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35화 (136/287)

< 투수조(5) >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사나운 녀석이지만 단순하기도 하다. 지금 등을 돌려 이야기를 건네면 툴툴거리는 것으로 끝낼 녀석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루카스 버튼이 맥스 슈피겐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뻐엉!!

어제보다 한층 더 위력적인 속구. 심지어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공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저 나이에 저만한 컨트롤이라니.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역시 수준급이다. 크게 될 놈이다.

‘나와는 다르게 말이야.’

몇몇 사람들이 맥스를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맥스는 조금 눈치가 없고 그런 주제에 나서기도 좋아하고 성격까지 사납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좋은 놈인지, 혹은 나쁜 놈인지를 따져본다면 그는 분명 좋은 놈에 속한다.

마이너 시절, 고작 30만 달러에 계약했던 자신을 위해 부모님이 보내주셨다는 핑계를 대며 자신의 식사를 공유해주던 녀석이다. 거짓말도 어설퍼서 누가 봐도 인근 마트에서 사 온 고기를 텍사스 목장에서 보내왔다고 우겨댔다. 처음에는 우월감에서 나오는 재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재수 없는 그 행동이 한 달, 두 달, 석 달을 넘어 반년이 넘어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랑질이 아닌 맥스 슈피겐의 선의가 됐다.

조금 철없는 면이 있긴 하지만, 결국 팀을 위하는 마음은 똑같다. 옆에서 적당히 제어만 해줄 수 있다면 녀석은 대단한 남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루카스 버튼은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어제까지.

***

루카스 버튼이 애써 맥스 슈피겐의 좋은 점을 성민에게 이야기했다. 성민이나 에두아르도는 작년의 그 꼰대들과는 조금 달랐다. 충분히 함께할 수 있다.

하지만 성민의 반응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멍청한 소리 하고 있네.”

“네?”

“그래, 뭐 원래는 착한 놈인데 표현이 좀 서툴러서 그래 보일 뿐이야. 그럴 수 있어. 근데 지금 중요한 건 그 표현이 서투른 부분이 아니잖아. 그 표현이 서투른 멍청이가 팀을 완전히 망가트렸다는 점이 중요하지.”

“잠시, 잠시만요. 팀을 완전히 망가트리다니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무슨 소리는 무슨 소리겠어. 작년의 폭망. 그거 너희 잘못이잖아.”

성민의 직설적인 이야기에 루카스 버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버하지 말고 앉아. 아직 이야기 안 끝났으니까.”

“오버? 개소리하고 있네. 그게 죄다 우리 잘못이라고? 당신이 작년에 우리가 어땠는지를 알아? 알고 하는 소리야 지금?”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굳이 알 필요도 없지. 프로는 결과로 말하는 법이야. 너희들이랑 감정싸움 했던 베테랑들 성적 봤어? 걔들도 물론 떨어지긴 했지. 근데 그게 너희랑 비교나 됐던 것 같아?”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왜 걔들이 트레이드되고 너희가 남았는지는 생각해봤어? 설마 팀이 너희를 선택했던 거라고 생각해? 에이,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혹시 모르니 답은 이야기해줄게. 그건 그냥 너희가 똥값이라서 그런 거야. 어찌 됐건 둘 중 하나는 처분해야 하는데, 그나마 가격이 나가는 건 그쪽이라서 그쪽을 처분한 거라고. 알겠어?”

“말이 너무!!”

성민이 루카스 버튼의 말을 끊었다.

“심하다고? 천만에. 전혀 심하지 않아. 진짜 심한 건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데도 멍청하게 또 패거리나 만들고 있는 너희들이지. 왜? 개인 성적만 그럭저럭 나오면 그래도 꾸역꾸역 메이저에서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해?

웃기지 마.

개인 성적이 필요한 이유도 결국은 그게 팀의 승리로 이어지기 때문이야. 자기 스탯이 좀 나온다고 팀의 분위기를 망가트린다? 심지어 그것도 무슨 올스타급도 아니고 그냥저냥 솔리드한 수준으로? 내가 보기에는 너희들 지금 아웃되기 직전이야.”

루카스 버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성민은 어니언 칩 하나를 집어 입에 밀어 넣으며 말을 이어갔다.

“크, 그나저나 여기 맛집은 확실하네. 뭐해? 계속 서 있을 거야? 이쯤 이야기했으면 감이 와야지. 내가 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그래도 그 멍청한 녀석보다는 네가 조금은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이럴 거야?”

“지금 대체 뭘 원하는 거야.”

“확실히 그 머저리보다 똑똑하긴 하네. 왜인지를 묻는 게 아니라 뭘 원하는지를 묻는 거 보니 말이야. 간단해. 난 제대로 시즌을 치르고 싶어. 쓸데없이 알력싸움 같은 거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야구를 하고 싶다고.”

“그 말은 맥스를 잘 달래 달라는 이야기인가?”

“그럴 리가. 그런 거였으면 이렇게 독하게 이야기하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지금도 넌 충분히 잘 달래고 있잖아.”

“그렇다면?”

성민이 말했다.

“좀 혼자로 내버려 둬. 선발투수가 싼 똥을 치워주는 건 마운드에서 하는 거로 충분하잖아. 일상생활까지 그런 걸 해주면 안 좋은 버릇만 잔뜩 드는 법이야.”

“그 녀석과 나는 친구야.”

“그래, 친구니까 더 그렇게 해줘야지. 그 녀석 그대로 두면 망가진다.”

“뭐?”

“마운드에 남는 건 결국 자기 혼자야. 진짜배기 에이스랑 그럴싸한 투수를 가르는 건 1마일의 구속 차이가 아니야.”

성민이 검지를 들어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1그램도 되지 않는 멘탈이라고.”

사기꾼의 헛소리.

하지만 확실한 커리어가 그의 말에 힘을 실었다.

루카스 버튼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민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뭐, 너희만 욕하는 것도 웃기기는 하지. 솔직히 말하자면 작년의 너희는 불운했거든.”

“비난만 늘어놓더니 이제는 갑자기 동정인가?”

“아니, 그냥 사실이야. 뭐 어딜 가나 기가 센 애들은 있는 법이지. 진짜 베테랑이라면 그런 걸 적절히 잘 구슬리고 팀에 기강을 세웠어야 했는데, 그런 것도 못 하는 머저리들이 저희 팀에서 고참들이 받던 거 받겠다고 나섰으니 망할 수밖에. 하지만 올해는 다를거야.”

“어떻게 그걸 자신하는 거지?”

“작년에는 내가 없었지만, 올해는 내가 있으니까? 너희 입장에서는 작년에 집 나갔던 행운이 올해 새끼까지 쳐서 들어온 셈이지.”

“허풍은······.”

“허풍인지 아닌지는 지켜보면 알 일이고. 어때? 내 도움을 받아들이겠어? 아니면 그냥 이대로 자멸하겠어?”

루카스 버튼이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납득했다. 조금 직설적이고 거친 말이기는 했지만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그렇기에 더 꾸며낸 말이 아닌 그의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본래 입에 쓴 약이 몸에 좋은 법이다. 듣기 싫은 이야기일수록 좋은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요. 좋습니다. 그 도움 받아들이죠.”

“좋은 선택이야. 너도 알아봤겠지만, 맥스 녀석은 팀에 매우 큰 보탬이 될 녀석이야. 이대로 엇나가게 둘 수는 없지.”

“맞습니다. 그 녀석 재능은 진짜죠. 분명 크게 될 겁니다.”

“그래, 그 성격만 어떻게 한다면 말이지.”

루카스와 성민이 맥스 슈피겐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에는 너무 강한 이야기라 거부감이 들었지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자신과 생각이 거의 흡사하다는 점이었다. 단지 표현이 조금 거칠 뿐이다.

맥스도 그렇고 이 남자도 입이 조금 험해서 손해를 보는 타입 같았다. 하지만 루카스 버튼은 이미 맥스 슈피겐을 통해 알고 있었다. 입이 거친 남자일수록 사실 속은 더 따듯하다는 것을.

루카스 버튼이 성민에게 홀딱 넘어갔다.

그리고 필 니크로가 감탄했다.

-와, 이게 통한다고?

‘원래 채찍 그리고 당근은 대화의 기본이죠. 기본적으로 제가 우위에 있는 관계잖아요. 좀 두들겨도 그냥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게 돼 있어요. 그러다가 이렇게 달콤한 당근 하나 내려주면 앞에 건 잘 기억도 안 나는 법입니다.’

-잠깐만, 그거 협상의 기본 아니었냐? 언제부터 채찍과 당근이 대화의 기본이 된 거냐?

‘에이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시고요. 게다가 이 녀석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유형이거든요. 실제로 적당히 똑똑한 편인 것도 맞고요. 이런 놈들일수록 자기가 내린 결정이 옳다고 자기확신을 더하는 경향이 있어요. 게다가 심지어 이 녀석 착하기까지 하더라고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야 그런 놈이 아니면 에두아르도 대신 맥스 슈피겐같이 지랄 같은 녀석 옆에 남아있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그런데 이렇게 복잡하게 구느니 똑똑한 놈이면 말도 알아들을 텐데 그냥 이야기하는 편이 낫지 않았어?

‘에이, 그러면 또 안 들어먹었을 겁니다. 말했던 것처럼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놈들은 상황을 꼭 꼬아서 생각하거든요. 내가 이렇게 굴었으니까 거칠지만 솔직하게 지들을 생각해준다고 여기는 거지, 솔직히 말했으면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했을걸요.’

-근데 네가 얘들을 생각해주는 건 사실이잖아.

‘아까 이 멍청이한테도 이야기했지만 중요한 건 의도가 아니에요. 결과죠.’

***

결과적으로 맥스 슈피겐은 이틀 연속 홀로 펍을 찾았다.

울화가 치밀었다.

“망할 자식들. 두고 보라지.”

주문한 병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맥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지만,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화는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만으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했던 친구가 자기 대신 에두아르도와 시시덕거리는 것은 그만큼 속이 타는 일이었다.

“맥스?”

네 번째 맥주병을 막 주문했을 때, 누군가가 맥스의 등을 두들겼다.

“성민? 여긴 어쩔 일이야? 아, 루카스에게 퇴짜맞고 쓸쓸하게 혼자가 되셨구나. 이제 와서 왕따는 싫으니 나랑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다 뭐 그런 거야?”

“지나가다가 창으로 익숙한 뒷모습이 보여서 들어온 건데 그게 무슨 헛소리지? 그리고 넌 왜 혼자서 이렇게 궁상을 떨고 있는 거야?”

“궁상? 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게다가 어차피 혼자 다니는 건 나나 그쪽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성민이 맥스의 옆 의자를 끌어당기고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 있나 보군. 마스터, 여기 우유 한 잔 따듯하게 데워서 부탁하죠.”

“우유? 그딴 걸 마시고 싶으면 저기 유치원이나 가보는 게 어때?”

“훈련 기간에는 금주라서요. 이건 팁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금방 사오겠습니다.”

성민이 자본주의의 힘으로 마스터를 찍어눌렀다.

“흥, 여기서 돈지랄이라니 아주 좋겠어?”

“배배 꼬인 소리 그만 하고, 대체 뭐가 문제인지 이야기나 해보라고. 혹시 알아? 나도 경험해봤던 일일지? 뭐 리그는 다르지만 그래도 경력의 차이라는 게 있잖아?”

맥주 세 병은 취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양이었다. 하지만 뇌에 아주 약간의 영향을 끼치기에는 충분한 양이기도 했다.

게다가 성민은 좋은 청자였다. 특히 별 관심 없는 이야기에도 마치 관심이 있는 것처럼 대응하는 데 성민을 따라올 만한 사람은 없었다.

쌓여있던 불만, 그리고 마지막 루카스 버튼마저 자신을 버렸다는 분노.

맥스 슈피겐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있는 대로 모두 털어놨다.

“그러니까 다들 너를 따돌리는 것 같다 이 말이로군. 그리고 그 중심에 에두아르도 그 녀석이 있는 거고 말이야.”

“그래, 바로 그거지. 근데 궁금한 건 말이야. 대체 왜 어제 너와 이야기를 하러 갔던 루카스 그 개자식은 오늘 에두아르도 놈이랑 붙어먹고 있나. 그게 궁금하단 말이야. 대체 너 어제 그 녀석이랑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글쎄, 나는 아까도 이야기 한 것처럼 지금이 몸을 만드는 시기고, 네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주변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어. 루카스에게는 2인이 해야 하는 훈련에 파트너를 부탁했고 그걸 거절당했을 뿐이야.”

“파트너?”

“흠, 그러고 보니 잘됐군. 넌 나름대로 루틴이 있을 것 같아서 권유하지 않았던 건데 이렇게 혼자 따돌림당한다고 술이나 처마시는 걸 보니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고. 차라리 내일부터 나와 개인훈련을 하지 않겠어?”

맥스 슈피겐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투수조가 모조리 성민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 투수조(5)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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