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봄 >
존 맥도웰의 입에서 2억 4천만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순간, 필 니크로가 보인 반응은 경악이었다.
-이런 미친?
2억 4천만달러.
사실 지금 성민이 받는 6천6백만만 하더라도 필 니크로가 생각하기에는 상상하기 힘든 거금이었다. 물론 그 역시 자신의 시대와 달리 현대의 선수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받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애초에 그는 계약금 250달러도 본인이 팀에 지불해야 하는 줄 알았던 남자다. 전성기 리그 최고 수준의 투수로 받았던 금액이 연간 100만 달러 수준. 물론 80년대와 지금의 100만 달러는 가치가 다르다. 하지만 어쨌거나 총 수치로만 따져도 그가 받았던 커리어 연봉 총액은 성민의 1년 치 연봉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6년 2억 4천만. 연 4천만이라는 금액은, 어쩌면 가치로 따져도 그가 살아생전 받았던 연봉 총액을 능가하는 거액이었다.
-맙소사, 말 몇 마디로 상대방이 내놓을 수 있는 한계치를 긁어내다니. 대단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네? 한계치라뇨. 너무 몰아붙이면 감정 상할까봐 적절한 곳에서 스톱 해준 건데요.’
-이게 적절한 곳에서 스톱을 해준 거라고?
‘당연하죠. 그리고 애초에 그런 감정 상할 일 하라고 에이전시 고용한 거잖아요. 제가 직접 할 이유가 없죠. 지금 이건 그냥 러프하게 저쪽에서 각오한 부분까지만 끌어낸겁니다. 여기서 이제 디테일한 부분은 제 돈 받아먹는 에이전시가 처리해야죠. 광고 제의나 기타 잡일이나 하라고 제가 5%나 주고 부려먹는 거 아니잖습니까. 이런 계약에서 자기 몫 챙겨 와야죠.’
-허, 아무리 생각해도 현역 시절에 너 같은 녀석을 에이전시로 고용했어야 해.
‘에이, 에이전시는 저처럼 남의 입장까지 생각해주는 착한 사람이 하면 안 됩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건 아무 상관 없이 악랄하게 골수까지 쪽 빨아먹는 사람이 해야죠.’
필 니크로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것이야말로 성민의 대단한 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그는 존 맥도웰의 골수를 야무지게 쪽 빨아먹었다. 하지만 본인은 적당히 상대의 사정을 봐줬다고 생각한다. 더 심각한 부분은 상대방 역시 이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지금 성민이 내민 손을 움켜쥐는 존 맥도웰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마 지금 저 다행이라는 표정은 녀석의 에이전시인 빅터 모리츠를 만나면 한 번 더 일그러지겠지.
“그러면 자세한 세부사항은 제 에이전시를 만나서 합의하시죠.”
“알겠습니다. 다저스 쪽에는 제가 이야기를 해두도록 하겠습니다.”
“뭐, 그 부분도 제 에이전시가 알아서 할 겁니다. 지금 저희는······.”
성민이 부드럽게 웃으며 찬장에서 샴페인 한 잔을 꺼내 존 맥도웰에게 권했다.
“논 알콜이기는 합니다만 분위기를 내는 데는 나쁘지 않죠.”
“샴페인이라. 좋죠.”
호구를 잡힌 사람이, 그 호구를 잡은 상대와 기분 좋게 샴페인을 나누는 이 대단한 모습에 필 니크로가 다시 한번 크게 감탄했다.
“아, 그리고 발표에 관해서는 제가 최대한 편의를 봐드리도록 에이전시에게 이야기 해두겠습니다. 아무래도 당장 재계약을 발표하는 것보다는 최소한 내년 시즌 정도는 뛰고 발표하는 게 더 나을 테니 말이죠.”
“······.”
존 맥도웰이 성민의 이야기에 잠시 침묵했다. 손해일까? 이득일까? 그것은 순전히 성민의 내년 성적에 달린 일이기는 했다. 만약 메이저에서 4년, 5년 정도 괜찮은 성적을 기록한 만 30세 투수가 올해 성민만 한 성적을 거뒀다면 이런 계약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제 메이저 1년 차. 무엇보다 지금 존 맥도웰에 관한 여론도 좋지 않은 상황이다.
게다가 내년 적당히 1선발급의 성적만 거둬준다고 해도 이 계약은 그리 욕먹을 계약은 아니다.
“사실 뭐 그래 봐야 눈 가리고 아웅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내년 제 성적이 나오고 발표 나는 게 아무래도 그림이 더 괜찮긴 하겠죠. 1년짜리 증명과 2년째의 증명은 좀 다르니까요.”
존 맥도웰이 답했다.
“그래 주신다면 저로서는 크게 부담을 더는 일이 될 것 같군요.”
“그러면 그 부분은 그렇게 하도록 하죠.”
-지금까지 채찍질했으니 이제는 당근으로 달래겠다. 그런 이야기로구나.
‘뭐 그것도 있고, 겸사겸사죠.’
-겸사겸사?
‘저도 보스턴에서 뛸 건데 이미지 관리 해야잖습니까. 돈 때문에 보스턴으로 옮겼다는 말보다는 보스턴의 비전에 공감해서 트레이드 거부를 풀었다는 이야기가 더 보기 좋죠.’
-나중에 어차피 밝혀질 이야기라면서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냐?
‘나중에는 제 실력이 6년 2억4천만은 아깝지 않은 실력인게 밝혀질텐데 무슨 상관입니까. 게다가 뭐, 실제로 보스턴의 비전쪽이 마음에 드는것도 있으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거든요.’
-비전이 마음에 든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월드클래스의 스타가 되고 싶다고.’
-그랬지. 그런데 그건 LA에 남아서 저 헐리웃 스타들과 교분을 꾸준히 나누는 거로 하려던 거 아니었냐?
‘제가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야구보다 유명한 선수가 되겠다고. 이건 그 첫걸음입니다. 어차피 시즌 시작되면 지금처럼 파티 참여 못 하는 건 똑같아요. 그리고 야구 외적인 화제는 지금에서 천천히 키워나가는 거로 충분하고요. 오히려 그걸 폭발시키려면 야구에서 압도적인 화제를 몰고 다니는 선수가 되는 게 먼저입니다. 만약 LA다저스에 있으면 우승팀 LA다저스의 선발투수 김성민이지만, 보스턴에 간다면 김성민의 보스턴 레드삭스가 될 수 있습니다.’
-김성민의 보스턴 레드삭스?
‘네, 지금 보스턴은 개판이잖아요. 하지만 보스턴은 여전히 메이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기팀이죠. 그리고 지금 존 맥도웰의 계획이라면 당장 내년 시즌이라도 높은 곳을 노려볼 수 있을 겁니다. 거기에 중심이 되는 선수라면 화제를 몰기에 충분하죠.’
필 니크로가 반문했다.
-하지만 네가 분명 어디나 계획은 그럴싸하다고.
‘에이, 그 계획에 제가 끼잖습니까. 게다가 존 맥도웰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보스턴의 가장 큰 문제가 위계질서 확립, 그리고 클럽하우스의 불화라는 건 유명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지?
‘제가 또 그런 쪽으로는 전문가거든요.’
성민의 이야기에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녀석의 전문분야는 야구라기보다는 그쪽이었으니까.
[보스턴 레드삭스, LA 다저스. 대형 트레이드에 합의!!]
[에밀리오 가르시아(22세, 우완 투수, BA 14위), 케빈 마르테(33세, 불펜, 9홀드 2세이브 3블론세이브, 57.1이닝 ERA 4.67 ), 필립 탱고(21세, 삼루수, BA 47위) / 김성민(31세, 우완 투수, 20승 3패, 213.1이닝 ERA 2.57) 아론 보일(19세, 유격수) 트레이드!!]
[12개 구단 상대 트레이드 거부권을 갖고 있던 김성민!! 보스턴의 열정적인 설득에 거부권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김성민 ‘보스턴의 열정과 비전에 감동했다. 최선을 다해보겠다.’]
[팀 베이크 ‘참 유감스러운 결정.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디아고 헤밍턴 ‘이번 시즌 우리는 최강의 팀이었다. 굳이 거기에 변화를 주는 선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케빈 체임벌린 ‘성민은 훌륭한 선수. 그와 앞으로 2년은 더 보낼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이렇게 된 점은 참 유감스럽다. 하지만 다저스는 강한 팀이고, 얼마든지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팀이라고 생각한다.’]
-와, 김성민 가치 미쳤네? 지금 사실상 A급 유망주 둘에다가 케빈 마르테까지 얹어주는 거잖아. 아론 보일이면 들어본 적도 없는 유망주인데.-
-2032년 드래프트에서 3라운더였으니까 완전 듣보잡은 아니지. 이번에 루키리그 반시즌 뛰고 바로 로우싱글A로 올라갔고.-
-네, 로우 싱글A에서 반시즌이나 버벅거린 유망주를 지금 어디에다가 비비는 겁니까. 케빈 마르테면 3년 천오십만짜리 알짜배기 불펜인데.-
-근데 디아고 헤밍턴 진짜 빡친 듯. 쟤 보통 저런 식으로 강하게 이야기 안 하는 애잖아.-
-팀 감독도 저 정도면 엄청 쎄게 말한 거임. 원래 케빈 맥밀란의 딸랑이잖아.-
-진짜 쎄게 말한 건 에드 맥밀란이라던데. 거의 육두문자를 실시간으로 내뱉었다고 함.-
-하긴 인터뷰들 보니까 성민이 너클볼 받으려고 개고생했던데 진짜 빡칠 듯.-
-근데 난 마이크 올리버가 더 빡쳤을 것 같은데. 솔직히 걘 포구 원툴인데 성민이 보스턴 가면 완전 나가리 아님?-
-어? 그러게. 왜 저기에 마이크 올리버는 안 껴있지? 저 정도 트레이드면 마이크 올리버는 그냥 서비스로 얹어줄 수 있지 않나?-
-앜ㅋㅋㅋ 서비스라니. 근데 이상하게 설득력 있어. 저 정도면 충분히 덤으로 얹어줄 수 있지. OPS 0.4짜리 포수잖아. 투수가 타격을 메워줘야 하는 포수라니. 진짜 신박했지.-
-보스턴이 거부한 거 아님? 다저스에서야 성민이도 타격 서니까 올리버 타격 메워주는데 거긴 지명 타자라 그것도 안 되잖앜ㅋㅋㅋ-
-아, 그러고 보니 아메리칸리그 가면 성민이 타격을 못 하네. 실슬 타자의 강제봉인인가.-
-근데 그것보다 진짜 성민이 공 누가 받음? 보스턴에 포수 괜찮은 애 있나? 아, 시발 설마 또 공 받을 마땅한 포수가 없어서 성민이 개고생하는 작위적인 고구마 전개인가?-
-에이, 설마 존 맥도웰이 저렇게까지 박박 긁어서 성민이 데리고 가는데 그런 거 하나 생각 안 했으려고.-
-요즘 존 맥도웰 대머리 된 이후로 좀 미쳐서 생각 못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다저스와 보스턴의 트레이드가 야구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바로 그 시간.
“어떻습니까?”
“사실 반신반의하긴 했습니다만 정말로 해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미리 약속했던 대로?”
“네, 어차피 트레이드야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확정이었고, 이렇게까지 팀의 미래에 대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저도 더 이상 거절을 할 이유는 없죠. 사인하겠습니다.”
물밑에서 이뤄졌던 커다란 거래가 마침내 발표됐다.
[보스턴 레드삭스 또 다시 대형 트레이드!! 이번에는 오클랜드 애슬래틱스와!!]
-맙소사, 보스턴 정말 미쳤는데?-
-왜왜왜?-
-아론 브라이언을 내주고 에두아르도를 데리고 왔어.-
[아론 브라이언(22세, 포수, BA 8위)/에두아르도 크루즈(27세, 포수, 0.261/0.331/0.391) 트레이드!!]
-미친, 아론 브라이언이면 우리 팀 10년을 책임 질 포수잖아. 아무리 에두아르도 크루즈라고 그래도 이제 1년밖에 못 쓰는 애를 아론 브라이언을 주고 데리고 왔다고?-
-야야, 잠깐만 진정해봐.-
-너라면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시발 내가 가서 당장 단장실에 불을!!-
-아니, 지금 에두아르도 크루즈 연장계약 소식 올라왔어.-
-어?-
[에두아르도 크루즈 보스턴 레드삭스와 7년 2억 달러 연장 계약 체결!!]
-에두아르도 크루즈를 7년에 2억? 이거 에드 맥밀란급으로 호구 잡은 계약인데?-
-에드 맥밀란이 8년 2억 1천만이었나? 근데 계약 시기로 따지면 에두아르도가 1살 더 어린데 7년 2억이면 에드 맥밀란보다 더 호구 잡은 것 같은데?-
-더 호구 잡았다고 하기에는 동급으로 묶이기는 하지만, 에드 맥밀란 쪽이 좀 더 좋은 포수잖아.-
-에드 맥밀란이 공격이 좋아서 더 눈에 띄기는 하지만, 수비에서 에두아르도가 더 나은거 생각하면 도찐개찐임. 근데 잠깐만. 이거 SNS발 소식에 따르면 에두아르도 크루즈 2억 달러 중에 5천만이 30년짜리 디퍼라는데?-
-헐, 2억 중에서 5천만이 30년짜리 디퍼라고? 그러면 이거 진짜 보스턴이 엄청 이득 본 계약 아님?-
-뭐지? 갑자기 성민은 트레이드 거부 풀고 보스턴을 오고, 에두아르도는 저딴 계약을 맺고. 설마 존 맥도웰이 쟤들 섹스 비디오라도 갖고 있는 건가?-
격동의 겨울이 흘러갔다.
이후로도 많은 사건과 사고가 터졌지만, 성민과 에두아르도의 보스턴행 이상으로 충격적인 사건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2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플로리다의 제트블루 파크 앳 팬웨이 사우스에 성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메이저리그 두 번째 봄의 시작이었다.
< 그리고 봄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