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36화 (137/287)

< 2년(1) >

사람은 이성적이며 모두가 자율적인 의지를 갖고 움직이기를 원한다.

라는 말은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다.

당연하다.

굳이 힘든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뇌를 쓰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대부분 사람은 판단의 순간에 옳은 답을 찾아내기보다 누군가 옳은 답을 알려주는 것을 선호한다. 게다가 그것이 옳은 답인지를 판단하는 기준 또한 멍청하다.

다수의 의견.

집단지성이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의미한 ‘집단’이 될 때의 이야기다. 20명, 30명 단위의 작은 그룹.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그리고 70명 그룹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데는 그 30명이면 충분하다.

보스턴의 야수조가 합류한 날짜는 2월 18일.

투수조의 소집일에서 불과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합류했을 때,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의 분위기는 이미 결정이 난 이후였다.

물론 야수조의 인원은 투수조보다 많았다. 하지만 야수조라 뭉뚱그려지기는 하지만 그들이 하나로 똘똘 뭉친 집단인 것은 아니다. 애초에 아예 같이 뛴 적이 없는 논 로스터 인바이터도 10명이 넘는다. 끌려갈 수밖에 없다.

“루카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뭐가?”

“아니, 맥스 말이야. 왜 연습 끝나고 휑하니 사라지는 거냐고. 우리 왔는데 같이 술도 한 잔 안 하고 말이야.”

“글쎄, 요즘 훈련에 열심이더라고. 작년에 성적이 기대만큼 안 나왔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늘 첫 날인데 우리 제시네 펍에서 한 잔 하는 거 나름 전통이잖아.”

“이번만 좀 봐줘. 그 녀석 뭐 하나 꽂히면 다른 건 신경 안 쓰는 거 잘 알잖아.”

“하긴, 녀석이 좀 그러긴 하지. 그래서 새로 온 값비싼 양반들은 좀 어때? 작년이랑 뭐 좀 달라?”

“나쁘지 않아. 맥스도 오늘 끝나고 간 곳이 성민의 개인 훈련장이야.”

직접 성민이라는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수고가 많이 드는 귀찮은 일이다. 만약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누군가가 이미 판단을 끝내놨다면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행동 패턴이다. 그리고 작년 가장 앞서서 베테랑들을 배격했던 사람은 맥스 슈피겐이었다.

“그래? 작년 그 망할 자식들과는 다르게 꽤 괜찮은 녀석인가보네.”

“어, 조금 맥스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이야기를 좀 해봤는데 친해지기는 힘든 타입이지만 꽤 괜찮더라고.”

“나쁘지 않네. 또 작년이랑 비슷한 놈들이었으면 아예 시작부터 콧등을 뭉개버리려고 했는데 말이지.”

“아, 맞다. 오늘 제시네 말이야. 에두아르도도 낄 것 같은데 괜찮지?”

“에두아르도? 에두아르도 크루즈? 뭐야? 그 녀석이랑도 벌써 친해진 거야?”

“어, 콧등을 뭉갤 필요도 없이 애초에 콧대가 그리 높지 않더라고. 요 일주일 사이에 우리 모두랑 다 친해졌지.”

물론 이번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가한 보스턴의 선수 모두가 맥스 슈피겐, 루카스 버튼과 어울리는 녀석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집단 내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그들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게 선수단의 분위기 자체가 성민이 의도했던 그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근데 성민 그 친구 오늘 보니까 대단하긴 하더라고.”

“뭐가? 넌 피칭하는 것도 제대로 못 봤잖아.”

“수비 말이야. 오늘 처음 맞춰보는 건데 커버 들어오는 타이밍이 정확하더라니까. 게다가 포구도 보통이 아니야. 몸이 덜 풀려서 공이 살짝 빗나갔는데도 그걸 정확히 잡아내더라고.”

“몸이 덜 풀리는 소리 하네. 랄로 너 작년에 송구 미스 몇 번이었는지는 기억하냐?”

“아니, 그거야 시즌 초 때 긴장했을 때 일이고. 거기다가 내가 겨울에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고 왔는데.”

펍에 모인 선수들이 자리에 없는 성민에 대해 떠들었다.

“근데 난 성민이 그렇게 대단한 공을 던지는 투수인지는 잘 모르겠더란 말이지?”

“뭐가? 너 그 친구 피칭 하는 거 본 거야?”

“어, 어쩌다 보니 잠깐 보긴 했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고.”

“월드시리즈 MVP라잖냐. 우리를 그렇게 엿 먹였던 양키스 놈들이 죄다 얻어터졌고. 게다가 어차피 시범경기 전에는 자체 청백전이랑 라이브 배팅도 있을 테니까 그때 직접 상대해보면 알게 되겠지.”

“그렇겠지?”

“성민이라면 내가 좀 알지. 일주일 내내 내가 공을 받았잖아?”

자기들끼리 떠들던 선수 사이로 에두아르도가 슬쩍 끼어들었다.

“에두아르도?”

“물론 공을 받는 거랑 치는 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공을 제일 많이 본 건 이 몸이란 말이지. 게다가 성민만이 아니지. 이번 스프링 트레이닝 참가한 선수들 중에서 나한테 공 안 던져본 투수는 없지. 어때? 관심 있어?”

오늘 첫 잔을 이미 시원하게 쏜 남자의 등장이었다. 게다가 자신들이 합류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나서는 상황이다.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알다시피 난 브레이브스랑 오클랜드를 거쳐서 이번에 보스턴에 온 거야. 게다가 올스타전에도 무려 세 번이나 나갔지. 올스타급 투수들 공을 그만큼 잡아봤다는 이야기야. 그런 입장에서 그 투수들이랑 비교를 하자면······.”

“비교를 하자면?”

“최고 수준이야. 브레이브스의 에이스였던 2년 전의 케빈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아. 올해에는 제법 기대할 만할 거야. 당장 선발 투수진만 따져보자면 작년 오클랜드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는 않아. 물론 2선발이랑 3선발이 조금 약하기는 한데, 여긴 4, 5 선발도 제법 탄탄하고 에이스만 따지면 훨씬 낫지.”

에두아르도의 호언장담에 선수들의 눈이 빛났다.

이러나저러나 프로 선수들이다. 승리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군다나 그가 비교로 삼은 오클랜드는 작년 와일드카드지만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팀이다. 그런 팀의 선발진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이거 기대되는데?”

선수들의 눈이 반짝였다.

라이브배팅, 자체 청백전. 언론에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일정들이 지나갔다.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선수들의 인터뷰, 그리고 운동장에서 공개적으로 이뤄지는 몇몇 팀훈련 들뿐이었다.

[이번 겨울 적극적인 트레이드를 보여줬던 보스턴 레드삭스. 과연 그 결과는?]

-어우, 기사 보니까 한층 더 야구 마렵다. 이번 시즌은 진짜 기대해볼만 하겠는데?-

-이 흑우가? 작년에 그렇게 꼴찌를 하고 성적이 그나마 괜찮던 애들 다 팔아치우고 팀이 아주 엉망진창이 됐는데도 야구가 마렵냐?-

-왜? 기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 전력 보강 했잖아.-

-전력 보강? 너 나랑 같은 기사 읽은 거 맞아? 적극적인 트레이드가 어떻게 보강이냐. 사실 트레이드에서 유의미한 보강이라고 해봐야 김성민이랑 에두아르도. 조금 더 쳐줘봐야 바렛이랑 구스타보 정도잖아. 이게 무슨 보강이야. 나간 애들이 몇인데.-

-김성민이랑 에두아르도가 엄청 강력한 보강이잖아. 현역 No.1 다투는 포수에 사이 영 경쟁하는 선발투수.-

-내셔널리그에서 아메리칸리그 와서 탈탈 털려나간 투수가 어디 한두명이야? 사이 영 경쟁하는 선발투수? 까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지.-

-성민이 작년 월드 시리즈에서 양키스 영혼까지 터는 거 못 봤어? 물론 지명타자 제도가 있는 아메리칸리그에 타자구장이랑 거포들 가득한 동부지구니까 성적이 좀 떨어지긴 하겠지. 하지만 난 충분히 기대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야구를 사랑하는 팬들이 오매불망 시범경기의 개막을 기다렸다. 그중 시간과 돈 많은 몇몇은 과감하게 플로리다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2월 24일.

마침내 보스턴의 첫 시범경기가 열렸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성민에게 다가왔다.

“어쩔 생각이야?”

“어쩌기는, 그냥 당분간은 지금처럼 쭉 가는 거지. 뭐, 예상은 했지만, 에두아르도 너 생각만큼이나 잘하더라? 투수들이야 그렇다 치고 야수들 우르르 몰려왔을 때는 좀 걱정했는데 이제 거의 절반은 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 같던데?”

“아니, 그거 말고. 너 오늘 오래간만에 등판이잖아.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에두아르도의 질문에 성민이 피식 웃었다.

“아, 그거 말이구나.”

“뭐 특별히 시험해보고 싶은 거 있어?”

“글쎄, 뭐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긴 하지.”

“그래? 내가 물어보면서도 그런게 있을까 싶긴 했는데,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다니 다행이네. 뭐 어떤 게 시험해보고 싶은데? 혹시 그 바깥으로 빠지는 너클볼 다음에 이어지는 몸쪽 속구?”

성민이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생각해보니까 오늘은 다르게 가는게 좋겠다.”

“다르게? 뭐 어떻게?”

“그냥 내가 던질 수 있는 거 다 해서 한번 해보자고. 네 이야기처럼 오래간만에 등판인데 해볼 건 다 해봐야지.”

“저 불쌍한 애들 영혼까지 털어먹겠다 뭐 그런 소리구나.”

성민이 대답 대신 그냥 웃었다.

-뭐야? 오늘 원래 계획은 그게 아니었잖아.

‘그렇기는한데, 좀 생각을 해봤거든요. 아무래도 이미지 관리를 조금은 해야 할 것 같아요.’

-이미지 관리? 네가 무슨 이미지 관리가 필요하다는 거야?

‘물론 코치진한테 하는 이미지 관리는 아니고요.’

-그러면?

‘저쪽이랑. 저쪽이요.’

-저쪽이랑 저쪽? 아!!

성민의 시선이 덕아웃의 동료들 그리고 관중석으로 향했다.

‘원래 초반 이미지 중요하잖아요. 한국에서 용병으로 온 친구들도 첫 시범경기 망한 애들이랑 첫 시범경기 압도적으로 끝낸 애들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거든요. 뭐 이야기나 영상으로는 저를 좀 봤다지만 그건 파란 유니폼 입고 있던 시절 이야기잖아요. 오늘이 보스턴 빨간 유니폼 입고 뛰는 첫 모습인데 이왕이면 눈도장 쾅 찍어놔야죠. 게다가 상대도 나쁘지 않고 말이죠.’

성민의 이야기에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똥 같을 거라고 예상했던 팀의 분위기를 고작 열흘만에 자기 마음대로 주무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야구 외의 것은 그냥 성민의 말이 다 맞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메츠의 시범경기. 보스턴 같은 경우는 이번 경기가 첫 시범경기죠?]

[네, 그렇습니다. 이번 겨울 정말 파란의 주인공이었던 보스턴 레드삭스였죠. FA도 FA지만 정말 그 폭풍같았던 트레이드들은 듣는 사람들을 모두 깜짝 놀라게할만한 일의 연속이었어요.]

[존 맥도웰 단장이 정말 과감한 선택들을 연달아 보여줬었습니다. 자, 그러면 과연 그의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멍청한 선택이었는지를 확인해볼 시간이로군요. 에밀리오 가르시아와 필립 탱고라는 보스턴이 꽁꽁 감춰뒀던 유망주들을 통째로 내주고 고작 2년 렌탈을 받아온 투수죠? 지금 보스턴의 마운드에 모두가 깜짝 놀랐던 트레이드의 주인공. 김성민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2033시즌 내셔널리그의 신인왕. 그리고 사이 영 2위 MVP 7위. 월드시리즈 MVP. 참 대단한 선수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선수라고 해도 지금 보스턴 상황에서 즉전감 투수를 고작 2년 쓰기 위해 서비스 타임을 하루도 사용하지 않은 드래프트 1라운드급 유망주를 둘이나 내주는 것이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이야기가 많습니다.]

제트블루 파크 앳 펜웨이 하우스.

무려 123년이나 된 펜웨이 파크와 똑닮은 구조로 지어진 그곳의 1만 관중 앞에 고작 2년짜리 렌탈을 위해 1라운드급 유망주를 둘이나 내줘야 했던 투수가 우뚝섰다.

-자 그러면 이미지 관리 한번 제대로 해보자고.

< 2년(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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