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3) >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던데? SNS에서 뭐 엄청난 유망주들을 주고 검증 안 된 투수를 데리고 왔네 어쩌네 떠들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당연하지. 내가 뭐라고 했어. 저 녀석 진짜 대단한 녀석이라니까. 작년에 월드 시리즈에서 양키스 후드려 패는거 볼 때부터 내가 알아봤지.”
“아, 저 친구가 그 양키스 후드려 팼던 친구야? 그렇다면 좋은 친구로구만. 양키스 놈들 두들긴 선수치고 나쁜 선수는 없지.”
중년의 백인 둘이 전형적인 보스턴 팬다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경기를 지켜봤다.
시범 경기가 시작한지도 어느덧 닷새. 성민의 두 번째 등판까지 지켜본 보스턴 팬들의 평가는 매우 흡족에 가까웠다.
4이닝 동안 삼진만 무려 8개.
물론 현장에서 FIP이론은 이미 철이 지난 지 오래다. 하지만 본래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면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하는 법이다. 지금 40대 후반부터 60대가 된 보스턴 팬들의 뇌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당시 주류 이론은 FIP이었다.
투수는 BABIP을 컨트롤 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삼진이 많은 투수야말로 진짜 강력한 투수다. 성민은 그런 철지난 이론을 맹신하는 늙은 팬들에게 가장 구미에 맞는 피칭을 보여주었다.
지난번 경기처럼 2이닝을 끝낸 성민이 빠르게 짐을 챙겨 라커룸으로 돌아갔다. 굳이 남아서 경기를 지켜볼 필요는 없었다. 그 역할은 에두아르도 크루즈에게 맡기는 것으로 충분했다.
-마사지 받고 들어갈 거지?
‘당연하죠. 보스턴이 여러 가지 부분에서 다저스보다 못하지만, 마사지 하나는 다저스보다 낫더라고요.’
-조나단 양이라고 했나? 스포츠 생리학을 전공했다고 하더니 확실히 뛰어나긴 뛰어나더군.
간단한 잡담을 주고받으며 라커룸으로 들어갔을 때, 클러비 몇몇이 움직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쯧, 벌써 시작이로군.
‘일주일이면 슬슬 시작할 때 됐죠. 그래도 오늘 경기도 아직 제대로 안 끝났는데 좀 빠르네요.’
-어제 경기 결과 가지고 지금 움직이는 거겠지. 어차피 네가 봐도 심각하던 녀석 몇몇 있었잖아.
‘하긴, 그렇긴 했죠.’
아직 메이저에서 뛸 준비가 되지 않은 미숙하기 짝이 없는 유망주 하나와 도저히 빅리그에서 뛸 신체 능력이 되지 않는 과거가 나쁘지 않은 늙은 베테랑 하나의 라커가 비워졌다.
특별한 감흥은 생기지 않았다. 작년 처음 봤을 때는 너무 잔혹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형태만 조금 달랐을 뿐, 한국에 있던 시절에도 이런 일, 아니 이것보다 훨씬 잔혹한 일은 비일비재했다.
-마지막을 영광스럽게 끝낼 수 있는 선수는 드문 법이지. 아무리 대단한 선수라고 해도 마지막은 항상 상처투성이인 법이거든.
‘에이, 항상은 아니죠. 영감님은 꽤 괜찮았잖아요. 시작이 너무 늦어서 그렇지 40대에 121승이나 하셨잖아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나도 마지막 1년은 꽤나 처참했다고.
‘그야 힘 떨어진 거 알고도 꾸역꾸역 더 하고싶은 욕심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까.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전 그런 거 없이 쿨하게 은퇴할겁니다. 솔직히 강진호 선수도 멋지긴 했지만 프레스톤 영감님 쪽이 더 쿨했어요. 굳이 추하게 3천 안타 안채우고 2,987개로 끝냈잖아요.’
-흥, 그 녀석이야 반지를 무려 11개나 꾸역꾸역 손에 넣었으니 그런 게 가능했고. 두고봐라. 너도 지금이야 그렇게 쿨한 척 하지만 마지막이 되면 생각이 바뀔테니까.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그러니까 두고 보자고.
성민과 필 니크로가 철없는 티격태격을 거듭하는 사이.
보스턴, 펜웨이파크의 단장 사무실에서도 몇 가지 대화가 오갔다.
털 하나 보이지 않는 완벽한 스킨헤드. 하지만 그 스킨헤드 조차 제법 잘 어울리는 보스턴의 단장 존 맥도웰. 그리고 짧은 숏컷의 더티 블론드.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녀. 보스턴의 홍보팀장인 진 설리번이 그 대화의 주인공들이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시범경기에서 팬 행사를 하자고?”
“네, 아시다시피 저희 팀 같은 경우 장기간 시즌권을 꾸준히 구매해준 팬들이 많잖아요.”
“그야 뭐 당연하지.”
대답하는 존 맥도웰의 얼굴에 자랑이 묻어났다. 그는 전 세계 그 어떤 프로구단도 보스턴 레드삭스만큼 단단한 팬층을 가지지는 못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바로 시즌권이었다. 그의 자신감처럼 실제로 보스턴 레드삭스의 시즌권 같은 경우 구매 자체가 힘든 귀물이었다.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려도 10년 단위로 대기를 해야 하는 일도 적지 않다.
작년에 구매했던 사람에게 우선으로 판매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대를 이어 유산처럼 시즌권을 물려주는 경우도 흔하다. 그리고 그것은 성적이 부진했던 요 몇 년이라고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장기간 시즌권을 꾸준히 구매해주신 분 중 사연을 적어 지원하시는 분만 추첨을 통해 서른 분 정도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의 BP(batting practice)까지 포함된 초대권 두 장. 그리고 선수들과 팬 사인회를 여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물론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시즌권은 꾸준히 팔리기는 합니다만, 팬들에게는 아주 좋은 추억이 될 거로 생각합니다.”
“아니, 시즌권 판매를 떠나서 굳이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 초대권으로 할 이유가 있냐는 말이야. 물론 좋은 추억은 되겠지.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느니 그냥 시즌이 끝난 이후나, 아예 홈경기가 있는 날에 잠깐 BP를 개방하는 쪽이 낫지 않겠냐는 거지.”
존 맥도웰의 이야기에 진 설리번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것도 계획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같은 경우는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의 BP까지 포함된 초대권 두 장이라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저희 시즌권의 경우 보유하신 분들의 평균연령이 53.7세에 달합니다. 이제 손자 손녀를 볼 나이가 대부분이라는 거죠.”
“추첨이라지만 어차피 사연을 통해 뽑는 거고, 어린 팬들을 노려보겠다. 뭐 그런 이야기로군.”
“네, 바로 그겁니다. 게다가 이번 기획의 장점은 팀의 핵심 선수들을 굳이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있습니다. 여기에 지원할만한 코어 팬이라면 저희의 핵심 유망주들 정도는 익히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선수 위주로 사인회를 개최한다면 선수들의 사기에도 도움이 되고 팬들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생각입니다.”
존 맥도웰이 잠시 고민했다.
“홍보 효과 역시 제법 괜찮을 거라고 봅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와 만나는 야구 선수는 그림이 좋죠. 게다가 받아 둔 사연을 분석해서 다른 방식의 효율적인 홍보도 기획해볼 수 있고요. 무엇보다 비용이 매우 적게 듭니다. 저희가 부담할 건 60장의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 초대권. 그리고 팬 사인회를 위한 약간의 준비가 전부니까요.”
“좋아. 이렇게 하지.”
“어떻게?”
“이왕 하는 거 인원수는 50명으로 늘리도록 하자고.”
“네, 그거야 아무 문제 없습니다. 다만······.”
“다만?”
“그 팬 사인회에 유망주들도 유망주들인데 그 이번에 트레이드를 통해 새로 합류한 선수들도 몇 포함이 되면 어떨까 싶어서요.”
존 맥도웰이 고개를 저었다.
“뭐, 그 부분은 자네가 알아서 선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진행할 수 있으면 진행해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
‘아, 이건 진짜 마음에 안 드네요.’
-뭐가?
‘이거 일종의 전지훈련이잖아요. 근데 연습 설렁설렁하는 거요.’
필 니크로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방심왕이 방심을 버린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제는 연습을 설렁설렁 하는 게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소리를 하다니.
‘물론 끝나고 개인 훈련도 하고 이래저래 자기 몸 끌어올리는 게 우선인 건 잘 알겠는데, 아무리 봐도 이 팀은 한국식으로 좀 굴릴 필요가 있어 보인단 말이죠.’
-뭐,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젊은 팀이‘었’다. 그리고 작년 베테랑들을 잔뜩 영입해서 적절한 균형을 맞추려 했지만, 와장창 실패했다.
물론 올해의 경우 팀의 화합은 작년보다는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여전히 몇 가지 부분에서 그런 것은 불합리한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어린 선수들은 있었지만, 작년 그런 생각을 표출시킬 구심점이었던 맥스 슈피겐은 성민과 함께 자기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무엇보다 FA나 트레이드로 영입된 베테랑들과 보스턴 출신의 유망주들 사이에 소통 자체가 없었던 작년과 다르게 지금은 그 유망주들의 한 가운데에 에두아르도 크루즈라는 베테랑을 향해가는 올스타급 포수가 포진하고 있었다.
선수의 발언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커리어만이 아니다. 현재의 폼 역시 그의 입지를 대변한다. 이번에 합류한 선수 가운데서도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폼은 단연 으뜸이었다. 그는 보스턴 출신 유망주들과 FA나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된 베테랑들의 가교 역할을 성민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충실하게 해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시원한 헛스윙.
벌써 4타석 연속 삼진이다.
-그래도 스윙이 시원하기는 하네.
‘작년에 AA에서 39홈런으로 홈런왕 차지했던 놈이라잖아요. 시범 경기도 이제 이주째인데 홈런만 벌써 두 개를 쳤고요.’
-그래, 홈런은 벌써 두 개를 쳤지. 근데 쟤가 이번 시즌 가장 유력한 삼루수 맞지?
‘포텐셜만 다 터트리면 50홈런도 가능할 거포랍니다.’
-근데 그 포텐셜 다 터트리기 전에 감독이랑 내 혈압이 터지겠는데?
‘에이, 2년 전에도 해봤지만 혈압이 터지지는 않았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동엽이만 하려고요. 게다가 쟨 그래도 수비는 동엽이보다 낫잖아요.’
성민의 비교질에 필 니크로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박동엽보다 못하면 나가 죽어야지. 그 녀석은 1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과거 미화가 안 되는 녀석이야.
‘왜요? 동엽이도 그만하면 야구 잘했죠. 걔 그래도 결승 홈런도 꽤 치고 타점도 나쁘지 않았잖아요.’
-네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봤자 녀석이 리그 삼진왕이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시간만 조금 더 줬으면 더 잘했을거예요. 동엽이 작년에 타율 2할 7푼에 26홈런 치고 골글 탔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죠?’
-정확히는 2할6푼7리. 그리고 역대 가장 논란이 많은 골글이었지. 호수비 하이라이트빨로 골글 탔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아주 자자해.
‘와, 역시 마린스 골수팬!! 저보다 걔 이야기를 더 잘 아네요?’
-아니다 악마야!! 그냥 마린스 팬도 아니고 골수팬이라니!!
최근 몇 년 동안 보스턴은 꾸역꾸역 유망주를 긁어모았다. 모두 괜찮은 유망주들이다. 실제로 하나둘씩 터지는 기미가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봐야 어쨌든 메이저에 안착한 선수가 아닌 유망주다. 어딘가 부족한 구석이 한두 군데씩 꼭 보인다. 게다가 몇몇 선수의 경우는 아직 메이저에 오르려면 조금 더 경험이 필요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아요.’
-뭐가? 내가 보기엔 엄청 나쁜데?
‘2년이 다가 아니잖아요. 플러스로 6년이 더 있는데요 뭐.’
성민의 시선이 새롭게 타석에 올라가는 타자에게 꽂혔다.
만 22살. 부족한 부분투성이다. 하지만 이제 베테랑이라고 할만한 나이라는 것일까? 성민의 눈에는 그 부족한 부분들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저 녀석이 메이저에서 뛸수 있는 선수인지가 먼저 보였다.
-딱!!
[높게 뜬 타구!! 내야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웃!!”
-아오, 망할. 이건 아무리 봐도 플러스 6년이 아니라 60년으로도 안 될 것 같은데.
물론 아직은 조금, 아니 상당히 많이 부족했지만 말이다.
< 2년(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