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37화 (138/287)

< 2년(2) >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에서 이뤄지는 시범경기답게 시범경기 방송의 송출과 중계 역시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직접 준비한 사람들로 진행됐다.

메이저리그에서도 가장 극성맞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들을 위해 준비한 일종의 매운맛 중계진인 셈이었다. 실제로 보스턴의 팬들은 해설자의 중계에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맞아 요즘 유망주 값이 얼마인데. 에밀리오에 필립이면 못 사올 선수가 없을텐데. 고작 2년짜리 렌탈이라니. 말도 안 되지.-

-맞아. 무슨 메이저 검증이네 뭐네 떠들지만. 사실 드래프트 상위 라운드 뚫고 마이너에서 AA까지 검증된 20세 초반 유망주들이잖아. 심지어 전문가들한테 포텐셜이 사이영 위너급에 지속적인 올스타급 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고. 이게 검증이 아니면 대체 뭐가 검증이야.-

하지만 작은 문제라면 문제인 것은 지금 그 송출되는 영상을 보는 사람이 전통적인 보스턴 팬들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2010년대부터 축적된 딥 러닝 기반 번역 서비스는 이제 전문적인 야구 해설조차도 즉각적으로 번역하여 자막으로 보여줄 만큼 발달해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보스턴 팬들의 극성은 유명하다. 메이저리그 어느 구장을 가든지 레드삭스와 컵스의 유니폼은 꼭 보인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야구는 보고 싶지만, 자기 팀의 홈은 너무 멀다는 이유로 다른 팀끼리의 경기에 레드삭스나 컵스의 유니폼을 입고 가는 팬들은 적지 않다.

또한, 한국에도 역시 봑이라 불리는 보스턴 팬들이 존재한다. 그들 역시 누가 보스턴 레드삭스 팬 아니랄까 봐 태평양 건너편에 있는 주제에 극성맞음은 현지 팬들에게 크게 뒤지지 않는다.

실제로 한국의 인터넷에는 이런 일화도 존재한다.

-내가 수업 듣는 데 교수님이 봑빠임. 며칠 전에 친구가 보스턴 모자 쓰고 수업 들어갔더니 요즘 바빠서 머리 못 감는 학생 많은 거 안다고 인자하게 웃으며 이해해주심. 내가 오늘 양키스 모자 쓰고 수업 들어갔는데 어디 학생이 예의 없게 수업 중에 모자를 쓰냐고 크게 혼남. 역시 야구 팬 중에 봑빠가 제일 악질인 듯.-

하지만 극성팬으로 따지자면 한국 역시 쉽게 뒤지지 않는다. 버스를 뒤집고, 샤따내린 경기장을 용접기로 녹이고 들어간다. 물론 현대로 올수록 점점 성숙한 문화를 보여주곤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기장 물건 투척 정도는 드물지 않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백미는 역시 부산 마린스의 극성팬인 꼴리건이다. 보스턴의 중계를 보고 있던 꼴리건들이 크게 노했다.

-저 코쟁이 지금 뭐라고 씨부리는 거냐?-

-검증된 사이 영급 선수 2년 싸게 쓰는 데 아직 메이저에 검증도 안 한 선수 두 명 보내준 걸 논란이니 뭐니 씨부리고 있네.-

-미친 듯.-

-보스턴 원정 직관 가실 분 구함. (1/99)-

-비행기에 무기 지참 가능합니까? (2/99)-

-무기는 현지에서 조달하면 됩니다. 제 육촌이 LA에서 총포상하고 있음. (3/99)-

-메이저리그도 선수들 버스에 태웁니까? 버스 뒤집는데 30명 정도 필요하던데. (4/99)-

-아재들 좀 진정하시고. (5/99)-

메츠 덕아웃의 프레스톤 윌슨 감독이 인상을 찌푸렸다.

“보스턴 놈들은 대체 무슨 수로 저 녀석을 데리고 온 거야?”

“무슨 수를 쓰기는요. 에밀리오에 필립을 주고 데리고 왔잖아요. 솔직히 걔들을 준다고 하면 나라도 당장 건네주겠네.”

“인마, 니가 보는 눈이 그러니까 아직 감독을 못 다는 거잖아.”

“내가 감독을 못 다는 건 영감님이 아주 대대손손 해 먹으려고 버텨서 그런 거잖우. 사람이 좀 적당히 해 먹었으면 빠질 줄도 알아야지. 오늘만 봐도 그래. 아니 원정이면 좀 수석한테 맡기고 그래야지. 여길 굳이 와야합니까? 우리랑 같은 리그도 아니고 같은 지구도 아닌 팀이랑 경기인데?”

프레스톤이 호세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시원하게 내려쳤다.

“아!! 아파요!!”

“아프라고 때린 거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말하는 건 다저스가 왜 받아줬냐가 아니잖아. 성민이 대체 왜 트레이드 거부를 풀었느냐지.”

“그거야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요즘도 자주 연락하드만.”

“크흠, 거 연락은 무슨. 내가 언제 그런 걸 했다고.”

“페북 업뎃도 안 하는 양반이 매일 접속 중으로 뜨는데 뻔하지 뭐.”

“조용히 하고 경기나 좀 집중하자.”

타석에 메츠의 1번 타자인 마이클 톰슨이 들어섰다. 29살. 메이저에서 3년을 뛰었지만, 마이너 옵션을 모두 소모하고 재계약을 맺지 못한 채 방출된 선수였다. 메이저에서는 매우 흔한 경우다. 메츠와는 스플릿 계약을 하고 이번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가했다. NPB나 KBO에서 용병으로 데려가는 타자가 대부분 이런 타자들이다.

“작년이랑은 다를 겁니다. 작년에야 워낙 생소한 유형이라서 좀 당황했지만, 이번에는 자료가 제법 알차게 준비됐잖아요. 물론 갑자기 보스턴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그렇게 준비한 자료들이 무용지물이 되긴 했지만요.”

타석의 마이클 톰슨이 침을 꼴깍 삼켰다.

성민을 직접 상대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작년 덕아웃에서 성민에게 무기력하게 틀어막히던 타자들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타자로서의 역량이 톰슨보다 훨씬 대단한 남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기회야.’

이제 내년이면 서른이다.

다행히 마이너에서 커리어를 끝내는 녀석들보다는 사정이 나았지만 그래도 넉넉한 건 아니다. 물론 10년간 프로로 뛰면서 받았던 연봉 총액은 200만 달러에 육박한다. 하지만 7년 정도 죽어라 가난했고, 3년 반짝 벌었던 돈이다. 그리고 소득세는 원래 누진이다. 10년 동안 꾸준히 20만 달러씩을 벌었던 녀석에 비해 세금으로 뜯긴 금액이 훨씬 크다.

최소한 2년, 혹은 3년. 그게 아니더라도 KBO나 NPB에 용병으로라도 가지 않는다면 남은 인생을 장담하기 힘들다.

그가 관중으로 가득한 관중석을 훑었다. 반짝이는 카메라들이 가득하다.

오늘 선발이 성민이라는 점은 여러 가지로 그에게 기회였다.

그만큼 대단한 투수이기에 와장창 깨진다고 해도 바로 아웃이 되지는 않을것이라는 점이 첫째. 조금이라도 선방한다면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이 둘째. 그리고 그 깊은 인상을 메츠의 코치진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온 기자들에게도 남길 수 있다는 점이 셋째였다.

마운드의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어차피 너클볼이다. 그냥 타이밍만 적당히 맞춰서 방망이를 휘두르고 기도를 드리면 혹시 알겠는가? 빌어먹을 담장 너머로 공이 날아갈지?

마음 속 타이밍에 맞춰서

하나, 둘!!

-부웅!!

“스트라잌!!”

몸쪽 깊숙한 코스 빠른 공.

성민 하면 너클볼만을 생각했던 마이클 톰슨이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으로 들어오는 공에 자세까지 완전히 무너졌다. 마운드의 성민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까?

마이클 톰슨이 마음을 정하기도 전, 마운드의 성민이 투구 자세에 들어갔다.

이번에야말로!!

단단하게 마음 먹은 마이클 톰슨의 방망이가

-부웅!!

“스트라잌!!”

또 다시 허공을 갈랐다. 2구 연속 몸쪽 빠른 공.

“시발 또?”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새어 나왔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답했다.

“이봐, 첫 시범 경기잖아. 너무 목숨 걸고 그러지 말자고. 어차피 쉬엄쉬엄 컨디션 조절하는 건데 뭐.”

마이클 톰슨이 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미래가 불안하지 않은 배부른 놈들의 이야기 따위 굳이 듣고 싶지도 않다. 어디 나한테 두들겨 맞고도 또 그런 이야기가 나오나 보자.

마운드의 성민이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쉬엄쉬엄 가자고 이야기 했다. 어차피 컨디션을 조절하는 용도라고.

첫 시범경기. 연속으로 들어오는 속구.

애초에 이 녀석은 마이클 톰슨 자신을 우습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녀석은 속구를 요청했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이번에 고개를 저은 것은 역시 너클볼을 던지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아니야, 어쩌면 그 역인가? 일부러 심리전을 건 건가?’

마이클 톰슨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하지만 성민은 그의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곧바로 세 번째.

성민의 공이 날아들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3구 연속 몸쪽 코스 빠른 공. 마이클 톰슨의 방망이가 시원하게 허공을 갈랐다.

‘이거 진짜 잘 통하네요? 이런 단순한 꼼수에 속아넘어가다니.’

-당연하지. 이게 바로 40대 중반까지 빅리그에서 굴러먹은 투수의 관록이다. 뭐 보통이라면 통하기 힘들겠지만, 절박한 애들은 그렇게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으니 말이다.

‘확실히 야구 하나는 믿음직하다니까요.’

-그보다 저 포수 녀석도 꽤 괜찮구나. 합을 맞출 줄을 알아.

‘그거야 제가 몇 마디 했다고 애들 그렇게 규합하는 것만 봐도 아시잖습니까. 저 녀석도 좀 타고났어요.’

고개를 끄덕인 것, 고개를 저은 것.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들이었다. 어차피 오늘 경기 사인을 보내는 것은 성민이었다. 에두아르도 역시 그것에 동의했다.

성민이 두 번째 타자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필 니크로의 시선이 따듯했다.

필 니크로가 바라보는 성민의 약점은 두 가지.

인내 그리고 방심이었다.

그리고 그중 인내의 경우는 여전히 해결됐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아직도 훈련을 할 때면 마지막 한두 번 더 쥐어짜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해버리려는 버릇이 있다. 만약 옆에서 필 니크로가 바라보며 호통을 치지 않는다면 성민은 절대 거기까지 가지 않을 것이다.

-뭐 그거야 찬찬히 고쳐주면 될 일이고.

‘네? 갑자기 고쳐주긴 뭘 고쳐줍니까?’

하지만 방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과거 성민은 자기보다 한 수 아래의 상대라는 판단이 들면 정말 제멋대로 구는 버릇이 있었다. 사이 영 2위. MVP 7위. 충분히 메이저 최정상급 선수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민은 25인에도 제대로 끼지 못하는 40인 언저리를 방황하는 수준의 선수들을 철저하게 연구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을 상대하면서 이런 꼼수를 활용하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문득 3년 전에 대만에서 헛소리하던 네 녀석이 생각나서 그런다.

‘아이, 참. 언제까지 그 시절 이야기를 하실 겁니까.’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는 이야기에, 사바나에서 사자는 토끼를 잡지 않는다는 헛소리로 대꾸하던 방심왕이 방심을 버렸다.

처음 만나는 투수와 타자의 싸움에서 유리한 것은 투수다.

하물며 스프링트레이닝 초반이었다. 원정을 나오는 선수는 보통 급이 떨어지는 선수들이다. 메이저 최정상급 투수의 전력을 다한 피칭이 메츠의 타선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2이닝 4삼진 0피안타.

그 비싼 유망주를 둘이나 내주고 얻어 온 2년짜리 투수다. 어느 정도의 활약은 당연하게 생각하던 보스턴의 팬들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 이상이다. 그들조차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는 놀라운 활약이었다.

-오늘 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존 맥도웰이 모근이랑 함께 생각도 날아간 거 아닌가 깊게 고민했었다. 오늘 경기는 대단했다. 만약 시즌 중에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면 난 존 맥도웰에게 사과할 의향도 있다. 이건 단순히 오늘 결과에 만족 하는 게 아니야. 과정에 감탄하는 거다. 에밀리오 가르시아가 사이 영 컨텐더급 투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존 맥도웰은 이번에 그 가능성을 주고 결과를 끌어왔다.-

보스턴 빠돌이로 유명한 어느 유명인의 SNS가 그들의 마음을 대신했다.

< 2년(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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