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러스? 마이너스? (4) >
“뭐지?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데자뷰인가?”
“작년 8월 브레이브스랑 경기. 현정현 그 망할 새끼가 했던 플레이랑 비슷하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지. 여기 메이저잖아. 크보에서도 최하급인 현정현이랑 비슷한 플레이라니. 그럴리가.”
“맞다니까 그러네. 내가 정확하게 기억해. 우리팀 치고는 특이한 일이었잖아.”
“특이 하다니? 우리 팀이 에러 하는 게 뭐가 특이 하다는 거야?”
“특이하지. 잘 생각해봐. 우리 팀이었다면 저런 상황이면 투수가 공 놓치고 주자 2루까지 나가는 게 보통이라고.”
“아, 그건 그러네.”
“근데 그 때 7회인가? 8회인가? 진명규가 올라와서 현정현이 악송구 했던 거 잡았다니까. 내가 그 때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근데 박수 치고 생각해보니까 이건 박수 칠 일이 아니라 현정현 쌍노무시키 에러에 욕할 타이밍이더라고.”
친구의 이야기에 덕현이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 맞다. 나 기억난다. 나 그때 소개팅 때문에 경기 직관 못 했던 날. 우리 팀이 11:8인가로 아깝게 경기 졌던 그 날 맞지?”
“소개팅 아니고 맞선. 그리고 아깝게 11:8 아니고 하나도 안 아까운 11:6. 진명규 그 새끼도 그렇게 수비는 잘해놓고 공은 똥같이 던져서 3실점이나 했잖아. 그래도 그날은 솔직히 투수 욕은 안 나오더라. 투수가 수비를 저렇게까지 해줬는데도 내야진이라는 놈들은 수비가 아주 개똥이었어. 멘탈이 터질 만도 하지.”
“야, 아무리 그래도 마린스 투수인데 그 정도로 멘탈 터지면 되겠냐? 재작년에 성민이 기억 안 나? 어땠었는지.”
개막전, 게다가 양키스와의 경기다. 가뜩이나 잔뜩 달아올라 있던 관중의 야유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애초에 경험이 부족한 유망주였다. 게다가 본인 스스로도 송구를 제대로 못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미안함과 민망함 그리고 창피함까지. 랄로 가야르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시선이 성민에게 향했다.
“괜찮아. 괜찮아. 야구 하다 보면 실수 한, 두 번씩 하는 거지. 난 이거보다 더한 것도 봤어.”
-하나도 안 괜찮다!! 어디 160짜리 공에 맞아봤다고 140짜리 공이 안 아프다더냐!!
필 니크로의 절규를 무시한 채 성민이 랄로 가야르도를 격려했다. 본인이 잘못한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게다가 오늘 경기는 이제 시작이다. 화를 내기보다는 부드럽게 풀어가는 것이 옳다.
무엇보다
‘영감님, 얘가 그나마 빠따질 제일 괜찮은 녀석이잖아요. 그냥 지금 확 화내고 36세에 방망이 붕붕 휘두르는 1루에서 공 받는 머신 세울까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성민이 랄로 가야르도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마운드로 돌아갔다.
“야, 너 운도 좋다. 니네 에이스 성격 왜 이렇게 좋아? 개 같은 성격이라면 글러브 집어 던져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아 근데 너도 그건 알지? 보통 선발 투수들은 대부분 다 개 같은 성격인 거.”
“······.”
랄로 가야르도가 1루에서 보호 장구를 벗으며 떠들어대는 제이크 스컬리의 이야기를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제이크 스컬리의 이야기가 옳다는 것을. 당장 그와 어울렸던 맥스 슈피겐 그 자식만 하더라도 이런 실책에 욕설부터 튀어나올 녀석이었으니까.
마운드의 성민이 마치 지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다음 타자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관중석의 팬들을 조금 진정시켰다.
너클볼, 너클볼. 그리고 너클볼.
-딱!!
높게 뜬 공이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보스턴의 유격수 루시 알베리가 조금 불안하게 내야 뜬공을 처리했다. 그 모습에 필 니크로가 또 우거지상을 썼다. 이유는 간단했다. 보스턴의 다른 내야수들이 커피라면 녀석은 TOP였으니까.
다른 선수들은 그래도 경쟁을 통해서 다른 선수들보다는 종합적인 면에서 조금 낫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루시 알베리는 아니다. 당장 그가 합류한 것도 당장 사흘 전에 불과했다.
-망할 새끼. 그래, 내가 어? 랄로 가야르도에 제롬 스튜버츠, 매튜 쿠퍼까지 다 억지로라도 이해해보려고 노력을 해본다.
‘에이, 제롬은 아니죠. 걘 땅볼을 좀 많이 쳐서 그렇지 수비는 괜찮잖아요. 솔직히 어깨만 조금 좋았으면 유격수 봤어야 하는 애인데.’
-아니, 어깨 약하더라도 차라리 녀석이 유격수를 봐야해. 아무리 생각해도 루시 알베리 저 녀석은 아니지. 아니 무슨 유격수가 내야 뜬공을 처리하는 데 조마조마해야 하냐고!! 박동엽도 저 정도는 아니었어!! 동엽이가 나에게 프로 선수의 하한점을 알려줬다면 루시 알베리 저 녀석은 그 하한점의 신기원을 새로 개척했다고!!
‘아니, 그래도 어쨌든 에러는 하지 않았잖아요.’
-내야 뜬공도 못 잡으면 그게 무슨 프로냐!! 리틀 야구부터 다시 배우고 와야지!! 젠장 말하고 보니 마린스에는 그런 녀석들이 널렸었군. 그렇다면 리틀 야구는 취소. 하여간 빅리그에 올라오면 안 되지!!
‘사정이 있잖습니까. 주전 유격수 해야 할 바그너 가이탄은 햄스트링이 나갔고 그 대체 선수인 후안은 교통사고로 전치 7주 판정 받았고요. 이제 3주 남았으니까 3주만 있으면 돌아올 겁니다.’
투아웃 주자 1루.
타석에 양키스의 4번 타자인 보이드 머피가 타석에 섰다. 2미터가 넘는 거구. 게다가 작년보다 한층 더 우람해진 몸매가 인상적이었다.
‘저건 야구 선수보다는 프로레슬링을 해야 할 것 같은 몸인데요?’
-확실히 저 정도면 관절 가동범위에 지장을 줄 정도의 몸이구나. 하지만 그래도 긴장을 늦춰선 안 돼. 파워 하나만큼은 대단할 거다.
‘작년에도 파워는 대단했습니다. 빗맞은 공을 담장까지 날렸었으니까요.’
느린 너클볼.
-부웅!!
몸을 꽉 채운 근육이 단순히 보여주기 용이 아니라는 것을 과시하듯 허공을 가르는 배트의 파공음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위협적인 스윙이라도 공을 건드리지 못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또다시 느린 너클볼.
속구.
그리고 느린 너클볼.
-딱!!
보이드 머피의 방망이가 처음으로 성민의 공을 스쳤다. 내야 관중석 깊숙하게 틀어박히는 파울타구. 확실히 힘 하나는 장사다.
볼카운트 1-2.
보이드 머피가 성민의 다섯 번째 공을 기다렸다.
성민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빠지는 공을 찔러 넣어도 무조건 방망이가 나올 수밖에 없다. 존 밖으로 공 두 개 정도 빠진 코스. 물론 너클볼의 특성상 그곳을 노렸다고 거기로 공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단지 스트라이크 존 복판을 노리느냐 바깥을 노리느냐의 차이다.
결과는 오직 날아가는 공만이 알 뿐이다.
73.7마일의 고속 너클볼이 성민의 손을 떠났다.
보이드 머피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답은 하나뿐이다. 저 공이 존 안으로 향할지, 아니면 밖으로 빠질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무력하게 루킹삼진을 당하느니 방망이를 휘둘러보는 것이 옳으리라.
그가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멀어!!’
그리고 그가 반쯤 방망이를 돌렸을 때 깨달았다. 너무 멀다. 하지만 멈추기에는 이미 늦었다. 최대한 팔을 쭉 뻗었다. 자세가 무너지는 것에 상관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대로 그냥 휘둘러도 아웃이다. 어떻게든 건드려라도 봐야한다.
-딱!!
공을 쳤다기 보다, 공을 건드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스윙이었다. 보이드 머피의 괴력이 1할도 전달되지 않은 허접한 스윙. 바닥을 크게 찍은 타구가 2, 3루 간으로 굴러갔다.
루시 알베리가 빠르게 뛰어나왔다. 하지만 그가 잘했던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물론 그가 아무리 필 니크로에게는 허접하다고 욕먹는다지만 그래도 프로에 이름을 올린 유격수였다. 아직 빅리그에 뛸 준비가 하나도 되지 않았을 뿐, 나름대로 루키와 싱글A를 걸쳐 AA까지 차근차근 밟아 올라오고 있는 인재다.
-저, 저 망할 새끼가?
그러나 빅리그의 긴장감이 그를 옥좼다. 만약 AA였다면 자신있게 베어핸드로 공을 잡아 가볍게 1루에 송구하는 것으로 이닝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루시 알베리의 상태는 과장을 조금 보태 여긴 어디? 나는 누구?에 가까웠다. 몸에 배인 습관대로 바닥을 구르는 공을 안전하게 글러브로 처리했다.
괜찮다.
보이드 머피는 무거운 선수고 아직 1루까지는 거리가 많이 남았다. 현재 아웃카운트는 두 개. 1루에 송구를 하면 이닝은 끝난다.
그리고 루시 알베리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어? 어? 루시 알베리 선수. 공을 잡아 2루에!!]
-뻐엉!!
“세이프!!”
습관처럼 2루로 커버를 가 있던 제롬 스튜버츠가 공을 잡아냈다. 대체 왜 지금 나한테 공을 준 거지? 1루에 던지면 끝인데? 이해할 수 없는 선택. 하지만 생각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공을 잡은 자세 그대로 몸을 슬쩍 돌려 1루를 향해 전력으로 공을 뿌렸다.
안정적인 송구. 90피트. 27.43미터. 여기서 제롬 스튜버츠의 소녀어깨가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뻐엉!!
“세이프!!”
[맙소사. 2사 주자 1루 상황. 내야 땅볼에 주자가 모두 살아나갑니다.]
[루시 알베리 선수. 이건 선택이 좀 잘못된 것 같은데요. 물론 원아웃이었다면 노려볼법도 하긴 했지만, 방금은 1루에 송구했으면 무조건 아웃이었어요. 그러면 이닝이 종료되거든요.]
[맞습니다. 1루 주자는 발이 빠른 제이크 스컬리 선수였고, 타자 주자는 발 느리기로 유명한 보이드 머피 선수였단 말이죠. 이걸 왜 굳이 그랬을까요.]
[아무래도 아웃카운트를 착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예전에 투수생활 할 때 아웃카운트를 착각해서 2아웃 잡고 마운드를 내려갈 뻔한 적이 있었거든요.]
[물론 경기를 뛰다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원아웃에서 실책으로 출루한 것부터 해서 이거 참 아쉽네요. 개막전, 보스턴 내야진이 벌써 두 번이나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뭐지? 지금 대체 내가 뭘 본 거야?-
-그러니까 2아웃 1루에 내야 땅볼. 타자 주자가 보이드 머피였는데 이걸 2아웃 주자 1,2루로 만들었다 그 말이지? 미쳤네. 야, 저 새끼 대체 뭐야?-
-바그너 가이탄 햄스트링 부상, 후안 블랑코 교통사고. 그리고 마이너에서 급하게 올린 유격수임. 작년에 AA성적은 꽤 괜찮아서 올 확장 로스터에서 한번 콜업해볼 만하지 않나 싶은 선수였는데 개막전부터 이렇게 시원하게 똥을 싸버리네.-
-아니, 우리 내야 대체 왜 이래? 투수가 쓸 만한 녀석이 들어오니까 내야진이 붕괴가 돼버리고. 미쳐버리겠네.-
-근데 저런 짓이 계속되면 투수 멘탈이 버텨내기 힘들겠는데? 벌써 1회에만 저 짓을 두 번을 했잖아.-
-저 친구 다저스에서 온 친구 아니야? 거기 내야진은 역대 최고 수준이잖아. 그런 곳에 있다가 이런 꼴을 보다니. 지금쯤 트레이드 거부 괜히 풀었다고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겠네.-
필 니크로가 소리쳤다.
-으아아아악!! 말렸어야 해. 말렸어야 했다고!! 내가 미쳤지. 월드 클래스고 나발이고. 애초에 야구가 불가능한 팀에서 무슨 야구를 하겠다고. 그냥 다저스에 남아서 우승 반지 잔뜩 모으고 사이 영도 좀 타고 그랬으면 너클볼 배우겠다는 애들이 줄줄이 생겼을 텐데.
‘진정하세요. 습습후후. 숨 좀 고르시고. 릴렉스. 경기 이제 고작 1회입니다. 아직 1점도 안내줬고요.’
-그러니까 이제 고작 1회인 게 제일 문제거든!!
타석을 향해 양키스의 5번 타자. 리암 루카스가 걸어왔다.
< 플러스? 마이너스? (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