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32화 (133/287)

< 투수조(2) >

에드 맥밀란의 큰소리가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슬아슬했다.

특히 마지막 공에서는 살짝 식은땀까지 흘렀다.

물론 지금 자신의 몸은 최고의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몸 상태만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투수 쪽이 훨씬 더 긴 준비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뭐 그 부분이야 차차 익숙해지면 될 테니까.’

연습 피칭을 끝낸 성민이 자신의 짐을 챙겼다. 에두아르도 크루즈 역시 포수 마스크를 벗었다.

“코치님, 저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왜? 다른 애들 거 더 안 받고?”

“첫날이잖아요. 몸도 덜 풀렸는데 이 정도면 됐어요.”

“오케이. 알았어.”

대기하던 다른 투수 중 몇몇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그럴 자격이 있는 선수였다. 커리어, 현재 폼, 연봉. 어느 것 하나 뒤지는 것이 없다. 그는 종합적으로 따져봤을 때,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입지가 단단한 선수였다. 애초에 오늘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서둘러 성민을 따라잡았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에두아르도를 바라보며 성민이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저거 저러면 안 좋은데.’

-뭐가?

‘저렇게 빠르게 일어나는 거요.’

-왜? 너도 그렇게 했잖아.

‘저야 어차피 제 공 던지고 떠나면 되는 투수잖아요. 포수는 다르죠. 애초에 포수들이 야수인데도 투수조 소집일에 맞춰서 오는 이유가 뭔데요. 투수 공 잡아주러 오는 거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애초에 에두아르도 크루즈 정도면 오늘 나오지 않아도 되는 녀석이었잖아. 뭐 상관이 있을까?

‘당연히 상관이 있죠. 차라리 오늘 아예 안 나오면 모르겠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나왔잖아요.’

-그래서? 굳이 나올 필요 없는 데도 나왔으니 이미지 더 좋아진 거 아니야?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저 녀석 오늘 처음으로 팀에 합류하는 날이잖아요. 뭐 아예 나오지 않았으면 저 녀석 커리어도 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겠지만, 굳이 나와서 포수 마스크까지 꼈는데, 저 수많은 사람 중에서 딱 한 사람 공만 받아주고 사라진다면 남은 애들은 어떻겠습니까? 게다가 그것도 하필 자기처럼 굴러온 돌인 저 아닙니까.’

-그거야 네가 가장 먼저 공을 던졌으니까.

‘그러니까요. 객관적으로 팀의 에이스가 저라는 건 쟤들도 다 알아요. 그래서 더 재수 없는 겁니다. 이건 심보가 배배 꼬인 애들이 보기에는 내가 여기서 공 받을 가치 있는 건 에이스뿐이다. 라고 선언하는 거나 다름없다니까요.’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꼬인 녀석이 있으려고.

‘보통 열 명이 모이면 한두 명은 병신이거든요. 근데 저기 투수만 서른 명이 넘습니다. 사회생활 하려면 그런 병신까지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게 보통이에요.’

이런 사소한 일에도 거기까지 생각을 하는 게 보통이라고? 필 니크로가 잠시 보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는 사이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성민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헤이, 공 좋던데?”

“너도 잘 받던데. 마지막 즈음에는 작정하고 던졌는데 말이야.”

“가슴이 조금 철렁하는 공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해줘야지. 나를 믿고 여기를 선택했다는 사람한테 말이야.”

필 니크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런 거짓말에 속다니.

‘거짓말은 아니죠. 실제로 저 친구 아니었으면 올리버 녀석 데리고 왔어야 할 텐데, 그 녀석 정말 엉망진창인 거 잘 아시잖아요.’

-하긴, 그건 그렇지.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말을 이어갔다.

“작년에 Passed ball(포일)이 15개였나?”

“17개야.”

“그래? 기록에는 15개라고 봤던 것 같은데.”

“와일드 피치가 9개가 아니라 7개였어. 2개는 그 녀석이 못 받았던 거라고.”

“그거 올해는 한 자릿수로 줄여주지.”

에두아르도의 장담에 성민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고작?”

“이봐, 고작이라니. 지금 내가 거의 절반으로 줄여주겠다는 소리인데.”

“글쎄, 마이크 올리버나 에드 맥밀란도 슬슬 익숙해지고 있었는데, 만약 그 친구들이 올 시즌에 다시 전담했어도 한 자릿수였을 것 같단 말이지.”

“흥, 마이크 올리버라면 몰라도 에드 맥밀란 자식은 포스트시즌에서도 포일만 두 번을 저질렀는데 익숙은 개뿔.”

“그렇구나. 에드 맥밀란이라면 몰라도 마이크 올리버는 너랑 비슷한 수준이라고 인정을 하는 거구나.”

“젠장, 이거 너무 뻔한 도발 같아서 넘어가고 싶진 않지만. 여덟 개, 아니 일곱 개 미만으로 끊어주지. 대신 오늘부터 연습할 때는 무조건 나만 부르라고. 알겠어?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 공은 그냥 대충 받겠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녀석이로군.

‘에드도 그렇고, 확실히 최고의 자리를 경쟁하는 놈들은 근성이 있어요.’

-그런 근성이 없었다면 아무리 재능이 넘친다고 해도 저 자리까지 가는 건 쉽지 않았겠지. 네 녀석처럼 말이다.

‘에이, 왜 또 여기서 저를 들먹이십니까. 그리고 저도 짬밥 안될 때는 나름대로 파이팅이 넘쳤다고요. 오히려 너무 파이팅이 넘치는 바람에 여기저기 고장이 나면서 망했던 케이스죠. 뭐 어쨌거나 저렇게 단순하니까 써먹기는 참 좋겠네요.’

-써먹기 좋겠다고? 너 대체 지금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냐?

‘에이, 엉뚱한 생각은 무슨 엉뚱한 생각입니까. 그냥 팀의 발전을 위한 작은 아이디어죠.’

성민이 에두아르도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오케이. 딜.”

“딜.”

그리고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그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가볍게 가져다 댔다.

“뭐, 그러면 이렇게 됐으니, 내가 저녁 한 끼 사도록 하지. 혹시 선약 있어?”

“아니, 선약은 없는데, 어디 좋은 곳 알아?”

“그럴 리가. 나 이제 미국 2년 차에, 플로리다는 처음이잖아. 좋은 곳은 네가 안내해야지. 너 재작년까지 여기서 스프링 트레이닝 참가했었잖아.”

“내가 있던 곳은 여기랑 좀 떨어진 곳이긴 했지만······, 아 그래, 근처에 괜찮은 멕시칸 레스토랑은 하나 아는데, 멕시코 요리 괜찮겠어?”

“멕시코 요리 괜찮지. 아, 미리 말하지만 나 술은 안 마신다.”

“맥주도?”

“알콜에 조금 약해서 말이야.”

“그건 조금 아쉽군. 하지만 뭐 콜라도 나쁘진 않으니까. 그걸로 대신하자고.”

성민과 에두아르도가 떠나는 자리.

맥스 슈피겐이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재작년 7월 중순 메이저에 콜업 되어 41.1이닝 동안 5.23. 작년에는 176이닝 동안 4.55. 마이너 4년 만에 빅리그에 진출해서 올해 나이 만 24세. 올해로 메이저 3년 차에 들어서는 맥스 슈피겐은 제법 괜찮은 선발투수였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 상당히 뛰어난 투수라고 봐도 무방했다. 성민과의 트레이드로 다저스로 떠난 에밀리오 가르시아와 비교해도 그리 뒤처지는 재능이 아니다. 실제로 그도 빅리그에 콜업 되기 직전에는 BA 리포트 전체 11위에 이름을 올릴 만큼 대단히 기대받던 유망주였다.

“젠장, 저 자식들. 벌써 자기들끼리만 쿵짝을 맞추고 있군. 재수 없어.”

“맥스, 너무 고깝게 보지 말자고. 그래도 작년에 그 영감들처럼 이래라저래라 잔소리 없이 깔끔하게 사라져주는 게 낫잖아?”

맥스 슈피겐보다 한 살이 많은 만 25세. 하지만 메이저 커리어는 그와 마찬가지로 3년 차. 작년 4.0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불펜 투수 루카스 버튼이 그를 달랬다.

“그야 그렇지만, 나같이 잘난 사람은 같이 잘난 녀석 공만 딱 받고 사라지겠다는 태도도 재수 없는 건 마찬가지잖아.”

“뭐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첫날부터 나온 게 어디야. 그 영감들은 둘째 날에 뒤룩뒤룩 살찐 모습으로 등장해서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만 늘어놨었잖아. 최소한 저 녀석들은 자기관리는 하고 나타났잖아.”

확실히 태도만 따지자면 확실히 작년 그 녀석들이 더 엉망인 것은 사실이었다. 루카스 버튼이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이제 신경 끄고 우리 훈련이나 잘하자고. 만약 저쪽에서 꼰대처럼 굴면 그때 나서도 늦지 않아.”

“알겠어.”

맥스 슈피겐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이 이어졌다.

***

에두아르도가 안내한 곳은 멕시코 요리점이라고는 하지만, 미국의 식당이 다 그렇듯 정확히는 미국식 멕시코 요리점이었다.

“이거 맛 괜찮은데?”

“맛있다니 다행이네. 남미 쪽 친구들을 데리고 왔을 땐 이런 건 진짜 타코가 아니라고 투덜댔었는데 말이야.”

“뭐, 나도 여기서 코리안 레스토랑을 가면 마찬가지로 이건 진짜 한식이 아니라고 투덜댈걸? 하지만 뭐 음식이 현지화되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 참고로 난 오리지널 중국요리보다 미국식 중국요리가 더 취향이더라고.”

“그래? 그러면 나중에 오클랜드를 가게 되면 같이 중국요리나 한 번 하자고. 내가 아주 죽여주는 곳을 알고 있어.”

“그거 좋지.”

성민이 에두아르도와 별거 아닌 잡담을 나누며 친목을 다졌다. 애초에 에두아르도 역시 시즌을 함께 치를 에이스와 어느 정도 친해지겠다는 마음으로 나섰던 만큼 대화가 이뤄지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에두아르도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정말? 네가 연장에 사인한 게 내가 연장계약을 맺은 걸 알고 난 이후였다고?”

“어, 솔직히 말하자면 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떠나고 싶지 않았었거든. 내가 보여주는 모습을 생각하면 10년 2억 5천만도 많은 돈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사실 그때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도 내가 제시했던 금액에 상당히 좋아하면서 계약을 진행하려고 했었어.”

“뭐, 그건 그렇지. 솔직히 에드 맥밀란이 받는 돈이나, 요즘 올스타급 선수들 몸값을 생각하면 꽤 디스카운트를 해준 금액이었잖아. 근데 왜 계약이 아니라 트레이드가 이뤄졌던 거야?”

“내가 전 구단 대상으로 트레이드 거부권을 요구했거든. 사실 내가 그만큼 디스 카운트를 해주는 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이기 때문이니까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구단 생각은 조금 다르더라고. 난 그걸 나랑 싸게 계약을 맺고 어디든지 좋은 곳에 팔아넘기겠다는 의도로밖에는 읽을 수 없더라고.”

현대의 프로 스포츠에서 원클럽맨이 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특히나 야구는 더 그렇다.

“어차피 어느 팀을 가건 떠돌아다니는 건 마찬가지인데 대체 왜 그런 거야?”

“그냥, 우리 할아버지처럼 되고 싶지가 않아서 말이야.”

“할아버지?”

“어, 훌륭한 라인백이셨는데 13년을 뛰는 동안 무려 9개 팀에서 뛰셨었어. 그리고 그걸 무척이나 안타깝게 생각하셨지. 이왕이면 한 팀에서 진득하게 뛰었다면 훨씬 더 좋은 선수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마음? 어차피 돈이야 억을 넘어가는 순간부터 크게 의미 없잖아. 내 손자까지 써도 충분한 거금인걸. 난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되고 싶어.”

“그래서? 보스턴에서라면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계획도 좋고, 실행력도 좋더라고. 나한테도 전 구단 대상으로 트레이드 거부권을 줬을뿐더러, 너를 진짜로 데리고 왔고, 게다가 너에게 6년짜리 연장계약까지 그렇게 체결하는데 그 의지를 의심할 이유가 없겠더라고. 무엇보다 보스턴은 빅마켓에, 명문이잖아.”

“으음, 명문이라. 뭐 팬 충성도로 따지면 그건 그렇지.”

성민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괜찮네요. 특히 조금 멍청하지만 훌륭한 성품인 점이 참 써먹기 좋겠어요.’

-지금 욕을 하는 거냐, 아니면 칭찬을 하는 거냐? 그리고 대체 뭐에 써먹겠다는 거야?

‘상상도 못 할 인품과 실력으로 모두를 포섭하는 굴러온 돌이요.’

-응?

< 투수조(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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