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동의 겨울(2) >
“뭐라고? 아론 브라이언에 잭 크론, 에밀리오 가르시아까지 트레이드 블록에 이름을 올렸다고?”
“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기 좀 보세요.”
부하직원이 내민 태블릿 PC를 바라보던 케빈 맥밀란이 입을 쩍 벌렸다.
“이거 뭐야? 얘들 제정신이야? 이건 기둥뿌리를 아예 뽑겠다는 소리잖아. 리빌딩도 아니고, 즉전감부터 유망주까지 이거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그게, 이번에 보스턴 클럽하우스에서 잡음이 좀 많았잖습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쪽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이걸 다 내보내겠다고? 이렇게 내보내고 새로 선수 구하면, 걔들이라고 뭐 위 아더 월드로 하하 호호 한다는 거야?”
“아무래도 존 맥도웰이 현장경험은 전혀 없이 전력분석팀 일만 하다가 단장이 됐다는 이야기가 사실 아닐까요? 선수 보강하는 거 보면 알짜로 잘 골라잡는 것 같았는데 그냥 그렇게 작은 디테일은 잘 잡지만, 전체적인 큰 그림을 못 본다고 해야 할까?”
케빈 맥밀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설마 그냥 선수들에게 위협을 하려는 걸까?”
“설마요.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더 최악이죠. 말 안 들으면 내보내겠다고 이렇게 직접적으로 협박하는 단장이라뇨. 오히려 역효과입니다.”
“역시 그렇지? 존 맥도웰이 아무리 멘탈이 나갔어도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았겠지? 그러면 대체 무슨 생각일까.”
인상을 찌푸리고 한참을 고민하던 케빈 맥밀란에게 그의 부하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단장님, 그런데 이걸 저희가 굳이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요?”
“뭐라고?”
“그렇잖습니까. 보스턴의 존 맥도웰 단장이 무슨 의도로 이런 선수들을 트레이드 블록에 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그쪽 사정이고. 저희는 그냥 저희가 필요한 선수만 수급할 수 있으면 그만 아닐까요?”
“그 무슨 멍청한 소리를!! 애초에 상대방의 상황과 의도를 파악해야만 제대로 된 트레이드가 가능한 법이야. 상대가 무슨 생각으로 움직이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선수를 들이밀어서 트레이드를 시도해보자고?”
“그렇다면 최대한 저희 쪽에 유리한 형태로 일단 오퍼를 넣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받아주면 좋은 거고, 아니더라도 저쪽의 의사를 알아볼 수는 있겠죠.”
케빈 맥밀란이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부하직원의 말처럼 이렇게 혼자 고민한다고 해결될 건 없다. 괜히 시간을 끄는 것보다 일단 상대방의 의사를 타진해보는 것이 더 현명하다.
“에밀리오 가르시아 평가 다시 제대로 뽑아보고, 우리 쪽 카드로 쓸만한 선수 목록도 올려봐. 일단 한 번 접근해 보자고.”
다저스만이 아니었다.
이와 흡사한 대화가 메이저 구단 곳곳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그 대화의 결과물을 받아 본 존 맥도웰을 비롯한 보스턴 프런트는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존 맥도웰이 자신의 민머리를 벅벅 긁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순 도둑놈들이네. 아론 브라이언을 고작 이런 애들로 데리고 가겠다고?”“무슨 오퍼길래, 우왓!! 이거 이 새끼들 우리를 너무 호구로 본 거 아닙니까? 이제 막 루키리그 졸업한 애송이에 24살에 AA돌고 있는 유격수. 어휴, 40인 간신히 들어올 불펜은 또 뭐야. 어중간한 복권 패키지로 아론 브라이언이라니. 단장님 이거 대답 하실 겁니까?”
“애슬레틱스잖아.”
“그래서요?”
“에두아르도 코어로 묶고 적당히 포장해서 보내봐.”
“에두아르도 크루즈를요? 아니 잠깐만요. 단장님. 아무리 그래도 에두아르도라고 해도 이제 계약 기간 1년 남았는데 아론 브라이언이랑은 좀 끕이 안 맞잖아요.”
“그러니까 코어로 하고 다른 것도 좀 긁어와 보라고. 그리고 애슬레틱스야 에두아르도 계약 기간 끝나면 나가리라 지만, 우린 다르잖아. 그 친구 아직 퀄파도 안 받았고, 그 기량이면 우리 코어로 가져가기 충분한 친구야. 거기다가 그 계약만 체결되면 우리도 많은 부분이 해결되잖아.”
존 맥도웰의 이야기에 보스턴의 전력분석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 마이너의 유망주 가운데 연령대가 중복되는 포수 자원을 상당수 트레이드 카드로 써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거 이건 또 뭐야? 다저스 이 녀석들은 제정신이긴 한 거야?”
“대체 어떤 오퍼길래?”
“살라만카에 쩌리 셋 붙여서 에밀리오를 달라고 하는데?”
“와우, 완전히 미쳤네요. 쩌리들은 면면이 어떻게 되는데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수준이야. 잘 커봐야 40인? 어디다가 트레이드 카드로도 써먹지 못할 놈들이야.”
에밀리오 가르시아라면 드래프트 이후 3년 내내 BA 100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자원이다. 특히 가장 최근의 평가에서는 우완 투수 중 2위. 전체 14위에 랭크 됐다.
당장 내년 시즌부터 하위 선발로 메이저에 데뷔해도 이상하지 않은 컨트롤 기간이 온전하게 남은 22세 유망주를 연 1,200만을 받는 32세 5선발 투수와 트레이드? 터무니없는 제안이다.
“김성민 요구해봐.”
“네? 김성민을요?”
“뭘 그렇게 화들짝 놀라? 트레이드 가치로만 따지면 우리 에밀리오도 김성민에게 못지않잖아.”
성민과 에밀리오의 실력 차는 명백했다.
하지만 시장의 트레이드 가치라는 것이 그렇게 실력으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당장 성민의 계약 기간은 앞으로 2년. 옵션 포함 연간 2,200만 달러다. 사이 영 컨텐더급 투수의 시장가치가 최소 3,000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저렴하다.
하지만 에밀리오는 22세에 AA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장차 올스타급의 도미넌트한 투수로 성장할 것이라 기대받는 자원이었다. 게다가 현재까지 소비된 서비스타임은 0. 마이너 옵션까지 모두 짱짱하다. 트레이드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아니, 뭐 그야 그렇지만. 그 친구들이 그런 거로 움직이는 상황은 아니니까요.”
“엿 같음으로 따지자면 그쪽 오퍼가 훨씬 엿 같았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넣어봐.”
하지만 트레이드 시장에서 선수의 가치는 객관적이지 않다.
분명 에밀리오는 당장 2~3년 정도는 꾸준히 4, 5선발로 활약하고 점점 발전하여 나중에는 사이 영 컨텐더로까지 성장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가능성에 불과하다.
에밀리오는 가성비가 좋은 선수이지만, 성민은 비록 공을 받을 포수가 한정적이라는 약점은 있되 현재의 사이 영 컨텐더다.
다저스의 경우 항상 달려야 하는 팀이다. 미래의 가치를 위해 현재의 가치를 포기하는 것은 탱킹을 해야하는 팀에게나 어울린다. 오히려 보스턴 쪽이 더 에밀리오를 데리고 있어야 하는 팀이다.
그렇기에 케빈 맥밀란은 보스턴의 오퍼를 이렇게 판단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유망주 제대로 된 녀석들로 내놓으라 이거군.”
상식적인 이야기였다.
보스턴이 폭망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당장 즉전감을 보강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확실히 에밀리오를 트레이드할 마음이 있기는 있는 것 같습니다.”
“보스턴이 선발 유망주가 그렇게 많았던가?”
“이번에 싱글A랑 루키리그 쪽에도 괜찮은 애들이 있죠. 당장 에밀리오는 내년부터는 써먹어야 하는 자원이니 시기상 맞지 않아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걔들이 부족한 자원이 어느 쪽이지?”
“보스턴 마이너면 외야 쪽으로 좀 많이 부실할 겁니다. 상위 순번으로 제법 많이 뽑긴 했는데, 대부분 결과가 안 좋았고, 그나마 가능성 있던 해밀턴도 부상으로 나가리가 됐으니까요.”
“흐음, 외야라. 보일이면 충분할까?”
“조금 약한 감이 있기는 합니다만, 보스턴도 탱킹을 한다고 해서 무작정 엉망으로 할 수 없는 팀이잖습니까. 거기에 살라만카를 붙여주면 나름 괜찮은 딜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일에 살라만카라.”
“저희쪽 선발진도 정리가 좀 필요한 건 마찬가지니까요. 당장 에밀리오면 살라만카의 빈 자리를 메우고, 장기적으로 보면 김성민이 나간 이후에 상위 선발까지 꿰차기에 충분한 친구죠.”
“하긴, 우리도 그 친구를 연장까지 하면서 데리고 있기는 무리겠지.”
“디아고를 데리고 가면서 성민의 연장계약까지 챙기기는 아무리 저희라도 좀 무리가 있죠. 당장 겨울에 디아고 연장계약을 들어가면 사치세 구간에 들어갈 테니까요.”
“그러면 일단 그렇게 오퍼를 넣어보도록 하자고.”
시즌이 끝난 늦은 가을.
윈터 미팅을 앞둔 프런트들이 폭풍같이 움직였다. 보통이었다면 보스턴이 트레이드 블록에 올린 이름들은 각종 야구관련 언론의 관심을 모조리 끌어들일만큼 큰 일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메이저리그의 주인공은 프런트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크게 몰린 곳은, 아메리칸리그 꼴찌 팀의 폭풍같은 트레이드 행보가 아닌 하나의 시즌을 치러낸 선수들의 마지막 결과물이었다.
신인왕. 사이 영 상. 그리고 MVP.
골드글러브와 실버슬러거가 발표되고 일주일 뒤.
가장 먼저 발표된 것은 신인왕이었다.
내셔널리그 신인왕 김성민(LAD).
아메리칸리그 신인왕 도밍고 스킬라치(TEX).
대부분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하는 선수에게 돌아간 신인왕임을 인정했다.
“NPB나 KBO 같은 외국 프로리그에서 뛰다 온 30대 선수가 신인왕을 받는 건 좀 형평성에 문제가 있지 않아? 당장 김성민은 KBO에서도 신인왕이었다고. 이건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MLB의 20년 뛴 노장이 NPB에 가서 첫 해에 신인왕을 수상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그건 이야기가 너무 나갔잖아. 그리고 애초에 NPB나 KBO가 별개의 프로리그라고는 하지만 사실 빅리그에 비교하면 하위리그라고 봐도 무방하잖아. 하위리그에서 좀 늦게 콜업된 선수가 신인왕을 수상한 일이라고 생각해야지. 애초에 전례가 없는 일도 아니고 말이야.”
물론 세상에 모두가 불만 없는 일은 없다. 몇몇 사람들은 성민이 애초에 신인왕을 받을 자격 조건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애초에 전례가 없던 일도 아니었던 만큼 그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 뒤. 사이 영 상이 발표됐다.
내셔널리그 사이 영 상. 디아고 헤밍턴(LAD).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 욘 마르틴(NYY).
정확하게 7점 차이.
1위 표 한 장 차이였다.
“생각보다는 점수가 잘 나왔네요. 이 정도면 꽤 아깝네.”
-네가 타는 게 당연하다고 떠들지 않았냐?
“그거야 방송이니까 그렇죠. 솔직히 이번 시즌 디아고 성적이 미쳤었잖아요. 안 그래도 리그 최강 소리 듣던 녀석이 커리어하이를 썼는데. 대충 작년 성적 정도만 냈다면 내가 탔을 것 같은데 좀 아쉽기는 하네요.”
-마지막 퍼펙트가 기자들에게 인상 깊기는 깊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요. 그 3홈런 맞았던 경기만 없었어도 더 어필할 부분이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딱 거기까지였다.
이미 시즌은 끝났고 성적은 나와 있었다.
“뭐 내년엔 더 잘해야죠.”
이제 메이저 1년 차.
신인왕에 사이 영 상 2위면 그가 시즌 초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성적표다. 성민이 담담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놀라운 일은 사이 영 상 투표 다음 날에 벌어졌다.
“엥?”
물론 성민이 MVP를 받는 터무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투수에게는 사이 영. 타자에게는 MVP. 이건 대부분 기자가 생각하는 도식과도 같았다. 투수가 MVP를 탄다는 것은 그 투수의 시즌이 역사적이었던 것에 더해 특출난 타자가 없다는 조건까지 만족할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MVP 7위. 김성민.
그렇기에 그 7위라는 성적표만으로도 성민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시즌 성적이 괜찮았던 타자들은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민에게 MVP 표를 던진 기자들이 있다는 소리다.
무엇보다 사이 영 1위인 디아고 헤밍턴의 경우 MVP 표를 5위 표 한 장으로 32위에 불과했다.
-요즘 기자들은 참 다양하게 미친 것 같구나.
“그러게요. 이거 2위 표도 몇 장 들어왔네.”
성민이 예상하지도 못한 MVP 7위에 놀라는 사이
“뭐라고? 에밀리오 가르시아에 필립 탱고까지?”
“네. 이 정도면 정말 성민을 강하게 원하는 것 같은데요?”
“그럴리가 없어. 걔들 지금 팀 상황을 좀 보라고. 즉전감을 원하는 게 지금 말이 돼?”
다저스가 보낸 제안에 돌아온 보스턴의 역제안이 케빈 맥밀란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 격동의 겨울(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