 완벽하게 자신의 역할을 소화했다. 아무리 극 중의 역할이 현실의 그와 같은 이름을 한 야구 선수 김성민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작가의 상상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캐릭터인데, 마치 처음부터 시트콤의 등장인물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시작된 성민의 첫 등장 씬 촬영.

앞서 촬영했던 부분을 훌륭하게 소화했지만, 이번 씬은 그 부분 이상으로 중요한 씬이었다. 앞선 씬들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느낌의 씬들이었다면, 이번에는 극의 주인공과 대비되면서 이번 시즌의 마지막을 장식할 장면이기 때문이다.

“조이, 이번에 내가 괜찮은 레스토랑 하나 알아냈는데, 오늘 저녁 어때?”

“아이, 참. 로런스 씨. 저 진짜 남자친구 있다니까요.”

“그 설정 아직도 폐기 안 된 거야? 지난번에 남자친구 전화 받는다고 혼자 떠들던 중에 제시카한테 전화 걸려온 거로 다 끝난 설정인 줄 알았는데?”

“설정 아니라니까요.”

바로 지금이었다.

“조이!!”

“어? 성민!!”

별다른 대사는 없었다. 하지만 그 조이!! 라는 목소리. 그리고 표정. 무엇보다 압도적인 비주얼이 큰일을 해냈다. 허버트 로렌스가 왕년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20년 전 헐리웃의 섹시 아이콘 소리를 듣던 남자다. 50을 눈앞에 둔 지금도 어지간한 미남 배우는 찜쪄먹는 비주얼이다. 하지만 비교가 되지 않았다.

카메라를 두고 나란히 잡히는 두 남자를 보고 있자면, 누가 봐도 성민이 훨씬 핫하다. 조이가 2시즌 내내 왕년의 스타인 허버트 로렌스의 구애를 거절할만한 비주얼이다.

“컷!!”

옆에서 화면으로 촬영을 지켜보던 메인 작가 에밀리 체임벌린이 감탄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의 성민은 분명 섹시한 스포츠맨이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꺼지는 그 순간 본래의 그 아이비리그의 모범생 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타고난 연기자다.

본래 그녀가 생각했던 조이의 남자친구에 관한 설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이가 고용한 배우로 사실은 진짜 남자친구가 없다는 설정, 그리고 또 하나는 빅리그에 콜업 되어 가끔 TV에나 등장한다는 설정.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 성민의 역할이 크게 바뀌었다.

미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기 시트콤.

세계적으로 따져봐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인기 쇼. 그 안에 야구 선수 김성민이라는 준 고정 캐릭터의 가능성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 시작부터 끝판왕(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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