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부터 끝판왕(1) >
“성민아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새 팀에 적응하는 게 힘들어?”
“힘들게 뭐가 있어. 그리고 살은 오히려 쪘는데? 엄마랑 마지막으로 봤을 때 보다 한 7kg쯤 증량했어.”
“어휴, 근데 경기 영상 보는데 얼굴이 왜 그렇게 까칠해. 엄마가 보내준 크림은 꼬박꼬박 잘 바르지?”
“까칠은 무슨. 그냥 경기 뛰니까 좀 피곤했던 거지. 주변에선 아주 꿀피부라고 난리야. 엄마는 좀 어때?”
“엄마야 당연히 좋지. 아들이 그렇게 잘 나가는데. 친구들도 아주 부러워서 죽으려고 그런다. 엄마 친구 그 미현이 아줌마 알지?”
“어, 그 아들이 로스쿨 들어갔다던 그 아줌마? 당연히 기억하지. 예전에 엄마가 3박 4일로 부러워 죽으려고 했었잖아.”
“얘는? 엄마가 언제 그랬다고. 하여간 걔가 이번에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도 붙었는데 월급이 글쎄······. 어휴. 내가 요즘 아주 우리 아들 때문에 어깨를 쫙 펴고 산다.”
권 여사의 자랑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성민이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장단을 맞춰줬다. 예전 같으면 자랑 대신, 엄마 친구 아들, 혹은 엄마 친구 딸 이야기가 나왔을 텐데 역시 돈이 최고다.
근황만 거의 20분을 이야기하던 권 여사가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모레 미국에 갈까 하는데. 어떠니?”
“어? 갑자기? 나 다음 주에는 원정만 꽉 차 있어서 여기저기 다녀야 하는데? 이왕이면 삼 주 뒤는 어때? 5월 초에는 세 시리즈 연속으로 홈경기거든.”
“어휴, 어디 엄마가 시간 내는 게 쉬운 줄 아니? 그 주에는 행사도 쫙 깔아야 하는 주라서 백화점도 엄청 바빠요.”
“어차피 엄마는 매장들 돌면서 관리만 하잖아. 행사가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엄마가 직접 돌아다니면서 점검하는 거랑 매니저한테 그냥 맡겨두는 거랑 달라. 아주 그냥 내버려 두면 개판이라니까. 내가 이래서 일을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질 못하는 거야. 하여간 내가 걔들 때문에 늙는다 늙어. 어쨌거나 뭐 원정이면 원정인 대로 엄마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 일이나 신경 써.”
“알았어. 에이전시에 이야기해둘게. 아마 한센이 마중 나갈 거야.”
“됐다. 내가 뭐 길 모르는 노인네도 아니고. 어차피 비행기 내려서 우버 쓰면 금방인데 뭐. 엄마는 신경 쓰지 마.”
필 니크로가 성민에게 물었다.
-성민아, 듣자 하니 너희 어머니도 은퇴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이제 돈도 잔뜩 벌었겠다. 굳이 어머니를 저렇게 일하게 놔둘 필요 없지 않으냐?
“에이, 그건 아니죠. 젊은 시절이야 진짜 먹고 살려고 돈을 벌었다지만, 지금 어머니 나이에 저렇게 정력적으로 일하는 건 먹고 살려고 하는 것만은 아니잖아요. 저것도 일종의 자아실현이에요. 영감님으로 치면 애들한테 너클볼 꾸역꾸역 가르치던 거랑 별다를 거 없다고요. 괜히 일 그만두면 오히려 빨리 늙을걸요. 저거 그냥 다 엄살이에요 엄살. 게다가 일 그만두면 이제 본격적으로 제 인생을 매니지하려고 하실 텐데 그러느니 그냥 하던 대로 매장들이나 매니지 하시게 두는 게 좋죠.”
성민이 스마트폰을 들어 달력을 체크했다.
“그나저나 이거 우리 엄마 속셈이 너무 빤히 보이네. 근데 이거 생각보다 너무 열렬한데요? 이러다가 아예 국수라도 먹겠다고 하면 그건 그거대로 좀 곤란한데.”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국수를 먹는다니?
“아. 한국에서는 결혼하는 걸 국수 먹는다고 표현합니다. 아무래도 그 저승 번역기 관용어구 번역성능은 좀 개선할 필요가 있는 것 같네요. 하여간에 엄마가 다음 주에 오겠다고 하는 거 너무 빤하잖아요.”
-빤하다니?
“다음 주 우리 경기요. 뉴욕이잖습니까.”
-아!!
뉴욕.
물론 메츠와의 경기는 아니었다. 보스턴은 이미 작년에 메츠와 경기를 치렀고, 정규시즌에 다시 경기를 치르려면 후년은 돼야한다. 이번 뉴욕 원정은 다름 아닌 뉴욕 양키스. 1년에 총 19번을 싸워야 하는 그 지긋지긋한 숙적이다.
-어머니의 연애는 대찬성하더니, 역시 아무리 너라고 해도 어머니가 재혼하겠다는 건 싫다 이거구나. 하긴, 나라도 그건 싫을 만하지. 나는 사실 어머니가 연애하는 것도 환영하는 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영감님은 어뭬리칸이면서 대체 왜 이리 보수적이에요?”
-예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헐리웃 영화가 아주 미국 이미지를 다 버려놨다니까. 하여간 LA가 문제야. 유럽에서 안 좋은 건 죄다 들여왔어. 우리 미국인들은 그 유럽 녀석들처럼 난잡하지가 않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프랑스 놈들이나 그런 거다. 게다가 너도 네 어머니가 재혼하는 건 싫은 거잖냐. 나에게 보수적이라고 뭐라고 할 게 아니지.
“누가 싫답니까? 엄마가 재혼하는 게 뭐 어때서요. 솔직히 열세 살짜리 애새끼도 아니고. 저도 이제 서른셋인데 이해할 건 이해해야죠. 우리 엄마 근 삼십 년을 아들만 보고 살았는데요.”
-그러면 대체 왜? 뭐가 곤란하다는 거냐?
“프레스톤 감독 미국인이잖습니까.”
-그렇지. 아!!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겁니다. 우리 엄마가 결혼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남편이랑 아들이 다 미국에 있는데 그 사업 계속 하시겠다고 한국 계실까요? 당연히 사업 정리하고 미국 들어오시겠죠. 그러면 이제 사업 안 하는 엄마의 자식 매니지먼트가 시작되는 겁니다. 어디 그뿐이겠어요? 지금은 엄마가 결혼으로 잔소리하면 엄마나 하라고 되받아칠 수 있지만, 이젠 그것도 못 하잖아요. 연애나 좀 하시라고 했더니, 괜찮다. 괜찮다. 그러더니 30년이나 혼자였던 게 많이 외로웠나 보네.”
성민이 자신의 맨들맨들한 턱을 쓰다듬었다.
엄마의 연애 자체는 찬성이다. 결혼도 뭐, 나쁘지 않다. 엄마에게는 엄마의 인생이 있으니까. 하지만 미국까지 와서 간신히 해방됐는데, 다시 품 안의 자식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
“이거, 뭔가 방법을 생각을 좀 해봐야겠네요.”
***
“어휴, 망할. 또 졌어. 아주 지는 게 일상이야. 얘들은 지는 게 지겹지도 않나?”
“야,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냐? 대체 뭘 기대하는 거야. 이 팀은 성민이가 미국 가고 끝난 거라고.”
“우리 그래도 이번 시범 경기에서는 제일 좋았거든?”
“그래, 알지. 근데 우리는 원래 시범 경기랑 시즌 초반에는 항상 제일 좋잖아.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면 귀신처럼 무너지지. 그나마 이번에는 시즌 초반에도 별로네. 난 올해는 포기 하려고. 그걸 보느니 성민이 경기를 다시 보겠다.”
“성민이 경기도 뭐, 암 걸리는 건 마찬가지드만. 5:0에서 내려갔는데 내려가자마자 1이닝 만에 6점을 내주는 팀 경기가 보고 싶냐?”
“어, 그래서 성민이 등판 하이라이트만 보려고.”
“그건 좋은 생각이네. 아니 근데 그 엔리케 감독인가? 그 양반은 대체 왜 그랬대? 개막전에 선발이 7이닝 무실점을 하고 있는데. 그걸 내려? 그것도 너클볼 투수인데?”
“그 기사도 못 봤냐? 성민이는 110킬로짜리 던지던 일반적인 너클볼 투수랑은 다르다잖아. 게다가 그날 투구 수도 117개나 됐고. 점수는 5점 차이고. 내릴만했지. 솔직히 그건 7이닝 동안 117개나 던지게 만든 시부럴 야수 놈들이랑, 1이닝 만에 6점을 내준 불펜 세 놈을 욕할 일이지. 감독 욕할 일은 아니지.”
저녁 10시 40분.
마린스의 팬들이 사직 구장을 나서며 욕을 내뱉었다. 작년 성민이 빠졌던 마린스가 거뒀던 성적은 7위. 그래도 9월까지 와일드카드의 희망은 있었다는 점 정도는 고무적이다. 하지만 올해는 어째 그보다 더 심해 보였다.
특히 야심차게 구해 온 용병이라는 놈들이 죄다 엉망진창이다. 마린스 팬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다.
결국, 그들에게 남은 것은 성민의 경기뿐이었다. 그들이 다음 성민의 등판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말인데, 솔직히 다음 경기는 아무리 성민이라도 좀 어려워 보이지 않냐?”
“아무래도 좀 그렇긴 하지? 그래도 성민이니까 어떻게든 해내지 않을까?”
“가능할까? 팀이 그 모양인데? 내가 작년에 다저스 하는 거 볼 때만 하더라도 와, 저게 메이저 수준이구나. 이러면서 감탄했거든. 근데 이번에 보스턴 하는 거 보잖아? 솔직히 말해서 마린스랑 다를 게 없더라.”
“그냥 보스턴 선수들이 좀 유망주들 위주라서 개막전에 긴장해서 그런 거 아닐까?”
“긴장해서 그렇기는 무슨. 야, 내가 양키스랑 2차전 3차전도 다 봤거든?”
“뭐야? 그걸 다 챙겨봤어? 성민이도 안 나오는데?”
“몰라. 마린스 닮아서 그런가? 이상하게 정감도 가고. 하여간 그걸 다 보면서 내가 느꼈다. 쟤들은 진짜 우리 팀이구나.”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 사내가 말을 이어갔다.
“어쨌거나 뭐, 보스턴 보니까 메이저라고 다 사기적으로 잘하는 건 아니구나하고 느끼긴 했는데, 근데 이번엔 상대가 좀 다르잖냐. 작년에 그 든든하던 애들이 이번엔 적으로 나오는 건데.”
“하긴, 그건 그렇지.”
4월 11일.
성민을 비롯한 보스턴의 선수단이 향한 곳은 로스앤젤레스.
그들의 다음 상대는 작년의 챔피언인 LA 다저스.
작년 성민이 몸담았던 리그 최강의 팀이었다.
“어휴, 마르타 블랑코부터 에드 맥밀란에 케빈 체임벌린까지. 우리 팀일 때는 그렇게 든든하던 애들이 느그 팀이 되니까 엄청 부담스럽네. 아니, 보스턴이랑 다저스는 리그도 다른데 왜 붙는 거야.”
“메이저는 교류전을 지구 순환으로 돌리잖냐. 작년에 늘서 상대가 알서였으니, 이번에는 알동인 거지.”
[개막 시리즈를 스윕승으로 장식한 LA 다저스. 다음 상대는 보스턴 레드삭스!!]
[팀 베이크 LA 다저스 감독. ‘보스턴은 젊지만 강한 팀. 방심할 생각은 없다.’]
공항 활주로 안으로 들어온 버스를 타고 LA 도심으로 향하는 길.
‘뭔가, 느낌이 묘하네요.’
-뭐가? 아, 하긴 그러고 보니 넌 한국에 있을 때는 한 팀에서만 뛰었었지. 바로 작년까지 동료이던 녀석들과 적으로 만나는 건 생소하겠군.
‘그것도 그렇고, 좀 이른 것 같아서요.’
-뭐가?
‘아니, 다저스면 솔직히 현재 메이저리그 최고의 팀이잖아요. 보통 클리셰 대로라면 이 개판인 팀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정리해서 근성과 열혈로 그 팀을 물리치는 거로 가야 할 텐데. 이건 뭐랄까? 이제 막 슬라임 잡으려고 마을 밖으로 나왔더니 끝판왕이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랄까?’
익숙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작년까지 원정을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보던 건물들이다. 저 익숙한 건물들을 보니 디아고 헤밍턴을 비롯한 다저스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끔찍하다.
지금 눈에 들어오는 보스턴의 애송이들을 보니, 한층 더 끔찍하다.
“성민, 바로 작년까지 LA에 있었으니 여기 잘 알겠네? 오늘 저녁에는 맛있는 식당이랑 안내 좀 해달라고.”
“아, 미안. 오늘 저녁에는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대신 괜찮은 식당은 찍어 줄 테니까 알아서 찾아가라고.”
“선약? 누구? 다저스 선수들이랑?”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원래 좀 알고 지내던 사람들.”
< 시작부터 끝판왕(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