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47화 (148/287)

< 플러스? 마이너스? (5) >

행복이란 원래 상대적이다.

그냥 마린스에서 뛸 때는 뭐 이딴 놈들이 다 있나. 이게 야구인가? 정도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수비 속에서 1년을 뛰다가 세계 최악급의 수비를 다시 목격했을 때, 필 니크로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메이저인데!!!

그리고 바다 건너, 보스턴보다 13시간 빠른 대한민국.

아침 8시. 출근길, 버스 안에서 휴대폰으로 야구를 시청하던 팬들 역시 분노의 실시간 댓글을 달았다.

-이게 대체 뭐지? 난 분명 어제 저녁 충분히 상처받았고 이제 성민이 경기로 힐링을 받을 시간인데, 왜 상처에 고춧가루를 비비는 느낌인 거지? 메이저리그라며!! 이게 마린스랑 뭐가 다른데!!-

-타자들이 메이저 타자잖아.-

-아니, 타자가 메이저 타자인 거랑 저거랑 무슨 상관임. 백번 양보해서 일루수야 주자가 워낙 빠르니 송구 빨리 하려다가 실수했다고 치자고. 근데 방금 저건 진짜 그냥 뇌절이잖아.-

-아니, 변명이 아니라 마린스랑 다른 건 상대 타자가 메이저 타자인 것 밖에 없다고. 마린스가 메이저 가도 딱 저 모양 그대로 수비할 듯.-

분노한 것은 개막전을 보겠다고 꾸역꾸역 경기장으로 나왔던 보스턴의 현지 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래도 보스턴 같은 인기 팀의 티켓 가격은 비싸다. 하물며 개막전에 양키스와의 경기다. 오늘 경기는 외야석 가격이 250달러에서 시작하는 비싼 경기다. 그런 경기의 1회 초부터 이런 터무니 없는 실책이 연달아 나왔다.

욕설이 안 나오는 게 이상하다.

“이 망할 새끼들!! 내가 이런 거 보자고 300달러나 들여서 여기 온 줄 아냐. 이 개자식들아!! 이거 조졌어. 오늘 경기 완전히 조진 거야.”

“그래도 아직 1회 초잖아. 점수도 안 내줬고.”

“저 꼴을 보고도 그런 이야기가 나와? 내야수들이 죄다 병신인데? 보라고. 이제 투수 멘탈 터지고 게임도 같이 터질 일만 남았으니까. 내가 투수라도 지금 제정신 아닐 거다.”

“멀쩡한데?”

“멀쩡하긴 뭐가 멀쩡하다는 거야. 내야 수비가 아주 개박살······”

-부웅!!

“스트라잌!!”

초구 너클볼.

성민의 공이 존을 정확하게 공략했다.

“······인데 멀쩡하네? 뭐지? 왜 멀쩡하지?”

“좋은 거 아니야?”

“아니, 그야 당연히 좋긴 좋은데. 뭔가 좀 이상하게 찝찝한데?”

마운드를 올라갈까 말까 망설였던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새삼 놀랐다. 마운드에 선 투수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녀석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보통 투수 놈들은 다 개복치다.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꿱 하고 알아서 자멸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피칭은 예민한 동작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으로 90마일이 넘는 공을 그 작은 구획에 정확히 던지기는 절대 쉽지 않다. 멘탈이 흔들리고 몸의 어느 부분이 조금만 뻣뻣해져도 확 티가 난다.

관중석의 소란이 서서히 잠잠해졌다.

가장 화가 날 투수가 담담히 스트라이크를 잡는 상황이다. 또한, 실책은 실책이지만 일단 점수는 아직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타석에 선 남자는 리암 루카스.

이제 좀 늙긴 했지만, 지난 10년 동안 양키스라는 이름을 등에 짊어졌던 남자로 보스턴 팬들에게는 가장 싫은,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단한 적수였다.

늙은 양키스의 5번 타자가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올해로 메이저 17년 차.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한 거액의 장기 계약도 해봤고 타자 명예의 전당 보증 수표라는 500홈런도 이미 작년에 달성했다. 또 다른 보장 수표인 3천 안타까지는 아직 조금 남긴 했지만, 커리어 내로 충분히 가능하다. 8년짜리 장기 계약은 끝났지만 40세 시즌에 무려 2년짜리 재계약까지 맺은 덕분이다. 이 정도면 야구 선수로는 더할 나위 없이 성공한 인생이다.

하지만 대부분 늙은 야구 선수가 그렇듯, 그 역시 만족할 수 없었다. 평생을 해왔던 일을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아직 젊은 녀석들은 알지 못한다. 이 시간의 소중함을.

리암 루카스가 성민의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마운드에 선 남자는 작년 가을. 커리어 세 번째 반지를 막아섰던 투수다. 인정할만한 실력자다. 분명 저 남자는 현재 메이저 최정상의 기량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리암 루카스 자신이 메이저 최정상의 투수를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남아있는 것은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날아오는 공이 너무 느리다.

빌어먹을.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타격이라는 놈은 좀처럼 쉬워지지 않는다. 빠르면 빠른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힘겹다. 무엇보다 예전 같지 않은 몸이 아쉬웠다.

리암 루카스는 명예의 전당 첫턴이 예약된 타자다. 2020년대 시대를 지배했던 타자라는 의미다. 아마 전성기의 그였다면 자세가 완전히 무너진 채로 그대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내야를 훌쩍 넘어가는 타구를 만들어 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40세의 리암 루카스는 달랐다. 그런 무모한 선택은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았다.

-뻐엉!!

“스트라잌!!”

돌아가던 방망이를 멈춰 세웠다. 이건 건드려봤자 내야 땅볼이다. 보스턴의 내야진 상태를 보면 도전을 해보는 것도 나쁜 것은 없었지만, 아직 카운트가 남은 상황에서 굳이 그럴 이유는 없었다.

타석에서 잠시 나와 16년의 세월 동안 쌓인 수 많은 루틴들을 수행했다. 몸에 익은 동작들이 쓸데없이 긴장된 근육들을 이완시켰다. 경기장 가득히 그를 지켜보는 보스턴의 수많은 빨간 유니폼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그린 몬스터 위에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아마 500개가 넘어가는 그의 홈런 가운데 2, 30개는 저 그린 몬스터 위로 날려보낸 홈런이었을 것이다.

그래 나는 이곳 펜웨이파크의 악몽 Mr. 양키스. 리암 루카스다.

마운드의 투수가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볼카운트 0-2.

투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볼카운트. 아마 존 밖으로 빠지는 공? 아니 어쩌면 그냥 과감하게 존 안으로 들어오는 너클볼을 던질지 모른다. 뭐가 어찌됐건 방망이를 휘둘러야하는 불리한 상황이다.

그냥 너클볼? 아니면 그 엿 같은 고속 너클볼?

리암 루카스의 시선이 마운드의 성민에게 고정됐다.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부······웅

“스트라잌!! 아웃!!”

2아웃 주자 1, 2루.

89.9마일의 높은 코스 몸쪽 깊숙한 속구가 리암 루카스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와!!!!!!””

그 시원한 삼구삼진에 경기장이 크게 요동쳤다.

첫 번째 타자를 상대로 잡았던 삼진과는 또 달랐다. 아무리 늙었다고 해도 보스턴의 팬들이 기억하는 리암 루카스는 펜웨이파크의 악몽. Mr. 양키스다.

리암 루카스가 혀를 찼다.

만약 3년만 젊었더라면. 그렇다면 어떻게든 반응할 수 있었을 것을.

몸쪽 높은 코스. 좋아하는 코스다. 타이밍만 제대로 맞춘다면 무조건 담장을 넘겨버릴 수 있는 코스. 그런데 그런 곳으로 이렇게 대담하게 속구를 찔러넣다니.

그의 시선이 그린몬스터의 낡은 스코어보드로 향했다. 낡아빠졌음에도, 그보다 쌩쌩한 LED 전광판이 있음에도 여전히 경기장을 지키고 있는 것이 리암 루카스 자신을 닮았다.

그 낡은 스코어보드가 리암 루카스에게 이야기했다.

1회 초.

그래, 야구는 9회까지다.

고작 삼진 하나. 아직 기회는 많다. 리암 루카스가 덕아웃으로 퇴장했다.

[헛스윙 삼진!! 잔루 1, 2루. 보스턴이 1회 초 양키스의 공격을 무사히 막아냈습니다.]

[김성민 선수, 대단히 인상적인 보스턴 데뷔전이네요. 진작에 삼자범퇴로 끝났어야 하는 상황인데 결국 마지막에 삼진으로 타자를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사실 다저스에 있을 때는 삼진율이 그리 높은 투수는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오늘 피칭을 보니까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 높은 코스 속구. 상당히 까다로워요. 구속 차이도 상당하고 회전수가 굉장히 좋습니다. 타자의 헛스윙을 끌어오기 아주 좋은 공이예요.]

-마, 우리 성민이가 어? 삼진을 안 잡은 거지 못 잡은 게 아니라 이거야!!-

-진지하게 말하자면 다저스 시절에는 야수들이 워낙 잘하니까 굳이 삼진 잡으려고 무리를 안했던 거고, 여기서는 그냥 다시 마린스 시절로 돌아간 거지.-

-아, 저녁마다 마린스 경기 보고 암에 걸리는 거, 그나마 닷새에 한 번 성민이 경기 보는 거로 풀었는데, 이제는 저녁에 걸리고 새벽에 또 걸리게 생겼네.-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성민에게 필 니크로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래 성민아 투수는 당연히 수비 믿고 던지면 안 되지. ‘내가 잡아야지. 내가 이겨야 한다. 이 타자를 무조건 잡아야 한다. 삼진으로 무조건 잡아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마운드에 서는 거야.

‘아이, 참. 대체 그거 언제까지 우려먹을 생각입니까? 여기가 무슨 마린스도 아니고.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아니!! 틀렸어!! 지금 보니까 그럴 필요 엄청 있어 보인다. 여기 아주 엉망진창이야. 대체 여기가 마린스랑 다른 게 뭔데!!

‘다르죠. 엄청.’

마운드에 양키스의 에이스 욘 마르틴이 올라왔다.

리암 루카스와 함께 양키스를 이끌어나갔던 쌍두마차다. 차이가 있다면 리암 루카스가 근 15년 가까운 오랜 기간 징글징글하게 보스턴을 괴롭혔다면, 욘 마르틴은 최근 5, 6년 보스턴에게 넘을 수 없는 악몽을 선사했다는 정도일까?

타석에 땅볼 머신. 선행타자 살해자. 내야의 유일한 1인분. 제롬 스튜버츠가 올라왔다.

욘 마르틴의 공이 그의 방망이를 여러 차례 끌어냈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파울, 파울, 파울

그리하여 볼카운트 0-2.

존을 크게 벗어나는 유인구.

이번에도 어김없이 제롬 스튜버츠의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딱!!

빗맞은 타구가 힘없이 1루 파울라인을 따라 굴렀다. 1회 초, 제이크 스컬리와 비슷한 상황. 게다가 양키스의 내야진은 보스턴보다 훨씬 나았으며 욘 마르틴의 백업 역시 나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것은 순수하게 제롬 스튜버츠의 역량이었다.

-뻐엉!!

“세이프!!”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양키스 덕아웃 조금 소란스럽네요. 이거 비디오 판독을 신청할 모양인데요?]

[그나저나 제롬 스튜버츠 선수 굉장히 빠르네요. 지금 타석에서 1루까지 몇 초나 걸렸죠?]

[지금 올라오네요. 3.63초. 맙소사. 작년에 리그에서 가장 빨랐던 타일런 선수의 기록이 3.61초였으니까 그것보다는 조금 느립니다만 이거 어마어마하네요.]

[아, 지금 비디오 판독 결과 나왔습니다. 세이프!! 세이프 판정 유지됩니다.]

욘 마르틴이 침착하게 호흡했다.

내야 땅볼을 유도했지만 살아나갔다. 뭐 그럴 수 있다. 애초에 야수들의 실수도 없었다. 그냥 타자의 역량이 대단했을 뿐이다.

타석에 앞선 수비 이닝에서 크게 실수했던 랄로 가야르도가 올라왔다. 작년 제법 괜찮은 성적을 거뒀던 일루수다. 주의해야 할 상대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덜 익었어.’

24살.

아직 어린 나이다. 속구에는 제법 강하지만, 브레이킹 볼에는 어김없이 방망이를 붕붕 돌렸던 기억이 난다. 이번 시범 경기 기록을 봐도 조금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약점을 완벽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우선 초구는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로.

마운드의 욘 마르틴이 지금까지 그를 빅리그에 군림하게 했던 그 공을 힘차게 뿌렸다.

-딱!!

[!?]

[랄로 가야르도 초구 타격!! 크, 큽니다!! 높게 뜬 타구가 좌측 그린 몬스터를 향해!!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11.3미터의 그린 몬스터.

그 거대한 펜스 상단에 랄로 가야르도의 타구가 명중했다.

[아, 넘어가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아쉬워할 이유는 없었다. 1루에 서 있던 주자는 리그에서 손꼽히게 빠른 사나이 제롬 스튜버츠였다. 2루 지나 3루. 그리고 3루 지나 홈까지.

랄로 가야르도가 2루까지 도착하는 사이, 이미 그의 발이 홈을 밟았다.

1회 말. 노아웃 주자 2루. 점수는 1:0

성민이 필 니크로에게 말했다.

‘거 보세요. 마린스랑은 다르다니까요.’

보스턴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 플러스? 마이너스? (5) > 끝

ⓒ 묘엽

작가의 말

죄송합니다.

1분 늦었네요 8ㅅ8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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