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류 사회(2) >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소식이로군요.”
“사실 놀랄만한 일도 아니에요. 그럴만한 성적이었어요. 이번 시즌 성민의 타격 성적이 0.230/0.250/0.460에 도루까지 하나였나? 아마 그랬던 거로 기억하는데 이게 타율이랑 출루율은 그렇다 치더라도 장타율이 정말 말이 안 되는 수준이라서요.”
“어? 뭐야 디아고? 너 왜 나도 똑바로 기억 못 하는 내 타격 성적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냐?”
성민의 질문에 디아고 헤밍턴이 쑥스럽게 웃었다.
“뭐 살짝 정정해드리자면 장타율은 0.460이 아니라 0.459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데뷔 1년 차인 성민 선수가 올 해에 실버 슬러거를 수상했다는 점이니까요. 혹시 특별히 타격에 더 신경을 쓰셨던 건가요?”
“네, 사실 고등학생 때까지야 방망이도 잡았다지만, 한국에서 프로가 된 이후로는 방망이를 잡을 일이 전혀 없었거든요.”
“전혀라고요?”
“네, 메이저리그에서야 지명타자제도를 사용하는 아메리칸리그라고 해도 인터 리그에서 방망이를 잡을 일이 있지만, 한국은 단일리그라서 그런 것도 없거든요.”
엘렌 바크만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연기다.
“아니, 그러면 대체 몇 년이나 타격을 안 하셨던 건가요?”
“제가 2022년에 프로가 됐으니 11년이네요.”
“와우, 11년이라고요? 한국은 대체 몇 살부터 프로가 되는 거죠?”
“미국이랑 똑같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죠.”
“맙소사, 그러고보니 성민, 지금 나이가? 와우!! 서른 살이군요.”
“네, 아직 생일이 이 주정도 남아서요. 아직 서른입니다.”
엘렌 바크만은 프로다.
게스트의 나이를 숙지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다. 그렇기에 이것은 그저 청중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연기였다.
“아무리 봐도 20대 초, 중반 이상으로는 안 보이는데, 서른이라니 놀랍네요. 마법은 겨드랑이가 아니라 얼굴에 내려진 것 같은데요?”
“그건 엘렌도 마찬가지죠. 저도 처음에 엘렌의 나이를 듣고 깜짝 놀랐는걸요.”
“워워, 저랑은 다르죠. 전 20대부터 이런 얼굴이다가 50대가 돼서 간신히 나이가 얼굴을 따라잡은 거잖아요.”
방청객석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보다 이제 중요한 상이 한 가지 지나갔으니, 이제 남은 더 중요한 상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혹시나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이제 발표가 남은 상은 올해의 신인왕과 최고의 투수에게 주는 사이 영 상. 그리고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MVP입니다. 이 중 MVP의 경우 보통 타자에게 주는 것이 관례고, 신인왕의 경우는 뭐.”
엘렌 바크만이 어깨를 으쓱하며 성민을 바라봤다.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알지 않느냐 하는 그 태도에 성민 역시 어깨를 한번 으쓱 하는 것으로 대응해줬다.
한국이었다면 손사래를 치며 겸손한 척을 했겠지만, 여기는 미국이다. 굳이 그런 의례적인 겸손함을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하여간 우리가 이야기해볼 만한 상은 역시 사이 영 상이죠. 디아고?”
“제가 먼저 한 마디 말씀드리자면. 글쎄요. 개인적으로는 그걸 뭐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물론 성민은 대단한 투수였어요. 시즌 내내 전 성민을 상대로 경쟁심을 불태웠죠. 하지만 시즌은 끝났고, 붐!! 결과는 이미 나왔습니다. 그 어떤 지표에서도 전 성민에게 뒤지지 않아요. 아, 그래요. 타격에서는 조금 부족하군요. 하지만 사이 영 상은 최고의 투수를 뽑는 상이지, 투수 중에 누가 제일 잘했느냐를 뽑는 상이 아니에요. 둘은 비슷한 이야기 같지만 확실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이번 사이 영은 제껍니다.”
“와우, 아주 뜨겁네요. 그나저나 투수 중에 제일 잘한 선수가 최고의 투수 아닌가요? 그건 조금 헷갈리는 이야기인데요?”
소파에 깊숙이 앉아 있던 성민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죠. 이번 시즌 WAR. 그러니까 대체선수대비 기여도로만 따지면 어느 지표를 사용하건 간에 디아고 쪽이 저보다 조금 높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투수의 경우는 그 공격과 수비가 WAR에 포함이 안 된다는 점 때문이거든요.”
“공격과 수비요?”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야수들의 WAR이 공격과 수비로 나뉘는 것처럼, 투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투수의 경우는 조금 더 복잡하죠. 피칭과 공격, 수비. 세 가지로 나뉘니까요. 다만 야수들의 경우는 그 수비까지 모두 WAR에 포함이 되지만, 투수의 경우는 오직 피칭만 계산될 뿐, 공격과 수비는 포함을 시키지 않고 있어요.”
“그건 조금 이상한 것 아닌가요? 어쨌든 타자로 몇 타석을 소화했고, 수비에 함께 한 건 사실이잖아요.”
“그래서 보통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수식에는 포함이 안되지만, 각 구단마다 투수를 평가하는 자체적인 수식에는 이걸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성민의 말을 정리하자면, 공을 던진 순간만 따지면 디아고 쪽이 훌륭했지만, 타석에 섰던 성적과 공을 던진 이후 수비에서 보여준 성적이 합쳐지면 성민 쪽이 더 좋은 선수였다. 뭐 이런 이야기인가요?”
“네, 얼추 뭐 그런 이야기죠. 하지만 어찌 됐건 디아고의 이야기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사이영 상은 최고의 투수를 뽑는 상이에요.”
“그 말씀은 김성민 선수도 디아고 선수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 최고의 투수가 누구인지는 사람마다 기준이 조금씩 다를 거고, 그 결과는 일주일 후에 있을 발표에서 결정이 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투표를 하는 분들은 메이저리그 최고의 기자님들이잖아요. 현명한 판단을 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엘렌 바크만이 또 한 번 감탄했다.
말솜씨가 정말 교묘하다. 이건 결국 디아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자신을 뽑지 않았으면 현명하지 않았을 거라는 소리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저토록 돌려 돌려 정중한 척 이야기 할 수 있다니.
게다가 발음은 조금 어눌한 주제에 어휘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어휘들을 구사한다.
얼굴과 몸매의 갭. 발음과 어휘의 갭. 그 차이들이 성민에게 묘한 매력을 부여했다.
-뭐야? 저 녀석? 동양인 주제에 엄청 섹시해!!-
-동양인 주제에 섹시라니. 동양인들이 섹시하지 않다는 편견이 있는 거야? 그렇다면 지금 당장 진호의 사진을 보고 오라고. 난 젊었을 때 녀석 사진만으로도 10번은 천국에 갔다 왔으니까.-
-하긴,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지만, 강진호 그 녀석 전성기에는 엄청났었어. 하루가 머다하고 여자를 갈아치우는 바람둥이였지. 어쩌면 저 녀석도 그렇게 하룻밤 스쳐 지나간 여자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응? 나 남자인데?-
-헛소리들 집어치우고 그래서 사이 영은 누가 받을 것 같아?-
-글세, 난 아무리 생각해도 사이 영만큼은 디아고라고 생각한다. 작년이었다면 성민도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이번 시즌 그 녀석은 정말 슈퍼 에이스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성적이었어.-
-내가 만약 투표자였다면, 시즌 막판에 그 퍼펙트를 보고 나도 모르게 성민을 뽑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 경기는 정말 환상적이었다고.-
-하긴, 투표자도 사람인데 그럴 수 있지.-
-뭐가 어찌 됐건, 사이 영이 다저스에 오는 건 확실해. 이번 시즌 우리는 정말 환상적이었어. 난 다저스가 하루라도 빨리 디아고와의 장기 계약을 맺고 성민의 계약도 연장해야 한다고 생각 해.-
-페이롤은 괜찮을까?-
-이봐, 우린 LA 다저스야. 그런 거 신경쓰는 팀이 아니라고.-
“성민, 제가 개인적으로 연락해도 괜찮을까요?”
“아, 개인적으로요?”
엘렌이 성민의 답을 듣기 전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어휴, 이 바닥에 서른 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널렸다지만, 난 그런 거 아니거든요? 이건 그냥 인간적인 호감이에요.”
“물론이죠. 제 스마트폰은 언제든 열려있으니 아무 때나 연락주세요.”
성민이 자신의 번호를 엘렌에게 공유했다.
-흐음, 엘렌이면······.
‘저도 압니다. 그 서른 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인 거.’
사실 외모만 따지자면 권 여사만큼 많다고는 믿기지 않는 외모이기는 했다. 기껏해야 40대 후반 정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성민에게는 충분을 넘어서게 많은 나이다. 엘렌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알면서 개인적인 연락을 오케이 한 건 무슨 뜻이냐?
‘저 여자, 이 바닥 인맥부터 해서 완전 핵인싸잖아요. 친해져서 나쁠 건 없죠. 아니 안 친해지더라도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잖아요.’
-하긴, 못 알아들은 척 철벽치는 건 네 주특기이기는 하지.
***
KBO에서 사람들을 몰아놓고 시상식을 하는 것과 다르게, 미국의 경우 그냥 사무국에서 상을 발표하고 트로피를 구단으로 발송을 한다. 시즌이 끝나고 몇 주의 시간동안 그 많은 선수를 대기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보통 각자 자신의 고국으로, 혹은 휴양지로 떠난다. 8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혹사한 자신에 대한 선물인 셈이다.
“이봐, 성민. 우린 이번에 섬으로 갈 생각인데 혹시 함께하겠어?”
“가족 단위로 가는 여행이야. 우리 같은 독신이 끼어서 좋을 건 없지. 그보다 내가 이번에 독신자들끼리 환상의 유럽 여행을 기획해봤는데. 어때? 함께 하는 건?”
“성민, 그런 쾌락만 쫓다가는 뼈 삭는다. 그런것보다 내가 이번에 도미니카에 야구 학교에서 잠깐 튜터로 봉사할 생각인데 혹시 관심 없어? 이게 한번 봉사를 하고 나면 정신적인 충만감이 엄청나다고.”
많은 동료가 성민에게 자신과 함께 하길 권유했다.
물론 성민은 그 모든 권유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에? 그냥 LA에 눌러 붙어있을거라고? 이봐, 시즌 내내 고생했으면 좀 풀어줘야지. 그러지말고 뭐라도 하고 놀자.”
“그러니까, 일년 내내 조이기만 하면 붐!! 머리가 폭발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이봐, 다들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LA랑 캘리포니아도 세계적인 관광지야. 그리고 난 여기가 올해 처음이고. 더군다나 시즌 중에는 제대로 놀지도 못했어. 그러니까 다들 내 걱정은 하지 말라고. 난 이 캘리포니아를 충실하게 즐길 테니까 말이야.”
애초에 그렇게 해외로 놀러다닐 생각이었다면 한국에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성민은 이번 겨울을 누구보다 알차게 보낼 생각이었다. 물론 훈련 삼매경으로 보내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 따윈 아니었다.
적절한 휴식과 적절한 훈련.
이전이었다면 적절한 휴식에 조금 더 방점이 찍혔겠지만, 옆에 달라붙어 잔소리하는 귀신이 있는 이상 그 균형은 저절로 적절히 맞춰질 것이다.
-그 파티 정말 갈 생각이냐? 그 여자 영 불안한데.
“가야죠. 좋은 기회잖아요.”
-글쎄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금은 그런 것 신경 쓰는 것보다 야구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훨씬 좋지 않을까 싶다만.
“어휴, 영감님. 세계에 우뚝 서는 선수가 되어달라면서요. 어디 그게 야구만 잘한다고 되는 일입니까? 아론 브라이언도 그렇고 우리 디아고도 그렇고 MLB에서 그렇게 미는 녀석들이지만 결국 지역구 스타잖아요. 162경기 중에서 기껏해야 2경기 많아야 3경기 전국 중계되는 상황에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요. 결국, 흥행성을 갖추려면 실력만으로는 안 되는 겁니다.”
-하지만 실력이 안 된다면 모두 부질없는 일이지.
“누가 실력에는 신경 안 쓴답니까? 시즌 중에는 경기에 딱 집중하는 거고, 이렇게 쉬는 시간에는 짬을 내서 인지도를 올리는 거죠. 그리고 이건 그러기에 아주 좋은 기회라고요.”
1970년대에 전성기를 보냈던 필 니크로로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
하지만 지난 2년의 경험을 통해 그는 충분히 학습했다.
야구를 제외한 부분은 성민이 놈 말이 다 맞더라.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 상류 사회(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