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동의 겨울(1) >
과거 필 니크로가 활약하던 시절만 하더라도 대중들에게 자신을 알릴 방법은 오직 신문이나 뉴스 잡지등의 언론매체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뉴 미디어의 시대다.
“성민, 잠깐 이리 와봐.”
본래도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이다. 그리고 거기에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이 제공하는 약간의 보정이 더해졌다.
“이거 SNS에 올려도 되지?”
“어, 괜찮아.”
수십 개의 해시태그가 달린 사진이 그녀의 SNS계정에 올라갔다. 순식간에 올라가는 댓글과 좋아요. 백만 단위의 팔로워를 가진 스타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저게 그렇게 대단하다고?
예전에 토니를 고용할 때도 한 번 이야기를 해줬었음에도, 마치 금시초문이라는 것처럼 눈을 끔뻑거리는 필 니크로에게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필 니크로보다 50년쯤 젊은 그의 어머니 권 여사에게도 제대로 설명하기 힘든 것을, 흑백 TV 시대에 살았던 노인에게 제대로 설명하기란 무리일 테니까.
조이 제임슨, 세레나 스탠, 엘렌 바크만 등. 수많은 유명인들과 사진을 찍고 그 사람들의 SNS를 통해 성민의 얼굴이 퍼져나갔다. 물론 단순한 사진 한 장이라면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남자 누구야? 엄청 쿨한데?-
-JJ의 새로운 애인인가? 근데 이 친구 아시안인 것 같은데 엄청 새하얗잖아? 화이트워싱인가? 백인인 JJ보다 훨씬 더 하얘-
-무슨 멍청한 헛소리야. 20세기에 살다 온 거야? 동북아시아 쪽 아시안들은 원래 하얗다고.-
-하얗고 노랗고 상관없이, 난 이 남자가 누군지 알고 싶은데? 설마 드라마에 새로 등장할 배우인가? 젠장 요즘 새로운 인물을 너무 성급하게 많이 투입하고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파티에 같이 참석했던 사람 같은데? 여기 보라고. 엘렌 바크만이랑 같이 입장했잖아.-
-아, 이 친구 얼마 전에 엘렌 바크만의 쇼에 나왔던 야구 선수야.-
-야구? 야구가 뭐지?-
-미국판 크리켓 같은 스포츠야.-
-크리켓은 또 뭐야?-
-사람이 던진 공을 방망이로 맞추는 경기야. 미식축구처럼 미국 애들만 열광하는 게임이지.-
-아니야. 야구는 일본이랑 한국도 열광하는 게임이야. 저 친구도 아마 한국인일걸?-
-젠장, 난 그런 건 별로 관심 없고 저 친구가 JJ랑 무슨 관계길래 JJ의 눈에서 저렇게 꿀이 뚝뚝 떨어지는지가 궁금하다고.-
-얘들아, 여기 가봐. 이바 타일러도 저 남자랑 같이 찍은 사진을 올렸어.-
-엉? 이바 타일러가? 그 매일 자기 먹은 음식 사진밖에 SNS에 안 올리는 그녀가 셀피를 올렸다고?-
-그렇다니까.-
보정을 걸친 성민의 외모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근사했다. 무엇보다 성민의 인종이 아시안이라는 점이 더 중요했다. 21세기에 접어든 지도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미국과 유럽, 남미의 인종차별은 여전했다.
공식적으로라도 인종차별을 강하게 처벌하는 미국의 경우는 좀 덜했지만, 남미와 유럽의 몇몇 나라들 같은 경우는 심각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좀 묘한데? 얼굴은 보통의 비리비리한 동양인 아이돌과 별 차이가 없는데, 몸이 좀 굉장하네. 동양인도 자연적으로 이런 몸이 가능한거야? 스테로이드라도 빡세게 한 건가?-
-야구는 미국의 프로 스포츠들 가운데서 가장 빡세게 도핑 테스트를 하는 종목이야. 다른 종목이면 몰라도 야구 선수가 대놓고 스테로이드를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그런 차별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기에도 성민의 비주얼은 굉장했다.
물론 아직은 딱 거기까지였다. 가장 뜨거운 스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SNS에 올라온 섹시한 동양인.
“토니, 이제부턴 네 몫이야. 알겠어?”
“보스.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는데, 아시다시피 제 전문은 유투브에 영상을 편집해서 올리는 쪽이지, SNS에 이미지 관리는 그러니까.”
“토니, 그러니까 우리가 위약금이 얼마였지?”
“젠장. 합니다. 하면 되잖아요.”
“올리기 전에 컨펌 받는 거 잊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혹시 알아? 열심히 하면 내가 기분 좋아서 보너스라도 크게 쏠지? 내가 아마 이번에 우승 보너스로 받은 돈이 55만 달러였나?”
그 사진들을 보고 그냥 찾아온 야구가 뭔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을 관리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날 파티에서 성민이 보여준 것은 단순한 한 번의 춤이 아니었다. 성민은 평생을 단련해온 그의 접대기술을 충분 이상으로 발휘했다.
‘가벼워 보이지만 조금만 대화를 나눠보면 깊이를 느낄 수 있는 반전 매력의 소유자.’
‘조금 무뚝뚝하지만 따스한 사람.’
‘동양의 알 수 없는 신비를 간직한 남자.’
‘별 생각은 없지만 쾌활한 스포츠 가이.’
‘춤을 사랑하지만, 가정환경 때문에 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남자.’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수많은 이미지를 각자의 뇌리에 새겼다. 그 와중에 다른 파티들의 초대장을 움켜쥐는 것은 기본이었다.
성민이 LA 사교계에서 천천히 입지를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하자면 이것 역시 지역 사교계에 입지를 다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달랐다.
LA에는 헐리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헐리웃의 스타는 곧 세계적인 스타였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과거 넷플릭스나 디즈니 플러스, 애플 티비 플러스 같은 글로벌 OTT서비스가 대중화되기 전부터 헐리웃은 세계 각국에서 소비됐다.
그리고 2033년 현재. 방송 영화 문화의 종속은 더욱 커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설사 다른 국가에서 천재적인 감독이나 각본가 혹은 배우가 나타나더라도 마찬가지다. 이는 자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항상 많은 돈이 양질의 서비스를 장담하지는 않는다. 가끔 천재의 번뜩이는 영감은 투입된 자본을 넘어서는 재미를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천재조차도 종국에는 헐리웃에 진출할 수밖에 없다. 마치 뛰어난 야구 선수가 결국 MLB에 진출하는 것처럼 말이다.
21세기 초반.
이 세계에는 유명하다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사람이 하나 등장했다.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 패리스 힐튼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현대 미디어를 연구하는 학자들 다수는 실제로 그녀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했다. 만약 영국의 대학에서만 그녀를 연구했다면 그건 쓸모없는 연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연구한 것은 영국만이 아니었다. 미국 문화에 영향을 받는 나라라면 어디나 그녀에 대해 연구한 학자가 몇 명은 있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명세라······. 참 놀라운 발상이구나.
“뭐, 유명해지는 게 유용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죠. 패리스 힐튼도 그랬잖습니까. 자기 성공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상속녀로 태어난 거라고요. 저라고 못할 건 없죠. 물론 그녀처럼 진지하게 파티광이 되기는 힘들지만, 전 대신 지속적으로 언론에 저를 노출시킬 수 있으니까요.”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건지.
“2026년 9월 둘째 주 우먼 주간을 꼼꼼히 읽어보면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죠. 현대에는 유용한 정보들이 정말 넘쳐난다니까요. 어쨌거나 야구의 가장 큰 문제는 제 경기를 보는 사람이 한정적이라는 점이잖습니까. 이런 방법이면 그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겁니다.”
-전국 방송에 나가지 못한다면 다른 형태로 네 경기를 세계에 뿌리겠다는 말이로구나.
“그렇죠. 뭐 결국 사람들의 관심은 유명인을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유명인들이 제 경기를 와서 지켜보고 SNS에 한 마디씩 남겨준다면 다들 궁금해서라도 한 번은 찾아보겠죠. 게다가 저 자신도 유명인이 된다면 제가 뭘 하는지도 궁금해 할 사람들이 세계에는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마침 저 같은 경우는 타자처럼 매일 경기에 나서는 것도 아니고, 선발투수라서 5일에 한 경기니까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저를 응원하는 맛에 한 경기 정도는 진득하게 경기를 보지 않겠어요?”
-1년에 한 경기도 전국에 중계되지 못할 수도 있는 선발투수라는 약점이 오히려 강점이 될 수도 있다······, 정말 미친 소리 같은데, 이상하게 가능할 것 같아서 환장하겠구나.
“에이, 미친 소리라뇨. 패리스 힐튼도 결국 자기가 만든 브랜드를 명품으로 팔아치웠잖습니까. 이미 앞선 사람이 다 해봤던 일입니다. 조금 결이 다르긴 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요.”
대체 그게 어디가 앞선 사람이 다 해봤던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어쩐 일인지, 성민이라면 그런 사소한 것 정도는 상관없이 해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필의 뇌리를 스쳤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진짜 미친 소리 같은데.
***
2033년 겨울.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의 단장 가운데 가장 잘생겼다고 자부하던 존 맥도웰이 자신의 훤한 정수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나이.
스트레스성 원형탈모가 점점 범위를 넓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공터를 만들었다.
“별 수없지.”
아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든 모발을 살리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명문 보스턴 레드삭스의 단장에 오른 존 맥도웰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위이잉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시원한 제모.
일반적인 바리깡이 아닌 면도 바리깡을 이용한 그 과감한 손길에 흐릿하게 남아있던 머리카락들이 쓸려나갔다.
잔털 하나 남기지 않은 시원한 제모.
“그래, 어차피 가능성이 없는 놈이라면 미련을 갖지 말고 과감하게 밀어버려야 해.”
지난 몇 년 동안 꾸준하게 보스턴은 하위권을 전전해왔다.
또한, 보스턴의 스카우트팀과 전력분석팀은 그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최근 4년 동안 BA 리포트 100위 안에 보스턴의 선수가 일곱 명 미만으로 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정도다.
선수들은 하나, 둘씩 차곡차곡 터졌고 몇몇 선수는 이제 올스타급 기량에 접근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FA로 데리고 온 선수들 역시 나쁘지 않았다. 비어있는 전력을 적재적소에 메워줄 만큼 알짜들이다.
만약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면 이번 시즌 보스턴 레드삭스는 최소한 와일드카드 정도는 노릴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시뮬레이션 게임이 아니었다.
지구 최하위.
아메리칸리그 최하위.
메이저리그 전체 아래에서 두 번째.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내년 드래프트 전체 2위는 우리 차지로군.”
전혀 하나도 긍정적이지 않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다.
단장이 해야 하는 일은 최고의 전력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그리고 존 맥도웰은 분명 단장이 해야 하는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가성비 면에서 성민을 결국 데리고 오지 못한 것 정도만이 유일한 흠일 뿐. 그는 수치상으로 따지자면 분명 가격과 성능을 면밀하게 따져 최고의 전력을 구성해줬다.
단지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현장의 선수들은 능력치대로 딱딱 성적을 뽑아내는 게임의 캐릭터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2033년 한 해.
보스턴의 상태는 아주 개판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감도 오지 않는 수준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개판에서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그저 막막함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스턴의 단장인 존 맥도웰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존 맥도웰이 자신의 맨들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의외로 느낌이 괜찮다.
2033년 11월 9일.
보스턴에서 시작된 오퍼들이 메이저리그를 휩쓸었다.
< 격동의 겨울(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