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39화 (140/287)

< 단합(1) >

성민은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예쁜 여자를 참 많이 만나봤다. 그 중에는 누가 봐도 예쁘다고 인정할만한 사람들 역시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여자들과 비교해도 크게 부족하지 않은 미모의 소유자가 나타났다.

픽시컷으로 자른 더티 블론드의 머리. 170은 돼 보이는 훤칠한 키에 단단한 몸매. 서양인 특유의 또렷한 이목구비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뤘다. 헐리웃에서 각종 파티를 다니면서 봤던 여러 모델이나 배우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미모였다.

“그렇게 돼서 그런데 부탁 좀 드릴게요.”

게다가 그런 모델이나 배우들과 조금 달랐던 점은, 그녀는 자신의 미모를 무기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연예인이나 모델들이 무기로 삼는 것은 의외로 미모 그 자체보다는 유명세다. 어차피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잘생기고 예쁘다. 그들의 진짜 권력은 그 미모를 통해 쟁취한 유명세에 있지 미모 자체에 있지 않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힘이 된다. 보스턴의 홍보팀장인 진 설리번은 자신의 그 미모를 활용할 줄 아는 영리한 여자였다.

게다가 부탁 역시 그리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다. 팬 사인회 참가. 그것도 보스턴의 코어팬들을 대상으로 한 팬 사인회다. 이건 성민 본인에게도 제법 괜찮은 제안이었다.

필 니크로가 생각했다. 이 녀석은 이걸 무조건 받아들이겠구나.

지금까지 성민과 함께 하면서 그도 성장이라는 것을 했다. 단순히 미인이라는 이유로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분석한 성민의 성향은 어지간하면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넘어가려하지 척을 지려하지 않았다. 거기에 자기에게 득이 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성민이 이번 일을 거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네?”

-어?

진 설리번의 눈이 똥그랗게 커졌다. 필 니크로 역시 당황했다.

-야, 성민아 이걸 거절한다고? 설마 너 저렇게 생긴 스타일 싫어하냐?

‘아니, 갑자기 무슨 헛소리입니까. 여기서 외모 이야기가 왜 나와요.’

-아니, 그러니까. 굳이 여기서 저걸 거절할 이유가!!

‘몇 가지 되죠.’

-어? 몇 가지나 된다고?

진 설리번이 마음의 동요를 누르고 침착하게 웃으며 말했다.

“성민 선수, 혹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성민 선수는 저희 팀에서 매우 중요한 선수잖아요. 계획 따위 성민 선수에 맞춰서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해요.”

진 설리번이 성민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향.

마치 꾸미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 청바지와 하얀 티셔츠 그리고 검은 블레이저가 인상적이다. 생각이 없는 남자라면 속아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성민은 달랐다. 그는 매주 우먼 주간을 읽는 남자다.

이건 전형적인 꾸민 듯 안 꾸민 듯 패션이다. 하지만 절대 꾸미지 않고서는 저런 핏이 나올 수 없다. 애초에 옷 자체가 그녀의 장점인 흉부 그리고 폭발할 것 같은 둔부를 강조하는 옷이다.

대부분의 순진한 남자들은 여기서 굳거나 혹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물론 성민은 달랐다. 오히려 한걸음 성큼 다가갔다. 지금 막 훈련을 끝낸 남자의 체향이 물씬 풍겨왔다.

남성의 체향에 관한 대학 연구가 있다.

세상 모든 쓸데없는 연구가 그렇듯 이것도 영국산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이건 호주산이다. 뭐 크게 보자면 영연방이니 다를 건 없을 수도 있다.

어찌 됐건 그 연구에 따르자면 잘생긴 남성일수록 여성은 그 남성의 체향을 좋은 냄새라고 느낀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블라인드 테스트, 그러니까 남자의 땀을 묻힌 티셔츠만으로도 몇몇 경우 남자의 체향을 향긋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존재했다.

이후 쓸데없이 많은 연구비와 대학원생들의 피땀, 그리고 시간이 들어간 그 연구의 결과는 결국 식습관이었다. 많은 경우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는 남자의 체향에서 달콤함을 느꼈으며 단백질이 풍부한 식단의 경우에도 매력을 느끼는 여성이 많았다. 별로라는 평가를 들었던 체향은 주로 빵이나 파스타 같은 탄수화물 위주의 식단에서 나타났다.

성민은 잘생겼다.

게다가 최근 옆에 들러붙은 귀신으로 인해 식단조절까지 매우 빡빡하게 하고 있다. 시원한 향수와 섞인 성민의 체향에 진 설리번의 얼굴이 순간 달아올랐다.

“글쎄요, 일단 기획 자체는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요. 이거 팀장님이 직접 생각하신건가요?”

“네. 그렇죠. 아무래도 저희 보스턴 레드삭스는 충성도가 높은 팬들이 많은······.”

진 설리번이 열정적으로 이번 이벤트에 대해 설명을 했다. 성민이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해주었다. 언제나 그렇듯 겉으로 보기에 성민은 완벽에 가까운 청자였다.

-대체 거절할 이유가 뭐야? 좀 들어나 보자.

‘우선 저거 기획대로만 하면 별로 안 좋아요.’

-응? 뭐가? 뭐가 안 좋다는 거야?

‘지금 저랑 에두아르도가 생각하는 팀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요.’

-왜?

‘생각을 해보세요. 보스턴 출신 유망주들에 저랑 에두아르도 묶어서 패키지로 내놓는 이벤트잖아요.’

-애송이들과 FA선수의 조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나쁩니다. 아주 나빠요. 이거 양극단의 선수들만 내놓는 거잖아요. 간신히 에두아르도를 중심으로 팀을 하나로 묶어놓고 거기에 붕 뜨는 극단의 녀석들을 제가 따로 컨트롤 하려는 찰나에 이렇게 되면 에두아르도를 다시 FA선수들의 대표 같은 느낌으로 바꿔버리잖아요.’

-그렇군. 하지만 그거야 네가 거기에서 충분히 말빨로 해결할 수 있는 거 아니냐?

필 니크로가 날카롭게 성민의 말에 반박했다. 녀석과 함께 한지도 어언 3년. 그 정도는 파악했다. 성민이 내심 감탄했다. 이 정도에는 이제 설득이 되지 않는다 이건가? 역시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게다가 솔직히 저랑 에두아르도한테만 요청이 밀려 들어올 건데. 귀찮잖아요. 다른 애들 중에는 괜히 급에 안 맞는 사람 나왔다고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애들도 생길 수 있고요.’

-아!!

성민이 진 설리번에게 답했다.

“그렇군요. 역시 입안자답게 많은 부분을 생각하셨네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조금 걱정되는 부분은 역시 이런 구성으로 나가게 되면 저나 에두아르도 쪽에 사람들이 조금 심하게 쏠리지 않을지가 걱정되네요.”

“아!! 확실히 그렇게 되면 성민 선수나 에두아르도 선수가 좀 피곤해지실 수가······.”

“아뇨, 피곤하지는 않을 겁니다. 애초에 팬 서비스 조금 해주는 게 힘들 리 없죠. 그냥 걱정되는 건 다른 선수들이 좀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진 설리번이 감탄했다. 이런 반듯한 마음씨라니.

기본적으로 사람이 됐다.

“확실히 그 부분은 저희도 고려했지만 그래도 행사의 성격을 감안했을 때 코어 팬들이 자팀의 유망주들을 소홀히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아뇨, 그 부분은 괜찮습니다. 문제는 함께 온 아이들이죠. 야구를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자기 팀 선수에 대해 설명을 해줄 때, 아직 메이저에도 못 뛰는 선수들을 설명했을까요, 아니면 유명한 선수들을 설명했을까요. 그리고 아이들은 순수하지만 그렇기에 잔인하죠.”

설득력이 있다.

진 설리번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이렇게 포장한다고?

‘포장이 아니라 그냥 조금 관점을 다르게 보는 겁니다.’

-그래, 귀찮은 건 그렇다 치자. 아까 이유가 여러 개라고 했는데 또 다른 이유는 대체 뭐냐.

‘이 여자 자기가 예쁜 걸 전략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여자예요. 다루기 편한 타입이죠. 그렇다면 굳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주기 보다는 제가 원하는대로 움직이는 편이 낫잖아요?’

-잠깐만, 전략적인 사람인데 다루기 편하다고?

‘당연하죠. 원래 아예 머리를 안 쓰는 인간만큼 다루기 힘든 인간이 없어요. 어떻게 튈지를 모르잖아요. 적당히 머리를 쓸 줄 알아야 생각이라는 걸 하고 움직이죠. 보통 이런 여자일수록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는 제스쳐를 주면 정말 단순하게 움직이거든요.’

-그게 무슨? 아니 잠깐만. 근데 관심 있다는 제스쳐를 주는데 어째서 싫다는 것으로 시작한 거냐?

‘어휴, 원래 예쁜 여자들한테는 특이해 보이기 위해서 일단 거절부터 하는 게 국룰이잖아요. 여자들도 이제는 자기한테 관심 있으면 그러는 거 다 안다고요.’

-그걸 다 안다고?

진 설리번이 성민에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선수단의 구성에 대한 부분은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유망주들보다는 그래도 메이저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선수들 위주로 구성하는 편이 훨씬 좋겠군요.”

“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큰일이네요.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많이 복잡해지겠어요. 아직 빅리그 콜업 안 된 선수들이야 이런 행사에 초대해준다면 기꺼이 받겠지만, 기존 선수들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성민이 답했다.

“제가 도와드리죠.”

“네? 도와주신다니. 아니에요.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뇨, 애초에 제 이야기 때문에 기획도 바꾸신 거잖아요.”

“하지만······.”

“뭐 알아 온 기간은 설리번 양이 더 길겠습니다만, 선수들에게는 선수들 간의 끈끈함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

“그게 진짜입니까? 프런트에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고요?”

“그래, 아직 메이저에 데뷔하지 못한 ‘신인 선수’들과 나, 그리고 에두아르도를 묶어서 팬 사인회를 열 계획이었다고 하더라.”

루카스 버튼이 인상을 찌푸렸다.

몇 주 전. 성민은 그에게 작년 부딪혔던 두 세력 중에서 베테랑들 위주로 팀에서 정리된 것을 기뻐하지 말라고 일갈했었다. 진짜 위험한 건 바로 너희들이라고. 너희가 여기 남은 것은 단순히 똥값이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지금.

프런트에서 앞으로 팀의 주춧돌이라고 생각하는 ‘두 선수’와 신인 선수들만으로 팬 사인회를 열 계획이다? 굳이? 현재 팀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선수들이 아니라?

“정말 우리를 정리할 생각이로군요.”

“글쎄, 내가 이 자리에서 그것까지는 확언하기 힘들지. 프런트에서는 일단 스프링 트레이닝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보스턴의 ‘미래’들과 이번에 영입된 빅네임을 보여주는 행사를 하겠다는 계획이라고 말을 했었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 적당히 잘 무마했어. 아무래도 그건 기존 선수들을 너무 배려하지 않는 모습이 아니냐고. 그리고 난 성적을 원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선수들과 더 화합이 되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했지.”

필 니크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대체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설마 진짜 프런트에서 그런 의도로 행동한 거야? 아니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너에게 기존 선수들의 섭외를 부탁했잖아.

‘어휴, 영감님. 이제 좀 척하면 척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뭐가?

‘단합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게 뭡니까.’

-단합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거?

‘적이잖아요. 적!!’

-어, 너 설마?

‘그리고 단합하기에 가장 좋은 적은 원래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윗 대가리들이죠.’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필 니크로가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했다.

< 단합(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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