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수조(4) >
요 며칠 맥스 슈피겐의 심기는 점점 불편해졌다.
“이 망할 새끼들이?”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마치 맥스 슈피겐이 보라는 것처럼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에게 몰려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대로 커리어를 이어나간다면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돼도 이상하지 않은 올스타급 포수다. 게다가 보스턴과 7년 2억. 심지어 전 구단을 대상으로 한 트레이드 거부권을 가지고 있다. 올해를 포함한다면 앞으로 8년을 보스턴에서 보낼 선수였다.
물론 맥스 슈피겐이 장래가 유망한 투수이고 지금까지 지내온 정이 있긴 하다. 하지만 앞으로 클럽하우스에서의 입지를 생각한다면 그 두 사람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뭐, 어차피 하나씩 하나씩 친해지는 과정이잖아. 맥스도 이제 곧 부르겠지.’
‘그래, 처음에는 카일이랑 마이클, 숀이 전부였는데 벌써 여기 모인 사람만 열 명이 넘잖아.’
게다가 그들은 지금 이건 단지 순서의 문제일 뿐, 결국 다들 여기 모이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마음 한편에는 조금은 통쾌함도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평소 맥스 그 녀석 좀 너무 나서는 게 좀 재수 없긴 했어.’
‘우리 중에서 성적이 좀 괜찮은 편에 속하는 건 맞지만, 그래도 대장 놀이를 할 정도는 아니었잖아.’
어차피 나중에 합류할 것이라는 확신.
그리고 안 그래도 평소 대장처럼 나서던 것을 고깝게 생각하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 녀석보다 먼저 선택받았다는 즐거움. 무엇보다 맥스 슈피겐과 다르게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지갑을 여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자자, 내가 사는 거니까 마음껏들 먹자고.”
열 명이 넘는 운동선수가 먹어 치우는 양은 적지 않았다. 식비가 제법 나온다. 물론 풀 타임 메이저리거라면 최소 연에 55만 달러를 받는다. 이런 밥 한두 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아직 빅리그에 데뷔 못 한 선수도 있었다. 마이너 선수의 처우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열악하다. 그들에게는 큰돈이다. 그들 사이에서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이미지가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성민이 신신당부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밥을 항상 사야 한다고? 왜?”
“어,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선후배 관계 때문이지.”
“선후배 관계?”
“너도 알다시피 메이저리그의 선후배 관계는 명확하잖아. 그게 뭐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야 선배는 선배고 후배는 후배니까 당연히 그런 거잖아. 근데 지금 이 이야기가 대체 밥을 사는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거야?”
“맙소사. 에두아르도. 세상에 당연히 그런 건 없어. 뭐든지 이유가 있지. 후배가 선배를 공경하는데도 이유가 있는 거야. 그리고 다른 팀들은 그 이유가 철저하게 지켜졌기 때문에 그 전통이 이어지는 거고, 보스턴 같은 경우는 팀이 한번 리셋에 가깝게 흔들리는 바람에 그게 완전히 끊긴 거고.”
“이유? 전통? 그게 고작 밥이란 말이야?”
“고작이라니. 너 지금이니까 밥을 고작 밥 한 끼라고 할 수 있는 거지. 처음 스프링 트레이닝 갔을 때, 아니 그 이전에 마이너 시절에 메이저에서 리햅하던 선배들이 마이너 왔던 날을 떠올려 봐.”
잠시 생각에 빠졌던 에두아르도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들이 항상 좋은 음식을 전체한테 사줬던 것 같아. 근데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그래, 뭐 너야 1라운드 계약금 크게 받고 오래 걸리지 않아 빅리그에 콜업 됐으니 조금 덜하기는 할 거야. 하지만 다른 애들은 또 다르다고. 게다가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원래 선배가 선배 행세를 하려면 그건 규율을 잡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선배 대접을 해줄 수 있도록 행동해야지.”
“그게 고작 밥을 사는 거로 된다고?”
“물론 그것만으로는 안되지. 하지만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야. 중요한 건 내가 너에게 무언가를 베푼다는 행위거든. 그리고 베푸는 건 오직 상대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란 말이지. 뭐 밥값이 좀 나가기는 하겠지만, 솔직히 1년에 3천만 달러씩 버는 사람이 밥 몇 끼 값이 아깝지는 않잖아?”
“그거야 그렇지.”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성민의 말은 옳았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밥을 사는 일이 거듭될수록 녀석들은 조금씩 더 그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물론 그냥 무작정 밥만 샀다면 그건 호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3년 연속 올스타, 그리고 7년 2억 달러라는 선망의 대상이 될만한 커리어를 갖고 있었다.
베풀 필요가 없는 사람, 오히려 무언가를 더 줘서라도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일방적으로 호의를 베풀었다. 이것은 무형의 빚으로 마음속에 남는다. 그리고 그 무형의 빚은 결국 권위가 된다.
클럽하우스의 중심이 맥스 슈피겐에게서 에두아르도 크루즈에게 넘어오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은 사람을 부른다. 이제는 굳이 에두아르도가 직접 부르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맥스 슈피겐과 루카스 버튼은 소외됐다. 물론 두 사람이 소외된 이유는 각각 조금 달랐지만.
“맥스, 굳이 이렇게 날 세울 필요 있어? 들어보니까 예전 그 꼰대들이랑은 다른 것 같던데.”
“다르긴 뭐가 달라. 지금이야 달라 보이겠지. 하지만 그 꼰대들도 자기들 기분 내킬 때는 밥 정도는 샀어.”
맥스 슈피겐은 특유의 그 고집으로. 그리고 루카스 버튼은 자기마저 빠져버리면 혼자가 될 친구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실제로 루카스 버튼의 경우는 에두아르도 크루즈에게 권유를 받았음에도 끝끝내 맥스 슈피겐의 곁에 남아주었다.
루카스가 맥스를 달랬다.
“그만 화내고 좀 참아 봐. 어차피 며칠 지나면 야수 애들도 올 거야. 그러면 녀석들도 곧 정신을 차리겠지.”
“그렇겠지?”
-뻐엉!!
성민의 공이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미트에 틀어박혔다.
80마일 후반은 너끈해 보이는 속구였다. 너클볼 투수 주제에 2월에 80마일 후반의 공이라니. 수비도 그렇고, 고고한 척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고 매일 혼자 사라지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확실히 실력은 있어 보였다.
“어?”
“왜?”
“성민이 짐 안 챙기는데? 왜지?”
평소 성민은 자기 피칭을 끝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었다. 하지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선글라스 아래 가려진 눈빛이 어디를 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됐건 자기 외에는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에이스가 다른 사람의 피칭을 지켜본다는 사실에 장내가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흥, 왜긴 왜야. 이제야 자기 라이벌들을 살필 여유가 생겼나 보지. 두고 보라고. 녀석의 남은 계약 기간 2년 이내에 내가 훨씬 더 대단한 투수가 될 거니까.”
“그래, 어디 한 번 최선을 다해봐라.”
“너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말하지 말고. 최고의 투수를 목표로 함께 힘을 내야지.”
“됐네요. 최고의 투수는 모르겠고 그냥 시즌이나 무사히 넘겼으면 좋겠다.”
맥스 슈피겐이 평소보다 조금 의욕적으로 공을 뿌렸다. 성민의 시선이 자기를 훑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관심 없는 척했지만, 이 몸에게 관심이 아예 없을 수는 없지. 좋았어. 어디 장래의 경쟁자 공을 한번 잘 살펴보라고.’
-뻐엉!!
2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93.7마일.
한바탕 피칭을 끝낸 그를 향해 성민이 다가왔다.
“제법 괜찮던데? 저녁 어때? 내가 한 끼 사도록 하지.”
“뭐 보는 눈은 좀 있긴 하네. 근처 식당 괜찮은 곳은 내가 잘 알고 있어. 어차피 돈 잔뜩 받는 메이저리거니까 비싼 곳도 상관없지?”
맥스 슈피겐의 이야기에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에이, 뭐야. 2,200만 달러씩이나 받으면서 음식값에 구애받는 거야?”
“아니, 너 말고. 버튼 말이야.”
“어? 나?”
성민이 맥스 슈피겐 뒤편에 서 있던 루카스 버튼을 가리켰다. 맥스 슈피겐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잠깐, 잠깐만. 맥스가 아니라 나라고?”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거야. 왜? 단짝이라서 굳이 같이 밥을 먹어야 해? 그렇다면 뭐 맥스 너도 함께 오던지.”
“아니, 됐어. 생각해보니 난 이미 저녁 선약이 있어서. 루카스, 맛있게 먹도록 해.”
“맥스? 맥스!!”
맥스 슈피겐이 자신의 짐을 챙겨 빠르게 자리에서 사라졌다. 루카스 버튼이 뒤에서 그를 애타게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자, 그러면 단짝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아까 저 녀석이 말했던 비싸고 맛있는 식당이나 좀 안내해봐.”
루카스 버튼이 성민의 얼굴을 쏘아봤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누가 봐도 맥스 슈피겐과 자신의 차이는 명백하다. 그런데 굳이 맥스 슈피겐을 놔두고 자신을? 하지만 성민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렇게 떠난 맥스 슈피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쫓아가봤자 저 성격에 화만 낼 것이 분명했다. 그 단순한 녀석이야 나중에 달래주면 그만이다. 일단은 대체 눈앞의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루카스 버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안내하도록 하지.”
***
서둘러 자리를 뜬 맥스 슈피겐이 라커룸에서 대충 자신의 짐을 챙겨 들고 클럽하우스를 뛰쳐나왔다.
그리고 항상 가던 펍으로 가 맥주를 한 병 벌컥벌컥 들이켰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동료들로 가득하던 펍에 이제 남은 것은 맥스 슈피겐 본인뿐이었다.
“빌어먹을.”
시원한 맥주가 들어왔지만 부끄러움은 더 크게 밀려왔다.
“멍청한 새끼. 맥스 이 돌대가리 새끼. 대체 거기서 반갑게 나서기는 왜 나선 거야!! 뼈다귀 주는 주인한테 꼬리 흔드는 개새끼도 아니고. 그깟 놈이 괜찮다고 하는 말이 뭐가 그렇게 기쁘다고.”
한참 자신을 자책하며 두 병째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이제야 조금 진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마스터. 여기 맥주 한 병 더.”
“헤이, 맥스. 오늘은 혼자야? 항상 달고 다니던 단짝은 어디 두고?”
그러고 보니 루카스 버튼이 늦다. 설마 이 녀석 자기를 버리고 성민의 식사 권유에 응한 건가?
맥스의 얼굴이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 그 살벌한 표정에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마스터가 슬금슬금 자리를 비켰다.
“망할 새끼. 진짜 나를 버리고 성민에게 갔다 이거지?”
물론 맥스 슈피겐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저 지금 하는 불평일 뿐이다. 그는 루카스 버튼을 믿었다. 그가 루키리그를 박살 내고 싱글A에 올라갔을 때부터 두 사람은 단짝이 됐다.
태어난 곳은 달랐지만 같은 남부 촌놈 출신. 올라간 시기도 조금씩 달랐지만, 싱글A 더블A를 거쳐 빅리그까지 3년. 그 시간 동안 둘이서 쌓아온 우정은 절대 작지 않았다.
아마 내일이면 녀석은 멋쩍은 표정으로 맥스에게 괜찮냐고 한 마디를 건넬 것이다. 그러면 맥스는 기분 나쁜 척, 맥주나 한잔 사라고 할 것이고, 녀석은 기꺼이 맥스에게 맥주를 한 잔 대접할 것이다.
시원한 맥주에 핫 윙
평소처럼 낄낄거리며 저질스러운 농담을 주고받고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욕을 실컷 내뱉을 것이다. 그래, 아마 내일이면 그렇게 될 것이다. 어쩌면 거기에 김성민이 껴있을지도 모른다. 루카스는 멋진 녀석이고, 녀석은 오늘 성민과 식사를 하면서도 맥스 자신에 대한 좋은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을 테니 말이다.
“흥, 쉽게 용서해줄 수는 없지. 내일 핫 윙은 그 녀석이 다 사야 할 거야.”
***
“이런 미친?”
하지만 바로 다음 날. 맥스 슈피겐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성민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다. 루카스 버튼은 멋진 녀석이고 성민이 녀석과 하룻밤 사이에 친구가 됐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루카스 버튼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성민이 아니었다. 성민은 언제나처럼 홀로 묵묵히 자신의 라커에서 옷을 꺼내입고 있었다.
“에두아르도 크루즈라고?”
< 투수조(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