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40화 (141/287)

< 단합(2) >

성민이 요즘 자신과 함께하는 맥스 슈피겐이 아닌 루카스 버튼에게 이야기를 한 이유는 간단했다.

-멍청한 사람보다는 적당히 똑똑한 사람이 다루기 더 쉽다 그런 이야기겠지?

“이제 좀 말이 통하네요. 맥스 그 녀석 같은 경우는 어디로 튈지 몰라요. 보통은 멍청한 생각을 하지만, 가끔 상상을 초월하게 멍청한 생각도 하거든요. 하지만 루카스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생각이라는 걸 하고 가장 적절한 걸 선택하려고 노력하죠. 예측이 가능한 녀석이죠.”

그리고 루카스 버튼이 정확히 성민의 예상처럼 움직였다.

“그러니까 프런트에서 아주 작정을 한 거야. 그러니까 굳이 우리가 아니라, 새로 들어온 녀석들이랑 신인들 위주로 사인회를 내보내는 거지. 그것도 여기까지 찾아 온 골수팬들에게 말이야.”

“그걸 성민이 알려줬다고? 대체 왜?”

“정확히 말을 들은 건 아니지만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이런게 아닐까 싶어. 성민은 2년 계약이잖아. 거기다가 나이도 이제 30대 중반을 향해가고 있고. 자기 전성기를 그런 쓸데없는 힘 싸움으로 낭비하기 싫다 뭐 그런 게 아닐까? 그러니까 프런트한테 놀아나지 말고 그냥 우리끼리 잘 해보자 뭐 그런 의사 표현이겠지.”

루카스 버튼의 이야기에 랄로 가야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경험적으로 봤을 때, 보통 이런 복잡한 이야기는 루카스 말이 다 맞더라.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럴 거야. 솔직히 우리 중에 제일 똑똑하잖아.”

“크, 랄로 저 자식은 하여간 멍청한 주제에 이럴 땐 꼭 맞는 말을 한다니까. 나도 찬성.”

“뭐 너희들이 다 찬성이라면 나도 찬성.”

“에두아르도 씨는요?”

펍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에두아르도가 멋쩍게 웃었다.

“아니, 나야 당연히 찬성이지. 그나저나 좀 미안하네. 솔직히 나도 구단에게 제안을 받긴 했는데 그런 생각일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거든.”

“미안은 무슨. 하나도 안 미안해도 됩니다. 고작 저런 이야기에서 그런 음흉한 속셈까지 파헤치는 건 루카스 같은 미친놈들이나 가능한 거에요. 보통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간다고요.”

“맞아요. 존 맥도웰 그 음흉한 대머리 자식. 야비함만 늘어서는. 이봐 루카스. 네가 앞으로도 좀 고생해줘. 왠지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야비한 짓거리들을 저지를 것 같으니까.”

루카스 버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한테 맡겨두라고.”

***

“뭐라고? 정말 그렇게 참가를 한다고?”

옆 통수와 뒤통수에만 파릇한 자국이 돋아있는 보스턴의 단장 존 맥도웰이 깜짝 놀랐다.

“네.”

“와우, 설리번. 정말 놀랍군. 아니, 자네가 선수들과 제법 괜찮은 관계라는 건 알았지만 이건 정말이지 상상 이상이야. 대단해.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거야?”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맥도웰의 목소리에서 감탄이 느껴졌다.

“마법은 아니고요. 조금 전 김성민 선수를 설득하려는데 그렇게 될 경우 메이저에 데뷔도 못 한 선수들이 자신과 에두아르도 선수에게 묻혀서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차라리 어느 정도 인지도 있는 선수들이 나오는 게 어떻겠냐고요.”

“그 내용은 2시간 전에 나한테 메일로 보냈잖아. 그건 이미 읽었다고. 지금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대체 다른 선수들을 어떻게 설득 한 건지야.”

“그게 김성민 선수 쪽에서 직접 설득을 해주겠다고 하더니 불과 몇 시간 만에 일이 이렇게 진행이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구단주 그룹과 미팅하는 그 잠깐 사이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뭐 그런 이야기야? 맙소사. 성민은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보고대로라면 지금 그룹에서 그를 따르는 선수는 맥스 슈피겐 뿐이라고 했는데 분명.”

작년 보스턴의 성적이 폭망했던 가장 큰 이유는 팀내 불화였다. 한 번 그런 일을 경험한 이상에서야 그걸 예방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힘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

존 맥도웰은 총 세 명의 사람에게 팀 내 분위기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보고에서 성민이 다른 선수들과 깊숙하게 교류를 나누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존 맥도웰이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설마 에두아르도랑 성민이 일을 주도하는 건가? 아니지. 그렇다고 보기에는 이번에 참여하는 선수들은 에두아르도와 그리 친하지 않은 선수들까지 포함돼있잖아. 게다가 에두아르도는 별 반발 없이 원안에 고개를 끄덕였었다잖아. 대체 뭐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부분에서 일이 벌어진다는 점이 존 맥도웰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내 찝찝함을 털어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어차피 내가 할 일은 선수단을 구성하는 거잖아. 나쁜 일이 발생할 것 같다면 적극적으로 막아야 하지만, 알아서 잘 굴러가는 데 굳이 상관할 이유는 없지. 게다가 애초에 감독이고 코치고 그런 거 하라고 있는 거잖아?”

***

지난 시즌.

보스턴이 콩가루였다는 사실은 야구에 관심이 있는 팬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 BP권과 팬사인회 행사에 초대받은 팬들은 그냥 야구에 관심이 있는 팬 정도가 아니었다.

시즌권을 보유한 평균적인 기간만 30년. 그중에는 부모부터 해서 대대로 시즌권을 물려받아 70년 이상 시즌권을 보유한 팬도 드물지 않았다. 인생의 평생을 보스턴 레드삭스와 함께한 사람들인 셈이다.

“망할 새끼들. 내가 야구를 평생 봐왔지만, 요즘같이 엉망진창인 적이 없었어.”

“이봐 너무 큰소리 내지 말라고. 그러다가 손주들 깨면 어쩌려고 그러나. 게다가 여기까지 이렇게 왔는데 이왕이면 좋은 모습만 보여줘야지.”

“손주들한테 좋은 거 보여주는 건 보여주는 거고. 존 맥도웰 그 자식은 말이야. 팀에 중심이 되는 선수까지 죄다 팔아치우고 하위권 전전하면서 유망주만 끌어모으더니, 그 결과 좀 보라고. 아주 엉망진창이잖아.”

“아니, 그래도 작년에 영입했던 친구들도 성적은 제법 쏠쏠했고, 올해도 결과로 보면 트레이드를 제대로 못한 건 아닌······”

“그게 아니라 팀에 중심이 없잖아. 중심이!! 아무리 리모델링이라고 해도 팀의 정신을 이어갈 기둥은 남겨놨어야지. 기둥뿌리까지 다 뽑았으니 뭐가 남아나겠어? 작년에 팀내 불화가 그랬던 것도 팀에 중심이 될 선수가 아예 없어서 그랬던 거잖아.”

“뭐, 확실히 작년은 그랬지. 하지만 그래서 올해는 빅네임들을 영입했잖아.”

“빅네임? 에두아르도 크루즈야 뭐 그렇다고 치자고. 아직 조금 어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빅네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친구니까. 하지만 성민? 이봐. 작년 성적이 좋긴 했지만 이제 고작 1년 뛰었던 선수야. 게다가 지금 팀에 필요한 건 팀을 이끌어갈 수 있는 베테랑이라고. 고작 1년짜리 선수를 다른 선수들이 얼마나 존중하겠어!!”

***

팬 사인회는 정확히 팬 사인회라기 보다 팬 미팅에 가까운 형태로 진행됐다. 팬들은 평소 선수들에게 궁금했던 부분을 미리 질문으로 제출했고, 사회자는 추첨을 통해 그 질문을 선수들에게 물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김성민 선수에 관한 질문이군요. 팀에서는 그를 어떻게 대접하느냐. 2년 차의 루키로 대접하는가, 아니면 베테랑으로 대접하는가 하는 질문이네요.”

사회자의 질문에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먼저 마이크를 들었다.

“이건 제가 먼저 말씀드리고 싶네요. 성민의 커리어요? 아 물론 그의 메이저 커리어는 1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단순한 메이저 2년 차의 선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외국의 프로리그에서 11년을 뛴 베테랑이고, 메이저에 오자마자 자신이 메이저 최정상급의 실력자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줬습니다.”

“맞아요. 팀 훈련에서 성민이 보여주는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죠. 그는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닙니다만 가장 믿음직한 동료입니다.”

“그를 인정하는데 필요했던 시간이 얼마였는지 아십니까? 공 하나. 그거면 충분했습니다. 우리는 최고의 에이스를 얻었다고 단언합니다.”

-어? 쟤들 갑자기 왜 저러냐?

선수들의 대답에 필 니크로가 잠시 당황했다.

‘말했잖아요. 원래 단합에 가장 좋은 방법은 공공의 적을 만드는 거라고.’

-그래서, 어제 네가 루카스에게 그런 말 좀 했다고 저렇게 바뀐다고?

‘뭐, 쟤들 입장에서는 굳이 자기들을 선택할 필요가 없는 제가 프런트와의 마찰을 각오하고 자기들을 배려해준 셈이니까요. 고마울 만하죠.’

-와, 뭐 이런 사기꾼이?

‘사기라뇨. 솔직히 프런트 입장에서도 저한테 고마울겁니다. 걔들로서는 지들이 악역이 되건 말건 어떻게 해서라도 선수단이 하나가 되면 만족할걸요?’

-아니, 그야 그렇지만. 그런데 나중에라도 그게 사실이 아닌 걸 알게되는 건 걱정 안되는 거냐? 네가 수작 부린 게 걸리면 어쩌려고.

‘수작이요?’

-아니, 그 뭐 공공의 적이라느니 그런 거 말이야.

‘에이, 그게 뭐 어디 제가 한 일입니까? 전 그냥 사실만 이야기했고, 루카스가 멋대로 오해한 거죠. 저야 그냥 구단이 이런 걸 제안하길래 더 좋은 걸 제안했고, 그런 제안이 오고 갔다는 걸 루카스에게 알려준 것밖에 없는걸요.’

-이런 무서운 녀석 같으니.

행사가 계속해서 진행됐다. 질답이 늘어날수록 진 설리번은 고작 3주 남짓한 시간만에 선수들을 완벽하게 사로잡은 성민, 그리고 에두아르도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작년 베테랑이라는 선수들이 1년 동안 해도 되지 않던 일이다. 그런데 그걸 고작 3주 만에 해내다니.

작년의 그 처참했던 성적이 순수하게 팀의 전력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진 설리번은 저렇게 하나로 똘똘 뭉친 선수들이 만들 성적에 기대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나를 보는 눈이 사나운 거지?’

딱히 그녀에게 뭐라 안 좋은 이야기를 하는 선수는 없었다. 하지만 원래 대화라는 것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커다란 것이 비언어적 표현이다.

‘뭐, 그냥 착각이겠지.’

질답 시간이 끝나고 시작된 사인회.

아시아계 아이 하나가 할아버지의 손을 이끌고 성민에게 가장 먼저 달려왔다.

“성민!! 저 여기 사인해주세요.”

성민의 등 번호가 마킹된 보스턴의 저지였다. 한국에 있던 시절에도 아이에게는 유달리 친절하던 성민이다. 성민이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그래, 할아버지랑 함께 온 거야?”

“네!!”

“야구는 원래부터 좋아했고?”

“아뇨. 원래 야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유명한 동양인 선수가 보스턴 레드삭스에 왔다고 해서 영상들을 보고 팬이 됐어요.”

“그래, 이 형이 멋지게 활약해줄테니까 앞으로도 계속 응원해야 한다.”

“네!!”

아이의 할아버지가 성민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내 평생 손자와 야구경기를 보러 다닐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고맙네.”

“아닙니다. 사인은 어디에 해드릴까요?”

“아니, 난 그 에밀리오의 팬이라서.”

“아, 네.”

“하지만 오늘 선수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크게 기대가 되더군.”

“감사합니다. 기대에 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죠. 연말 즈음에는 저한테도 사인받으러 오실 수 있도록 말이죠.”

“나도 그렇게 되길 기도하지.”

< 단합(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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