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33화 (134/287)

< 투수조(3) >

“명문 팀.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선수라. 좋은 꿈이네.”

“역시, 너라면 말이 좀 통할 거라고 생각했어.”

너라면 말이 통할 것이다? 호의로 가득한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이야기에 성민이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2년째 성민과 함께해 온 필 니크로가 성민의 표정을 파악했다.

-너 쟤가 왜 저런 소리 하는지 모르지.

‘당연하죠.’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말을 이어갔다.

“요즘은 다들 돈밖에 모르지.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해. 작년에 성민 네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팀들을 제치고 팀 자체의 비전이 있는 다저스를 선택한 건 정말 인상적이었어.”

“아, 그렇지. 사실 나도 네 말에 동의해. 꼭 필요한 범위를 넘어선 돈은 그냥 숫자야. 진짜 중요한 건 그 숫자로 뭐를 할 수 있느냐란 말이지. 그리고 때론 정말 가치 있는 일은 그 숫자와 상관없는 곳에 있기도 하지.”

“와우, 그래.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조금 자기 자랑 같기는 하지만 난 이미 그런 걸 한국에서 한 번 경험해봤어.”

“한국에서?”

성민이 아련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한국의 프로팀은 총 10개야. 역사는 50년 정도 됐지. 그리고 내가 있던 팀은 프로리그가 만들어진 이후 단 한 번도 정규시즌에서 우승해본 적이 없던 팀이야. 포스트시즌 우승도 40년이나 못 했었지.”

“와우, 10개 팀으로 50년, 40년이면 체감으로는 보스턴의 86년이나 컵스의 108년만큼이나 심각한 것 같은데?”

“그렇지. 참 재밌는 점은 우리도 보스턴이나 컵스처럼 가장 열정적인 팬을 갖춘 팀이었고, 팀의 페이롤도 항상 상위권에 있었던 팀이라는 점이야.”

“그런데도 40년 50년 동안 우승을 못 하다니. 어지간히 운이 없었나 보군.”

“뭐, 운 말고도 다른 여러 가지 요소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난 FA 자격을 얻어서 메이저로 떠나오기 직전 그 팀을 우승시켰어. 정말 감개가 무량하더라고. 그건 어린 시절부터 나의 꿈이었거든.”

성민의 말에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되뇄다.

“꿈이라······.”

“하지만 에두아르도. 꿈이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아. 명문 팀에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선수? 어려운 일이야.”

“알고 있어. 하지만 난 내 재능에 자신이 있고 이 팀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80년대의 돈 매팅리도 그렇게 생각했었을 거야. 하지만 결과를 좀 봐봐. 양키스의 위대한 선수들 가운데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요기 베라와 M&M 이전의 선수들. 그리고 데릭 지터와 마리아노 리베라뿐이야. 그들의 기억 속에서 80년대의 양키스는 새까맣게 지워졌지.”

강한 어조로 내뱉는 성민의 이야기에 에두아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에두아르도는 돈 매팅리가 80년대 선수인지도 잘 몰랐다. 그나마 데릭 지터나 마리아노 리베라 정도나 기억할까? 그에게 요기 베라나 M&M, 돈 매팅리는 그냥 같은 옛날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용을 확실히 모른다고 해도 확신에 가득 찬 성민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왠지 신뢰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성민의 목소리에는 그런 기이한 설득력이 있었다.

“프레스톤 윌슨, 옥타비오 도텔. 모두 훌륭한 선수지. 하지만 그들이 위대한 메츠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고 있을까?”

“잠깐, 잠깐만.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팀의 성적이 중요하다 뭐 그런 이야기잖아.”

“그래, 바로 그거야.”

“하지만 그건 일개 선수인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잖아. 물론 난 최선을 다해 플레이하겠지. 하지만 팀 성적은 선수들 개개인의 역량과 감독에게 달린 문제잖아.”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보통의 팀이라면 그렇지. 하지만 지금 우리 팀 상태는 너도 잘 알잖아.”

“우리 팀 상태?”

“작년에 소문이 짜하게 퍼졌는데 설마 모르는 거야? 지금 클럽하우스 완전 콩가루 된 거?”

“아니, 그건 나도 들어서 알고 있지. 하지만 클럽하우스 개편도 됐고, 프런트부터 해서 감독님이나 코치진도 이제는 더 신경을 써 주실 테니까.”

“아니, 그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학교에서도 해봐서 잘 알잖아. 아무리 선생님들이나 코치들이 잘해주려고 해도, 학생과 선수들의 교우 관계에 관한 문제는 절대 해결해 줄 수는 없는 거. 이것도 마찬가지야. 한때 전설적인 학생이나 선수였다고 해서 지금 현역들의 관계를 개선해줄 수는 없어.”

“그러면 네 말은?”

“보스턴은 완벽하게 무너진 클럽하우스의 분위기와 전통부터 제대로 쌓아 올려야 해. 그리고 내가 생각할 때는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나?”

“그래, 너.”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직 메이저 6년 차의 선수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한국 나이로 29살. 어느 팀을 가건 간에 든든한 허리 즈음을 담당할 위치였지, 클럽하우스의 리더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젊다.

경험 역시 전무 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의 4년은 막내, 그리고 촉망받는 신예의 위치였다. 이후 오클랜드에서의 1년은 이제 곧 떠날 용병과도 같은 위치였다.

“잠깐만, 후, 너무 어려운 이야기인데, 그래서 정확히는 내가 뭐를 해야 한다는 소리야?”

“일단은 팀의 중심이 돼서 사람들을 끌어당겨야지.”

“팀의 중심? 내가? 그게 가능할까? 경험도 그렇고 차라리 성민 네가 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난 선발투수잖아. 단순히 군기반장이라면 모를까, 그건 좀 힘들지.”

“나는?”

“넌 야수잖아. 그중에서도 포수고.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포수는 좀 특별하잖아. 영향력 있는 캡틴들이 항상 포수였던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성민의 이야기처럼 포수라는 포지션은 조금 특별하다.

뭐, 철 지난 일본 만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라운드의 모든 것을 조절하는 사령관이라느니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팀 내에서 투수조와 야수조의 느낌은 같은 내무실을 사용하는 다른 분대라는 느낌이다. 때에 따라서는 서로서로 매우 친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소 닭 보듯이 하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포수만큼은 양쪽 모두와 친하다. 투수는 절대 혼자 공을 던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야수조와 투수조를 한 번에 아우를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포수다.

“아니, 그건 그렇지만. 내가 과연 가능할까?”

“이봐, 에두아르도. 자신을 가져도 좋아. 지금 이 팀의 선수 중에서 커리어, 폼, 연봉. 모든 걸 고려했을 때 너를 따라올 만한 선수는 없어. 베테랑들이야 알아서 너를 존중해줄 거고 문제는 천지분간 못하는 애송이들인데 그 녀석들이야 뭐······.”

“뭐?”

“그러니까 이렇게 움직여 보자고.”

“어떻게?”

“인기인과 왕따. 그리고 왕따에게 힘이 되는 독고다이?”

***

성민과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식사를 하던 바로 그때.

맥스 슈피겐과 루카스 버튼을 비롯한 보스턴 출신의 젊은 선수들과 유망주들 역시 자기들끼리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까 다들 작년의 일을 잊지 말자고. 응? 꼰대들이 하는 짓거리 봤잖아. 그 인간들은 아직도 20세기를 살고 있다고. 우리가 또 조금만 틈을 보이면 그와 비슷한 짓거리를 저지를 인간들이야.”

“확실히 작년에 그 치들은 좀 심하긴 심했지.”

맥스 슈피겐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작년에 그 치들만 심한 게 아니야. 내가 보기엔 이번에 합류한 녀석들도 만만치 않아. 아까 봤잖아. 김성민 자연스럽게 먼저 연습용 마운드 올라가서 공 던지고,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김성민 공만 받고 쏙 빠져버리는 거.”

“하긴, 나도 그 모습은 좀 보기 그렇더라. 아니 이왕 나왔으면 좀 같이해주면 되지 굳이 그렇게 티를 내야 하는 건가?”

“에이, 그래도 그 선배들은 그만한 커리어가 있잖아.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런 건 인정해야지.”

“커리어? 김성민 이제 고작 메이저 2년 차야. 커리어는 무슨.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도 마이너 성적 다 들고 와야지.”

“하긴, 그건 또 그렇지.”

맥스 슈피겐의 단호한 이야기에 몇몇 선수들이 그의 말이 옳다며 호응했다. 그 모습에 루카스 버튼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굳이 여기서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것은 맥스 슈피겐이었다. 맥주도 한 잔 들어가 다들 기분이 좋은 상황에서 굳이 단합을 깨트릴 필요는 없었다.

“하여간, 우리끼리는 지금처럼 단단하게 뭉치자고. 다들 결과 봤잖아. 거들먹거리던 그 머저리들 다 튕겨 나간 거.”

“당연하지. 우리 내일도 연습 끝나고 또 여기서 뭉치자고.”

***

스프링 트레이닝 이틀째.

맥스 슈피겐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확실히 재능은 출중한 녀석이었다. 셔틀런에서 그는 압도적인 속도로 1등을 차지했다.

‘어떠냐.’

물론 성민은 그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성민이 신경 쓴 것은 필 니크로의 잔소리 쪽이었다.

-엄살 부리지 말아라. 아직 더 쥐어짜 낼 수 있어.

‘젠장, 엄살은 누가 엄살을 부립니까. 나보다 내 속을 훤히 더 잘 들여다보는 양반 앞에서.’

-아직 허벅지에 여력이 남았어. 몸에 힘 풀지 말고!!

‘합니다!! 해요!!’

훈련은 어제와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성민의 수비는 여전히 일품이었다. 다만 어제와 오늘 성민이 보여준 모습에 자극을 받은 탓일까? 수비 연습에서 맥스 슈피겐이 아낌없이 몸을 날렸다.

한국의 코치들이었다면 파이팅이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박수를 쳐줬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쯧쯧, 고작 스프링 트레이닝 이틀째인데 저게 무슨 짓인지. 아직 날도 다 풀리지 않았건만.

‘그러게요. 그나저나 저 녀석도 무지 알기 쉽네요.’

루카스 버튼이 그런 맥스 슈피겐을 말렸다.

“이봐 맥스, 4년 전을 기억하라고. 너 스프링 트레이닝 처음 올라와서 좋다고 날뛰다가 정작 시즌은 말아먹었었잖아. 덕분에 메이저 콜업도 1년 늦어졌고.”

“아니, 그게 꼭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날뛰어서 그랬다기보다는······.”

“어차피 이번 주는 그냥 천천히 몸 푸는 주잖아. 중요한 건 시범경기.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정규시즌이야.”

맥스 슈피겐이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역시 피칭 연습에서 성민이 가장 먼저 공을 뿌렸다. 공을 받는 것은 여전히 에두아르도 크루즈였다. 하지만 반응이 어제와는 조금 달랐다.

-뻐엉!!

에두아르도가 별다른 리액션 없이 묵묵히 공을 받았다. 그리고 공을 다 던진 성민이 짐을 챙겨 자리를 떴지만, 어제와 달리 에두아르도가 따라붙는 일은 없었다.

물론 항상 함께 빠져나가리라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서로 인사조차 없이 쌩하니 자리를 뜨는 모습은 뭔가 조금 이상했다.

‘뭐야? 어제만 해도 세상 다시없이 친근하게 굴더니 오늘은 또 왜 저래?’

‘싸운 건가?’

‘그런가? 그러고 보니까 아까 라커룸에서도 서로 눈도 안 마주치긴 하던데?’

‘싸웠네, 싸웠어.’

에두아르도가 작년 메이저에서 공을 던졌던 25살의 3년 차 불펜 투수를 불렀다.

“거기 카일이라고 했나? 이리 와서 공 좀 던져봐. 공 좀 보자.”

“어? 어!!”

카일이 끝이 아니었다.

카일에 더해서 아직 메이저를 밟지 못한, 하지만 언젠가 밟을 것이 확실한 보스턴의 유망주 둘을 더 봐줬다.

“이봐, 너희들은 끝나고 잠깐 식사나 같이하는 거 어때? 오늘 던진 공에 대해서 할 이야기도 좀 있고, 괜찮은 식당도 좀 소개받고 싶은데 말이야.”

그들 세 사람은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펍에서 에두아르도에 대한 불평을 늘어놨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과 놀아주지 않는 인기인에 대한 불평이었다. 그 인기인이 직접 식사를 권하는 바로 그 순간, 오늘 훈련을 끝내고 함께 모이기로 했다는 선약은 머릿속에서 새까맣게 사라졌다.

“그래 좋아. 내가 죽이는 곳으로 안내할게.”

< 투수조(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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