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44화 (145/287)

< 플러스? 마이너스? (2) >

“얘들아 그거 봤어?”

“뭐?”

“조이 제임슨 인스타 라이브!!”

“왜? 뭐 특별한 이야기라도 있었어? 시즌 7 시작하려면 아직 다섯 달이나 남았잖아.”

“아니, 그거 말고. 이번에 보스턴에 온다고 하던데?”

“엥? 보스턴? 보스턴은 왜? 뭐 촬영 일정이라도 있는 거야?”

인기 시트콤에 중간에 조연으로 들어가는 경우 다음 시즌을 장담하기 힘든 것이 보통이다. 설사 다음 시즌을 보장받는다고 해도 기존 배우들의 인기를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조이 제임슨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시트콤의 시즌 1 때부터 열렬한 팬이었던 그녀는 그 시트콤에 마치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려 들었다. 물론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적절한 배역도 크게 한몫을 했다.

게다가 시트콤이 쉬는 기간에 찍은 영화도 나름대로 흥행을 했다. 아직 탑급의 배우는 아니지만, 탑급 배우를 향해 차근차근 필모를 쌓아간다는 이미지를 가질 정도는 됐다.

무엇보다 그녀는 SNS를 누구 못지않게 영리하게 활용할 줄 아는 스타였다.

“보스턴 레드삭스 경기를 보러 온다고 하는데?”

“뭐? 조이 제임슨이 우리 팀 경기를? 그녀도 보스턴 팬이래?”

“아니, 아직 그건 아니고. 이번에 영입된 친구 있잖아. 성민? 그 친구랑 LA에서 친분을 꽤 쌓았다네. 초대 받고 온다는데?”

“맙소사. 그러면 개막전 시구를 그녀가 하는 건가?”

“아니, 그건 또 아니라네.”

“대체 왜?”

***

슈퍼 킹 사이즈 침대 위. 한바탕 일을 끝낸 성민이 조이 제임슨에게 말했다.

“아까 했던 이야기 말인데, 내가 친구로서 해주는 조언인데, 그러지 않는 게 더 좋을 거야.”

“대체 왜?”

“생각을 좀 해봐. 네가 인지도 있는 스타인 건 맞지만, 야구팬은 아니잖아? 뭐 평범한 경기라면 크게 상관이 없겠지. 하지만 내일 경기는 무려 개막전이야. 상대도 상대고. 보스턴 팬중에서도 진짜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할 거란 말이지. 여기서는 네가 굳이 시구자로 올라가는 것보다, 그냥 SNS를 통해서 야구를 보러 왔다는 홍보를 하는 게 네 이미지에 더 도움이 될걸? 괜히 남의 축제에 자기 인지도 올리려고 숟가락 얹는 느낌보다는 말이지.”

“흐음······. 하지만 화제성에서 시구자로 가는 거랑 그냥 경기 관람 가는 거랑은 비교가 안 되잖아.”

“하지만 조이 네 목적은 단순히 화제성이 아니잖아. 이미지 관리 측면에서 보면 이게 더 멋지지. 생각해봐. ‘물론 제의는 받았지만, 야구인들이 겨우내 기다려왔던 시작을 이제 막 야구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제가 여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차피 시즌은 길고 기회는 많을 겁니다.’라고 네가 이야기를 해준다면 보스턴의 야구 바보들이 대체 너를 어떻게 생각할지. 단순히 개막전 시구를 통해 ‘아, 저런 연예인이 있구나.’ 하는 것보다 훨씬 호감이 될걸?”

조이 제임슨이 잠시 고민했다. 다 맞는 이야기인 것 같다. 하지만 이 남자 말을 너무 잘한다. 뭔가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면 말릴 것 같은 기분이다.

“자, 그러면 일 이야기는 이쯤 했으면 됐고, 이제 2차전 해야지?”

“벌써?”

“우리 거의 한 달만이잖아.”

하지만 고민할 시간 따윈 없었다. 성민의 몸이 다시 조이 제임슨을 타고 움직였다. 얇은 지방 아래 옹골차게 들어찬 근육들이 자신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역시, 엘리트 스포츠 선수는 다르다. 겉보기엔 그럴싸한 배우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의 주전 쿼터백을 사귈 때나 느꼈던 감각, 아니 그 이상으로 대단한 감각이 그녀의 부교감 신경계를 극도로 활성화했다.

짐승과도 같은 신음성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보통의 아파트였다면 민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았다. 플로리다에 위치한 특급호텔의 최상층. 완벽한 방음장치가 그 소리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줬으니까.

***

“휴······.”

“왠 한숨이야.”

“개막전 때문에.”

“왜? 그날 무슨 일이라도 있어? 경기 보러 못 가? 양키스랑 개막전인데? 너 작년에 우리 포스트시즌 탈락했을 때, 양키스 경기마다 찾아가서 반대팀 응원했었잖아.”“그랬지. 근데 차라리 다른 팀 경기면 속이라도 편하지. 나 왜 개막전 날 아무 일도 없는걸까? 그게 참 큰 문제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못 보는 것도 아니고 경기를 보러 가는 게 뭐가 문제라는 거야?”

“빌어먹을. 가봤자 스트레스만 잔뜩 받을 게 뻔하니까 그렇지.”

최근 4년.

보스턴 레드삭스는 홈 개막전에서 승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위닝 시리즈는 7년 전이 마지막이다. 심지어 작년에는 아예 스윕패를 당했다.

“그래도 올해는 다르지 않을까? 시범 경기 성적 괜찮잖아.”

“시범 경기 성적은 작년에도 나쁘지 않았었거든?”

“게다가 성민도 있잖아. 그 친구 공 엄청 좋지 않아? 양키스 상대로 성적도 대단하고. 시범경기 성적 보니까 컨디션도 좋던데?”

“확실히 그건 기대해볼 만한 부분이긴 하지. 그런데 너 성민이 등판했던 마지막 시범 경기 봤잖아. 5이닝 동안 에러만 3개를 하는 거. 아무리 투수가 대단하면 뭐 하냐. 야수들이 공을 잡아야지. 이 빌어먹을 팀은 매일 유망주 육성이다 뭐다 하면서 내야진을 뒤흔들어. 이러니까 제대로 된 수비가 될 리가 있나. 작년에 FA로 영입했던 삼루수 걔 잘했었잖아. 근데 매튜 쿠퍼? 그래, 뭐 재능이 있는 건 좋아. 하지만 아직 한참 더 경험을 쌓아야 할 나이잖아. 덜커덕 주전 삼루수라니. 어휴.”

“그래도 빠따는 괜찮잖아. 이번 시범 경기 시즌에 홈런만 세 개를 쳤어.”

“그걸로 용서가 안 되는 수비니까 그렇지. 게다가 난 원래 공갈포 안 좋아해. 알잖아.”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20년 지기 친구의 분노.

그가 물었다.

“그래서 개막전 안 보러 갈 거야? 나 혼자 가?”

“젠장!! 내가 그게 됐으면 진작에 야구를 끊었지!! 갈거야!! 간다고!!”

***

[김성민. 개막 1차전. 양키스와의 경기 선발 출장!!]

[작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 킬러의 면모를 과시했던 김성민!! 과연 이번에도 그 모습을 이어갈 수 있을까?]

[제임스 힐(배우) ‘성민은 환상적인 투수. 지난겨울 그의 영입 소식을 들은 이후로 지금까지 오직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성민이라면 충분히 빌어먹을 양키스 놈들 엉덩이를 걷어차 줄 수 있을 것이다.’]

-와, 성민이 인맥 미쳤네. 헐리웃 배우들이랑 친하다고 하더니. 조이 제임슨은 성민이 때문에 경기 직관 간다고 그러고. 게다가 제임스 힐이면 오스카도 탔던 배우잖아. 저런 배우도 친한 거야?-

-제임스 힐은 개인적으로 친한 건 아닐걸? 그냥 쟨 원래 보스턴 빠돌이로 유명한 배우잖아. 쟤 생방으로 진행되는 토크쇼에서도 양키스 욕했던 애임. 내가 보기엔 저 기사도 기자가 순화해서 기사 쓴 걸 수도 있어 ㅋㅋㅋ-

-그나저나 강진호 이후로 이런 선수가 또 등장할 줄이야. 국뽕이 막 차오르네.-

-에이, 아직 거기까진 좀 이르지. 기껏해야 2년 차 투수인데. 게다가 나이도 있어서 강진호처럼 명전급 선수로 남긴 힘들걸? 선수 전성기 보통 27세부터 33세 보는데 성민이 올해로 33살이잖아.-

-모르면서 아는척 ㄴㄴ함. 그거 일단 만 나이로 27세부터 33세니까 아직 2년 남았고. 성민이 너클볼 투수임. 필 니크로는 40대 이후로 121승 했음.-

-그거야 그 시절 이야기 아님? 게다가 성민이는 속구 비율도 무시할 수 없어서. 솔직히 다른 느린 너클볼 꾸역꾸역 던지는 투수들처럼 롱런이 될지는 좀 의문이지.-

-응, 아니야. 마찬가지로 빠른 너클볼 던지던 R.A 디키는 38세 사이 영탔음 ㅅㄱ염-

-작년에 성민이 뛰던 거 생각하면 좋은 결과 생각해도 충분함. 솔직히 작년 디아고 헤밍턴이 커리어 하이 쓰면서 미쳐 날뛰어서 그렇지, 최근 3년 이내로 보면 성민이 어느 리그를 가더라도 사이영 탈만한 성적이었음.-

-늘서에서 좀 던졌던 투수인 건 잘 알겠는데, 알동은 다르지. 거기다가 양키스 핵빠따 몰라?-

-월드시리즈 16이닝 2득점 타선 어서 오고. 너희들이 그렇게 물고 빠는 양키스 에이스 욘 마르테가 늘서 타자들한테 어떻게 쥐어 터졌더라?-

보스턴

펜웨이 파크.

1912년 4월 15일 타이타닉호가 침몰되고 정확히 닷새 이후 완공됐던 이 건물은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늙어갔다. 대부분 구단이 기존의 집을 버리고 새 집으로 이사를 택할 때, 보스턴의 보수적인 고집쟁이들은 그 선택을 거부했다.

3억 달러.

어지간한 신축 구장을 충분히 지을 돈을 동원해 그들은 그 낡은 집을 꾸역꾸역 보수했다. 그러나 1910년대에 지어진 낡은 구장이다. 골조부터 내부구조까지. 애초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만족했다.

42구역 37열 21번. 낡아빠진 녹색 의자 사이. 그들이 자랑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타자 테드 윌리엄스를 기념하는 새빨간 의자를 그들은 사랑했다.

고작 90미터짜리 홈런도 가능하게 만들어진 페스키 폴. 11미터짜리 거대한 녹색 장벽 그린 몬스터. 심지어 이제는 구장에 선명한 LED 전광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린몬스터 담장 뒤에서 3명의 구단 직원을 동원해 스코어보드를 손으로 업데이트한다.

변화를 거부하는 고집불통들의 성지. 아시아에서 온 에이스가 마운드 위에 섰다.

123년 전이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광경. 관중석을 가득 메운 보스턴의 팬들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들의 에이스를 지켜봤다.

-시간이 지나도 여긴 도무지 변할 생각을 하지 않는군. 하여간 고집불통들이라니까.

‘뭐, 그래도 생각보다는 깔끔하던데요? 전 청주 정도 생각했는데 말이죠.’

-아무리 그래도 거기랑 비교하기엔······. 여기 1년 관리비가 그 구장 리모델링 비용 정도는 될거다.

‘하긴, 관리비가 좀 많이 들것 같이 생기긴 했더라고요. 참나, 21세기 들어선 지도 30년이 더 지났는데 스코어 보드를 담벼락 뒤에서 구단 직원 셋을 동원해서 손으로 업데이트하다뇨.’

비효율의 극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효율의 극치가 만들어내는 이 기묘한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분명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를 진행했던 제트블루 파크 앳 펜웨이 하우스도 이곳 펜웨이 파크와 그라운드의 구조 자체는 똑같았다.

하지만 느낌이 다르다.

1만 석을 조금 넘겼던 그곳과 달리 3만7천 석이나 되는 규모 때문일까?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하지만 그보다는 3만7천 석을 가득 메운 팬들의 상기된 표정 때문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4년 내내 개막전에서 패배했음에도, 여전히 개막전 날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경기장을 찾아오는 멍청이들.

‘마음에 드네요.’

-뭐가? 스코어 보드를 손으로 업데이트하는 게? 그 비합리적인 짓이?

‘뭐, 그것도 나름 로망이 있긴 하죠. 애초에 시커먼 남자 18명이서 공놀이하는 거 보려고 수백 달러씩 쓰는 것 자체가 비합리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저 얼굴들이 생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작년 다저스처럼 경기장에 가족끼리 찾아와서 하하호호 긴장감 없이 경기를 보는 쪽이 더 생소하다면 생소했다.

성민은 저런 표정들을 똑똑히 기억했다.

25년 전. 어머니 손을 꼭 붙잡고 사직으로 찾아갔을 때 그의 표정이 저러했으니까.

4월 7일.

태평양을 건너 온 매운맛 전문 투수가 빨간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 위에 섰다.

1명의 도우미와 7명의 머저리를 대동한 채로.

< 플러스? 마이너스? (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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