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31화 (132/287)

< 투수조(1) >

2034년 2월 11일.

이번 시즌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뛰게 될지도 모르는 투수와 포수들이 플로리다에 모였다. 보스턴에서 애지중지하는 애송이들, 이제 막 메이저에서 활약하기 시작하는 젊은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실낱같은 기회를 노리는 노장들과 마이너와 메이저의 경계에 선 선수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과 상관없는 거물들까지.

‘김성민이야.’

‘트레이드 거부 목록에 보스턴이 있었다고 하던데, 그걸 풀어줬다며? 무슨 생각인 거지?’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다저스를 버리고 보스턴을 선택할 이유가 없잖아.’

‘맞아, 게다가 원래 보스턴에서는 훨씬 후한 조건을 제시했었잖아. 더 후한 조건 걷어차고 다저스 간 주제에 이제 트레이드라고?’

‘뒤에서 따로 뭔가 보장을 했겠지. 설마 그냥 왔겠냐?’

‘젠장, 프랜차이즈나 챙길 것이지. 하여간. 그래 좋아. 그건 그렇다 치자고. 근데 이게 뭐야? 성적 좀 좋다고 짬까지 무시하는 거야? 기껏해야 2년 차에게 제일 좋은 라커를? 어이가 없구만.’

올스타.

신인왕.

실버슬러거.

월드시리즈 MVP.

사이 영 2위.

MVP 7위.

메이저에 데뷔한 지 이제 고작 1년. 하지만 화제성, 그리고 무게감으로 따질 때 오늘 보스턴에 모인 투수 가운데 성민을 따라올 만한 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라커룸의 가장 좋은 자리, 가장 커다란 라커가 그에게 배정된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성민이 미리 준비해온 짐들을 푸는 사이, 라커룸 한켠이 또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야, 저기 에두아르도야.’

‘뭐야? 벌써 온 거야? 첫날 정도는 불펜 포수들에게 맡겨도 될 텐데 의욕이 대단한데?’

‘보스턴에서만 앞으로 8년을 뛰어야 하는 상황이잖아. 그 정도 의욕은 있어야지.’

‘성민도 그렇지만, 난 에두아르도가 더 이해가 안 돼. 트레이드야 그렇다 치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보스턴이랑 7년 2억짜리 계약을 덜컥 맺어 버린 거야? 뭐 거기까진 그렇다고 쳐. 5천만은 30년짜리 디퍼라니. 이건 너무 퍼주는 계약이잖아.’

‘근데 저 친구 돈 욕심이 많은 친구는 아니었잖아. 애틀랜타 시절에도 10년 2억 5천만 요구하지 않았었어?’

‘에이, 아무리 그래도 10년 2억 5천만이랑 7년 2억은 다르지. 게다가 디퍼가 포함된 건데.’

정확하게 라커룸을 반으로 나눴을 때, 성민의 정 반대편.

마찬가지로 성민만큼이나 커다란 라커에 에두아르도가 짐을 풀었다. 야수조의 소집까지는 일주일가량이 남았지만, 포수들의 경우 투수의 공을 받아야 하는 만큼 투수조와 같은 시기에 소집된다.

적당히 짐을 푼 성민이 먼저 에두아르도에게 다가갔다.

“반가워. 반년 전에 봤었지?”

“와우, 날 기억해주는 거야? 나에게는 조금 충격적인 만남이었지만 성민 너에게는 그냥 별거 아닌 일 일줄 알았는데 말이지.”

“원래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에드가 틈만 나면 네 이름을 들먹였거든.”

“뭔가 좋은 소리는 아니었을 것 같지만, 그래도 내 이름을 들먹였다니 기분은 나쁘지 않은데?”

“좋은 소리만 했었으니까 더 기뻐해도 괜찮아. 내가 이 팀을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그 좋은 소리도 상당 지분을 차지한다고.”

“흐음, 그러니까 나 때문에 여길 선택했다 뭐 그런 소리네?”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발표는 성민보다 하루 늦었지만,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트레이드에 대한 도장 자체는 이미 찍힌 이후였다. 발표가 미뤄진 것은 그의 연장계약에 대한 이슈, 그리고 성민과 에두아르도 영입을 거의 동시에 발표함으로써 여론을 반전시키려는 보스턴의 단장 존 맥도웰의 속셈 덕분이었다.

“에드가 매일 그랬거든. 네가 그래도 공 받는 거 하나는 자기보다 낫다고.”

물론 에드 맥도웰은 정확하게 이렇게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보통은 그 자식은 다 구리지만 그래도 공 받는 거 하나 정도는 봐줄 만하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였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기분 좋게 웃으며 답했다.

“그 인간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뭐 나쁘진 않네. 하지만 한 가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

“응?”

“공을 받는 것만이 아니야.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순간에는 난 그 녀석보다 훨씬 좋은 선수야. 오늘 그걸 확실히 보여주도록 하지.”

라커룸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선수 둘의 대화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중에는 마이너 시절부터 끈끈함을 유지하며 올라온 보스턴 순혈의 2, 3년 차 햇병아리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흥, 아주 자기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잘하는구먼.”

“맥스. 또 왜 그러는 거야.”

“배알이 꼴려서 그런다 왜. 아니, 무슨 놈의 팀이 매일 외부 FA에다가만 거액을 퍼주고 이러니까 프랜차이즈가 안 나오는 거잖아. 젠장.”

“에이, 에두아르도 크루즈한테 7년 2억이면 그리 큰 금액도 아니지. 게다가 포수잖아. 우리랑 호흡 맞출 포수를 좋은 녀석을 데려다 준건데 나쁠 건 없지.”

“아론도 조금만 시간을 더 줬으면 에두아르도 크루즈만큼 잘할 수 있었을 거야. 그 녀석이 얼마나 열심히 했었는지는 너도 잘 알잖아.”

“뭐, 그건 그렇지.”

“그리고 김성민도 뭐 다들 쉬쉬하지만, 알고 있잖아. 어차피 뒤로 몰래 연장계약 맺고 왔을 거라는 거. 에밀리오도 2년? 3년만 지나면 저 녀석보다 훨씬 괜찮은 모습을 보였을 거라고. 젠장. 무능한 주제에 큰소리만 치고, 이상한 악습이나 강요하던 늙은이들 치워줄 때는 이제야 드디어 좀 제대로 된 선택을 하나 했는데, 여전히 엉망진창이야.”

“그건 아직 확실한 사실도 아니잖아. 괜히 미리부터 흥분하지 말자고. 그리고 저 치들이 그 늙은이들과 똑같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그러니까 우리 천천히 하자. 응?”

“몰라, 하여간 조금만 엿같이 굴어보라고. 내가 아주 가만히 두지 않을테니까 말이야.”

첫날의 가벼운 훈련 시간.

흐름은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성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물론 작년에도 물론 성민에게는 많은 시선이 모였다. 아무것도 보여준 것이 없는 외국 리그의 투수에게 3년 6,600만 달러를 비딩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때의 시선이 네가 과연 연 2,200만 달러짜리 투수냐? 라는 도발적인 물음이 담긴 시선이었다면 지금 성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저게 바로 그 수많은 업적을 이뤄낸 투수구나 하는 선망이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마린스에서는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운동능력과 놀라운 수비실력.

다저스에서는 딱 중간 수준의 운동능력과 수비실력.

운동능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만으로 31세. 한국 나이로 서른셋. 슬슬 운동능력이 감소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는 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나이가 만으로 서른을 넘긴 이후부터는 근육의 성능이 약 1%씩 저하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꾸준한 관리와 필 니크로의 지독한 잔소리. 그리고 작년보다 더 적절한 부위에 적절하게 배분된 근육의 양이 그것을 메워주었다.

성민의 운동능력은 여전히 수많은 투수 가운데 중간 수준이었다.

하지만 수비 실력은 조금 달랐다.

“와우. 대단한데?”

“흥, 뭐 나쁘진 않군.”

“이봐 맥스. 불퉁한 건 알겠지만 그래도 우리 대단한 건 대단하다고 하기로 했잖아. 애써 남의 실력을 폄훼하는 건 그 늙은이들과 다를 게 없는 짓이라고.”

“젠장, 그래. 인정한다. 인정해. 대단하긴 대단하네.”

보스턴 선수들의 수준에 비해 다저스의 선수 수준이 워낙에 높았기 때문일까?

물론 그 영향도 있었다. 평균이 90점인 곳에서 89점은 평균 언저리지만 평균이 80점인 곳에서 89점은 놀라운 실력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다.

1년 차. 다저스에서 스프링 트레이닝을 치렀던 성민은 필 니크로 2년 차, 메이저 1년 차, 그리고 무엇보다 마린스 11년 차의 투수였다.

본래 100 미터를 10초에 뛸 수 있는 재능을 지닌 사람이라고 해도, 10초에 뛰나 11초에 뛰나 보상과 결과가 똑같다면 자기도 모르게 11초에 만족한다. 과거의 성민이 그와 같았다.

하지만 다저스라는 말도 안 되는 팀에서 1년. 페데리코 수라는 역대급 유격수와 마르타 블랑코라는 메이저 최고 수준의 이루수로 이뤄진 키스톤과 호흡을 맞췄다.

그들의 상식과 성민의 상식은 달랐다.

성민에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었고 성민에게 ‘이게 돼?’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해볼 만하다.’라는 것이었다.

상식의 파괴. 그리고 재정립.

다저스에서의 1년은 성민의 수비를 확실하게 바꿔놓았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보스턴의 코치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희가 파악하고 있던 것보다 수비가 한층 뛰어난데요?”

“글쎄, 단순히 오늘 컨디션이 좋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아니 그럴 확률이 더 높지 않겠어? 저 나이에 성장이라니 너무 만화 같은 이야기잖아. 애초에 종합적인 기량이 쇠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말이야.”

“글쎄요. 성민의 경우 일반적인 마이너를 거쳐 올라온 선수들과는 조금 사례가 다르죠. 게다가 운동능력만 따지면 작년 기록과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종합적인 기량이 성장했어도 이상할 건 없죠. 제가 보기에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성장이 있지 않았나 싶군요.”

“그럴 수도 있긴 하겠군. 어쨌든 이 부분은 앞으로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지.”

몇 가지 훈련을 끝내고 마침내 공을 던져볼 시간이 찾아왔다.

“자, 다들 첫날이니까 무리하지 말고. 살살. 알지?”

“네!!”

“맥스, 너 말이야 너. 괜히 신난다고 막 던지지 말고.”

“아니, 제가 무슨 스무 살짜리 애도 아니고. 이제 안 그럽니다.”

“혹시 조금이라도 불편한 곳 있으면 바로 이야기하고. 근육통으로 끝날 일 크게 만들면 더 골치 아파진다.”

투수 코치의 잔소리에 필 니크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메이저리거가 무슨 애들도 아니고. 저 정도도 못 지키는 녀석들이라면 어차피 마이너에서 다 걸러졌을 텐데. 쓸데없는 이야기로군.

‘여기 아직 어린 애들이 많잖아요. 그리고 영감님 시절이랑 지금이랑 다르죠. 요즘 유망주가 얼마나 금값인데요. 아주 금이야 옥이야 키운답니다.’

-흥, 그러니 팀이 이렇게 개판이 되는 거다. 베테랑을 존중할 줄 모르는 애송이라니.

‘왜 또 화가 잔뜩 나셨습니까. 어디서 또 무슨 헛소리 들으셨어요?’

-아니다. 말해 뭐하겠냐. 하여간 마음 단단히 먹어라. 이 녀석들 싸가지가 보통이 아닌 것 같으니까.

‘에이, 각오는 무슨. 그리고 애초에 예상은 했습니다. 원래 군대에서도 선임들 잔뜩 데리고 큰 놈들보다 그냥 왕처럼 큰 놈이 똥군기가 더 쎈 법이에요.’

-갑자기 왠 군대? 너 면제 아니냐? 한국 군대는 국제대회 우승하면 면제잖아.

‘한 달간 훈련받으면서 군대 이야기는 충분히 많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제 친구들은 대부분 다 현역이에요. 걔들이랑 술 마시면 군대 이야기만 10시간을 내리 들어요. 그 이야기들만 다 합쳐도 거의 2년 복무한 거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근데 영감님 한국 군대는 또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강진호 때 그걸로 얼마나 시끌벅적했는데, 내가 그걸 모르겠냐.

아무리 보스턴의 클럽하우스 기강이 개판이라고 해도, 이런 공식적인 훈련에서까지 질서가 무시되지는 않았다.

커리어, 그리고 현재 기량. 너무나도 당연하게 성민은 대기 없이 연습마운드에 올랐다.

‘영감님, 군대에서 왕처럼 지랄하면서 똥 군기 잡으려는 머저리들은 자기보다 짬밥이 되는 선임이 전입을 오면 선임 취급을 안 해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럴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아십니까?’

분명 성민은 면제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그걸 지적하고 싶은 마음보다 궁금증이 더 생긴다. 필 니크로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생각보다 간단해요. 그냥 그 새끼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실력과 정치력으로 걔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포섭하면 됩니다.’

-간단?

대답 대신 던진 성민의 72.3마일 너클볼이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미트를 두들겼다.

“굿!!”

< 투수조(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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