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러스? 마이너스? (6) >
“뭐지? 뭔가 이것도 이상하게 익숙해. 설마 메······,메가 마린스 포인가?”
덕현이 숙성된 마린스 팬답게 보스턴의 맹공에 기뻐하기보다 불안감을 먼저 표출했다. 사실 마린스 팬이라면, 익숙한 패턴이었다.
1회 초, 성민이 똥을 싸겠다고 징징거리는 야수들을 달래가며 꾸역꾸역 이닝을 마무리 지으면 1회 말 폭발적인 타격으로 점수를 크게 만든다. 그리고 2회 이후로 꾸준히 푸짐한 똥만 싸고, 절대 추가점은 만들지 않는다.
1점, 1점 좁혀오는 쫄깃함. 그리고 성민이 7회나 8회 정도에 내려간 이후 대폭발하는 상대 팀의 타선. 그야말로 그림 같은 역전극이다. 이건 상대 팀의 팬으로서는 그야말로 볼 맛이 넘치는 게임이다. 물론 마린스 팬에게는 혈압약이 필요한 경기다.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메이저 팀이잖아.”
“우리 그 대화 아까 1회 초에도 했던 것 같은데?”
“그러지 마. 제발. 불길한 상상 그만하라고. 메이저리그 팀이잖아. 잘할 거야. 우리 믿어주자. 아무리 그래도 메이저인데 수비가 안 되는 건 공격이 너무 좋아서 그런 거로 생각해야지.”
“그렇겠지?”
“그래, 그럴 거야.”
필 니크로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건 설마 메가 보스턴 포인가?
‘마린스랑은 다르다니까요. 애초에 KBO는 자원도 너무 한정적이고 트레이드도 폐쇄적이라서 꼴찌를 해도 탱킹이 안 되는 시스템이잖아요. 당장 동엽이만 하더라도 2차 4라운드였는데 꾸역꾸역 올라왔던 거라고요. 반면 지금 우리 내야 애들이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다들 그해에는 손가락에 꼽히는 자원들이었어요. 실제로 유망주 랭킹에도 다들 최소한 한 번씩은 이름을 올렸던 애들이고요.’
-2회에도 3회에도 꾸준히 기대를 해볼만하다 이 소리로구나.
‘뭐 매 이닝 점수가 나길 바라는 건 좀 도둑놈 심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공격력만 따지면 다른 팀에 절대 뒤지지 않을 겁니다.’
뒤지지 않는다?
그 애매한 표현에 필 니크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자식들 수비에서 하는 거 생각하면 뒤지지 않는 정도로는 곤란한 거 아닌가?
-딱!!
그 순간 보스턴의 타자가 연달아 장타를 쏘아 올렸다. 2루에 있던 랄로 가야르도가 가볍게 홈을 밟았다.
점수는 2:0
상황은 여전히 무사 주자 2루.
연이은 장타에 마운드의 욘 마르틴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젠장.’
보스턴 애송이들의 기량이 생각보다 뛰어난 탓일까? 아니, 어쩌면 욘 마르틴 자신이 늙은 걸지도. 사실 작년과 비교했을 때 기량이 극적으로 나빠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93마일과 92마일은 고작 1마일 차이일 뿐이지만, 매우 큰 차이를 갖는다. 슬라이더의 각이 조금 더 나오느냐 조금 덜 나오느냐로 도미넌트와 솔리드가 갈린다.
그게 투수다.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상념들에도 불구하고 욘 마르틴은 포기하는 대신 이를 악물었다. 젊은 시절에는 기량이 떨어진 왕년의 스타들이 은퇴하지 않고 발버둥 치는 것을 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꾸역꾸역 1년을 더 채워 3천 안타를 채우는 선수보다 2,987안타에서 멈췄던 프레스톤이 더 쿨하다고 생각했다.
멍청한 생각이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순순히 목을 내주는 것이 쿨하다고? 그럴리가. 진짜 쿨한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발버둥 치고 버티고 버티는 것이다. 주변이 나를 어떻게 보건 나 자신에게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
욘 마르틴이 포수인 스티브 로더를 마운드로 불렀다.
“배합을 조금 바꾸자. 슬라이더는 존에서 완전히 빠지는 유인구로만 쓸게. 커터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보자고.”
“오케이.”
연습에서는 슬라이더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가 이렇다면 굳이 고집할 이유는 없다. 13년의 메이저 생활은 그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갔지만 그것을 대신할 다른 것들을 쌓게 해줬으니까.
역대 최고의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와 비열한 약쟁이지만, 양키스 팬들은 미워할 수 없는 앤디 페팃은 커터의 장인이었다.
그들 이후로도 양키스의 여러 투수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커터를 선택하곤 했는데, 사실 커터라는 이름으로 동일시하기에 마리아노 리베라와 앤디 페팃의 커터는 그 형태와 쓰임새가 완전히 달랐다.
욘 마르틴의 경우 슬라이더라는 강력한 결정구가 있었던 만큼 엔디 페팃의 그것과 같은 커터를 주로 활용했다. 살짝살짝 범타를 유도하는 수준의 커터다.
-딱!!
진루타, 그리고 희생플라이.
3:0.
투아웃.
욘 마르틴이 침착하게 여섯 번째 타자를 땅볼로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했다.
성민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3점이라. 나쁘진 않구나. 뭐 좀 빠듯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무난히 개막전 첫 승을 거둘 수 있겠군.
‘그래도 방심하긴 이르다 뭐 그런 말씀이시죠? 저도 압니다. 여긴 다저스도 아니고. 마린스도 아닌 거요.’
방심 그 자체였던 성민의 성장한 모습에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필 니크로가 성민의 마지막 문장에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만, 다저스는 그렇다 치고 마린스가 아닌 건 좋은 거 아니냐? 아니, 그 이전에 수비만 보면 마린스라고 해도 믿을 수 있겠는데?
성민이 양키스의 덕아웃을 향해 눈을 돌렸다.
다저스였다면 믿을 수 있다. 땅볼을 유도하면 땅볼이 되고, 가끔 생각 이상으로 좋은 타구가 나와도 그것을 범타로 둔갑시키는 녀석투성이였으니까.
마린스였다면 해낼 수 있다. 그곳에서 성민은 규격 밖의 존재였고 ‘수비 믿고 던지면 안 되지. 내가 잡아야지. 내가 이겨야 한다. 이 타자를 무조건 잡아야 한다. 삼진으로 무조건 잡아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피칭을 하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메이저리그.
그중에서도 가장 화끈한 불방망이로 유명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였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이 영 컨텐더 급으로 손꼽히는 욘 마르틴이 잠깐 삐끗한 거로 1회에 3점이나 내주는 터무니 없는 곳이다.
하위 타순임에도 불구하고 성민이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상대는 뉴욕 양키스. 다저스와 함께 메이저에서 가장 큰돈을 쓰는 구단이다. 물론 사치세에 부과세까지 더해진 현행 규정 아래서 20세기처럼 미친 듯이 돈을 쓰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거기에 근접한 만큼 돈을 쓰는 구단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는 작년 LA다저스가 충분히 보여주었다.
선두 타자 네 번째 느린 너클볼 내야 뜬공.
두 번째 타자, 루킹 삼진.
그리고 세 번째.
[김성민 선수, 훌륭합니다. 벌써 이번 경기 삼진만 세 개를 잡아냈어요. 타석에 양키스의 8번 타자 찰스 워드 선수가 올라옵니다.]
[작년 하반기 확장 로스터로 잠깐 올라왔던 선수입니다. 아쉽게도 포스트 시즌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었는데요 이번에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떠난 그레이엄 딜런 선수를 대신해서 양키스의 주전 중견수로 낙점받았습니다.]
[2033년 하반기 BA 중견수 부분 1위. 전체 8위에 꼽혔던 선수입니다. 작년에는 열아홉 경기 41타석 2할 3푼 1리의 타율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증명했는데요. 이번 시범 경기는 3할 1푼으로 성적이 상당히 좋습니다.]
21살.
아직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뽀송뽀송한 애송이가 타석에 올라왔다. 금발에 훤칠한 키. 생긴 것도 나쁘지 않다. 실력만 좋다면 인기 꽤나 끌 것 같은 남자다운 얼굴이다.
하지만 아직 어리다. 나름대로 기죽지 않겠다는 듯 험악한 표정을 짓지만 긴장한 티가 역력하다.
-애송이로군.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긴 메이저리그죠.’
-그래, 긴장을 늦추지 말아라. 저쪽에 함량 미달 같은 녀석들이 널려서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여긴 메이저리그다. 언제 어디서 어떤 괴물이 갑자기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동네지.
20살 언저리.
풀타임으로 데뷔하는 것과 동시에 3/4/5에 육박하는 성적을 기록하는 괴물들이 있다. 불과 30년 전 앨버트 푸홀스가 그러했고, 20년 전 마이크 트라웃이 그러했다.
전자는 21살에 데뷔하여 0.329/0.403/0.610를 기록했고, 후자는 20살에 데뷔하여 0.326/0.399/0.564를 기록했다.
지금 눈앞의 저 애송이라고 해서 그런 타자가 아니라는 법은 없다.
초구 빠른 너클볼.
언제나처럼 전력을 다한 공이었다.
-뻐엉!!
“스트라잌!!”
찰스 워드가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성민의 공을 처음 보는 타자들이 종종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가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두 번째.
고속 너클볼과 꼭 닮은, 하지만 10마일 가깝게 느린 너클볼.
-부웅!!
“스트라잌!!”
찰스 워드의 방망이가 허공을 휘저었다.
볼카운트 0-2.
-저 녀석 제법이구나.
‘배트 스피드가 상당한데요?’
양키스만 한 팀에서 올스타도 한 번 했던 베테랑 중견수를 미련 없이 보내고 21살짜리 애송이를 올렸다는 것은 그만한 확신이 있었다는 의미였다. 이대로 메이저에 자리만 잘 잡는다면 쭉쭉 성장하여 다음 세대 Mr. 양키스가 될만한 인재다.
하지만 아직이다.
성민은 저런 뽀송뽀송한 애송이가 자리를 잡는데 제물이 되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세 번째.
성민이 노린 것은 존을 살짝 빠져나가는 고속 너클볼.
21살.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되기에는 어린 나이이기도 했다. 작년 열아홉 경기나 경험해보긴 했지만, 심장의 두근거림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집중하자.’
타석에 선 찰스 워드가 오직 성민에게 집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성민이 던진 공에 집중했다. 여러 가지를 노리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노리는 타이밍은 오직 73마일. 물론 욕심은 많았지만, 어차피 앞선 다른 베테랑들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던 공이다. 아직은 딱 거기까지로 충분하다.
세상 모든 투수가 그렇다.
스트라이크를 던지려고 했다고, 항상 스트라이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존에서 살짝 빠지는 공을 던지려했다고 항상 존에서 빠지는 공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너클볼이라는 녀석이 그렇다.
받는 포수도 치는 타자도 어디로 향할지 모르지만, 던지는 투수 역시 어디로 갈지 모르는 공이다. 프로 무대에 서는 너클볼 투수의 조건은 존을 구석구석 활용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공이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가기만 해도 충분하다.
성민은 의도적으로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분해서 던질 수 있다. 거의 9할 이상의 확률로 그렇게 들어간다. 하지만 오늘 던진 이 공은 아쉽게도 나머지 1할에 속했다.
바깥쪽 꽉 찬 코스. 방망이가 닿는 범위. 성민의 공을 찰스 워드의 방망이가 두들겼다. 물론 존 안으로 들어갔고, 타이밍에 맞는다고 다 공략할 수 있다면 너클볼이 아니다.
-딱!!
높게 뜬 타구가 좌측 그린 몬스터를 향해 날아갔다.
성민의 시선이 타구를 따라 움직였다. 다행히 타구에 실린 힘이 그렇게까지 강하지는 않았다. 물론 평균적인 보스턴의 야수 수준을 생각한다면 마냥 안심할 수도 없다. 하지만 타구를 바라보는 필 니크로와 성민의 표정이 편안했다.
-다행이군.
‘그러게요.’
보스턴의 좌익수 미셸 에쉬만.
작년 그 처참했던 루키들과 베테랑들의 싸움 끝에 대부분 베테랑이 팔려 간 가운데,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 사나이가 가볍게 타구를 낚아챘다.
“아웃!!”
삼자범퇴.
3:0 공수 교대.
그리고 순식간에 3번의 공방이 지나갔다.
“야, 이거 우리 드디어 5년 만에?”
“쉿!! 부정타게 입 밖에 내지 마. 아직이야.”
보스턴 팬들의 기대감 속에 저 얼간이들을 이끌고 무려 5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초인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 플러스? 마이너스? (6)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