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류 사회(1) >
“성민아, 정말 같이 안 들어갈 거야?”
“엄마, 나 지금 월드 시리즈 MVP야. 여기서 소화할 일정이 산더미인데 한국 돌아갈 시간이 어딨어.”
“하지만 너 한국 음식 못 먹은 지도 오래됐잖아. 타향살이 오래 하면 골병든다? 가끔은 돌아와서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래야지.”
“여기 LA거든? 한인만 70만이 살아요. 널린 게 한국 음식이니까 그런 건 걱정을 하지 마세요.”
“어휴, 그래도 우리 땅에 나는 재료로 만든 거랑 그거랑 같니? 게다가 지금 인기 절정인 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잖아. 너 어차피 미국에서 평생 살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입지를 다져두는 게 더 좋지 않겠어? 게다가 네 친구들 못 본지도 오래 됐잖아.”
권 여사의 설득에 성민이 잠시 고민했다.
확실히 성민의 본진은 한국이다. 뭐, 미국에서 인기를 끌면 좋긴 하겠지. 하지만 한국의 경제 규모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여기선 아무리 날뛰어봤자 그냥 야구 선수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국민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다. TV CF 서너 개만 찍어도 연봉의 25% 정도는 그냥 벌 수도 있다.
여러모로 겨울을 잠시 한국에서 보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무엇보다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매우 훌륭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런 많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래도 미국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지금 FOX에서 쇼도 잡아준다고 하고 있고, 한국에서 내 인기는 결국 미국에서 잘 나가는 것 때문이잖아. 굳이 그걸 단단하게 하겠다고 한국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미국에서 인기를 끌어올리는 게 맞는 것 같아.”
“네 판단이 그렇다면 뭐.”
“그리고 어차피 엄마 한국 갈 때 혼자 가는 것도 아니잖아.”
성민의 능글맞은 목소리에 권 여사가 잠시 당황했다.
“아니, 얘는 갑자기 무슨 헛소리니. 같이 가다니. 그건 그냥 그 사람이 한국에 볼일도 있고 하다니까. 게다가 원래 강진호 선수랑 인연 때문에 한국도 종종 가는 사람이잖아. 우연히 들어가는 비행기가 같은 것뿐이야.”
“알았어. 알았어. 하여튼, 올해는 구단에서 제공받은 비행기 티켓도 다 못 썼으니까, 미국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아줌마들 데리고 와도 좋고. 그 누구냐? 명숙이 아줌마? 엄마가 얄밉다고 아주 이를 박박 갈았던 아줌마도 있잖아. 그런 아줌마들 다 데리고 비즈니스 석 태워서 미국 한 번 데리고 오면 뭐 그냥 끝 아니야?”
“어휴, 그 지지배는 이미 예전에 끝났지. 내가 얼마 전에 너한테 사인볼 서른 개 해달라고했었잖아. 그중에서 걔 거가 네 개야. 명숙이네 아들내미랑 그 이번에 작은 딸내미랑 결혼 약속한 사윗감이 그렇게 네 빅팬이라더라. 친구들도 장난이 아니래요. 이번에 옷도 샀다고 하던데, 나중에 한국 오면 옷에 사인이나 좀 해줘.”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 하여간 어차피 일 년에 왕복으로 1등 석만 4장에 비즈니스는 6장이나 되니까 아깝게 버리지 말고 그렇게라도 인심 좀 써요.”
성민의 이야기에 권 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비행기 티켓값 정도는 성민의 벌이를 생각하면 이제 큰 돈도 아니다. 하지만 공짜로 생색을 낼 수 있는 기회인데 그걸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하여간, 비시즌이라고 함부로 놀지 말고, 몸조심하고. 뉴스 보니까 여기도 이상한 여자들이 막 있다는데 그런 거 특히 조심해야 한다. 알겠어?”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걱정은 좀 그만하시고 얼른 짐이나 싸세요.”
월드 시리즈는 끝났다.
하지만 아직 MLB를 향한 관심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아직 골드글러브와 실버슬러거, 그리고 신인왕과 MVP, 사이 영의 발표가 남아있었다. 한 시즌 동안 즐겁게 야구를 관람한 팬들의 마지막 관심사였다.
“일단 신인왕은 성민이 확실해.”
“그거야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사실이지. 뭐 중고 신인이니 뭐니 하면서 좀 깐깐하게 구는 놈들이 있다지만, 이 정도로 차이가 나는데 이걸 다른 놈을 주는 건 말이 안 되지.”
“사이 영은 좀 애매한데, 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특히 마지막 등판에서 퍼펙트가 결정적이야. 솔직히 성적만 비슷하면 거의 기자들의 인기투표잖아.”
“글쎄다. 내가 생각하기엔 성적에서 디아고 헤밍턴이 반수 정도 위인 것 같아서 말이지. 평자책, 승리, 삼진. 피홈런 어느 것 하나 성민이보다 부족한 게 없잖아.”
“근데 그중에서 삼진 말고 다른 건 거의 차이도 없잖아. 그리고 성민이한테는 퍼펙트 임팩트가 있고.”
“마지막 임팩트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난 성민이가 2위도 좀 간당간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거든.”
“헐,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설마 컵스에 토니 알렌 이야기하는 거야? 걘 20승도 못 했고 평자책도 성민이보다 높잖아.”
“물론 그렇기는한데, WAR로 보면 별 차이도 없잖아. fWAR은 오히려 더 높고. 게다가 성민이랑 디아고 둘 다 다저스 선수라서 표도 좀 분산될 거고. 난 재수 없으면 오히려 토니 알렌 쪽이 1위를 차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팬들이 수상자에 대해 왈가왈부를 하는 사이, 성민의 Fox TV 출연일이 다가왔다. 지난 2020년대 이후로 스포츠에 올인했던 Fox답게 메인 채널의 대표 쇼에 스포츠 스타가 출연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통은 NFL이나 NBA 쪽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래도 구조상 NFL이나 NBA의 쪽이 전국구 스타가 나오기 쉽기 때문이다.
결국, 전국구 스타를 만드는 것은 전국으로 송출되는 경기의 숫자다.
NBA나 NFL 같은 경우 가장 인기 있는 팀의 경기가 전국으로 중계되는 비율은 전체 경기의 25%가 넘는다. 반면 MLB 같은 경우 LA 다저스와 양키스의 경기조차도 전국으로 중계되는 것은 1% 남짓에 불과하다.
“엘렌 잘 부탁해요.”
“하여간, 귀찮은 일은 항상 나한테 다 들어온다니까. 이 친구 영어 할 줄 아는 건 확실하지? 괜히 나중에 가서 버벅거릴 것 같으면 그냥 애초에 통역가 옆에 붙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게다가 야구 선수들은 좀 샤이 하잖아. 거기에 동양인이라니. 통역가가 대충 말 좀 예쁘게 다듬어 주는 그림이 낫지 않겠어?”
“섭외한 친구나 현장의 이야기로는 발음이 조금 그렇기는한데, 말 자체는 상당히 잘한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어차피 단독 출연도 아니고, 디아고 헤밍턴 선수도 같이 출연하는 거니까요.”
“디아고 헤밍턴이면 그 작년에 출연했던 그 친구지? 조금 샤이하긴 했지만, 그래도 비주얼도 꽤 괜찮고 이야기도 제법 잘 하던 친구.”
“네.”
“뭐, 그러면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겠네.”
***
미국방송국의 대기실이라고 해서 그리 특별하지는 않았다.
“성민아, 너무 긴장하지 말고. 엘렌 바크만씨가 알아서 잘 해주실 거야.”
“긴장? 별로 긴장하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긴장한 쪽은 디아고 헤밍턴 쪽인 것 같았다. 5만 명이 넘는 관중과 수백 개의 카메라 앞에서 등판할 때는 그렇게 불같은 모습으로 등판하는 주제에, 고작 삼백 명밖에 안 되는 방청객과 열 몇 대의 카메라를 앞에 뒀다고 긴장하는 모습이라니.
“하긴 한국에서는 이미 슈퍼 스타였으니까 이런 거 경험 많이 해봤겠구나.”
“그게 아니더라도, 마운드에 서는 쪽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잖아. 그거에 비하면 이건 뭐 일도 아니지.”“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런가? 근데 난 이상하게 방송국만 오면 너무 긴장되더라고.”
성민이 분명 비싼 옷임에도 불구하고 비싼 옷을 입은 티가 전혀 나지 않는 디아고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똑똑
“들어오세요.”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오늘 쇼의 호스트인 엘렌 바크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쇼의 주인공분들이 여기 계셨군요. 와우. 디아고 헤밍턴 씨는 작년보다 훨씬 멋있어졌는데요?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잠시 성민에게 멈췄다.
보통 운동선수의 경우 운동복을 입은 모습은 아주 멋진 주제에 사복 차림은 생각보다 어색한 경우가 참 많다. 이는 그들의 체형이 일반인과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이 남자 섹시한데?’
하지만 성민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물론 모델처럼 늘씬하고 아름다운 체형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얼굴과 그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마치 NFL의 라인백을 연상케하는 우람한 체격이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보통의 미국인 여성들이 동양인 남성에게서는 느끼는 섹시함이란 마초적인 그런 쪽인 경우는 드물었다. 그들이 동양인 남성에게 느끼는 섹시함이란 여성스러움이 공존하는 퇴폐미적인 무언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엘렌 바크만이 성민에게서 느낀 감정은 조금 달랐다.
“성민, 김성민입니다.”
“아, 죄송해요. 영상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멋지셔서 저도 모르게 잠시 정신을 놨네요.”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발음이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 휴스턴의 아론 브라이언만큼 빛나는 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성민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매력은 그를 아론 브라이언만큼이나 반짝거린다는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야구 선수로서 이번 1년간 보여준 성민의 성적은 아론 브라이언이 따라오기 힘든 대단한 성적이었다.
대기실에서의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쇼가 시작됐다.
“안녕하세요. 엘렌 바크만입니다. 오늘은 미리 말씀드린 대로 아주 특별한 게스트 두 분을 모셨습니다. 이번 2033년 한 해. 우리 LA 시민들을 모두 행복하게 만들어준 멋진 남자들이죠? LA다저스의 원투 펀치. 디아고 헤밍턴 선수와 김성민 선수입니다.”
어마어마한 박수와 환호성이 스튜디오에 쏟아졌다.
커미셔너 트로피를 가져오는 순간, 이미 LA다저스의 선수들은 LA지역의 영웅이자 최고의 스타였다. 하물며 그 LA 다저스의 선수 가운데 우승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운 두 선수다. 이만한 환호성이 쏟아지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가벼운 인사가 오가고 몇 가지 의례적인 질답이 오갔다.
“미국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글쎄요, 역시 아무래도 가장 힘들었던 점은 디아고의 암내죠. 스프링 트레이닝에서부터 옆자리 라커였는데 정말 어마어마했어요. 처음에는 나에게 뭔가 텃세를 부리려고 일부러 이러나? 이런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풋
관중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얼굴이 시뻘게진 디아고 헤밍턴이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다들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저는 정말 평균적인 사람입니다. 데오트란트도 엄청 열심히 바른다고요. 이건 성민 쪽이 조금 이상한 겁니다. 이 친구는 땀을 흘려도 거기서 냄새가 안 나요. 마법의 겨드랑이죠.”
“하하, 저도 어디서 듣긴 들었어요. 그 한국인들은 이상하게 거기서 냄새가 안 나는 축복받은 겨드랑이의 소유자라고 하더군요.”
적당한 농담이 섞인 자연스러운 이야기들.
엘렌 바크만이 살짝 감탄했다. 지금까지 많은 운동선수를 데려다 놓고 쇼를 진행해봤지만, 이 정도로 방송이 자연스러운 남자는 처음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이야기를 끊을 줄 알고, 어디서 진지해야 할지, 어디서 유머를 터트려야 할지도 완벽하다.
단순한 질문과 답변, 질문과 답변의 연속이 아니라 성민의 이야기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저 멀리서 방송 스텝 하나가 커다란 판넬을 치켜들었다. 성민과 디아고 헤밍턴의 등 뒤에서 치켜들었던 터라 둘의 시선에는 들어오지 않는 위치다.
“아, 잠시만요. 지금 방금 놀라운 소식이 들어왔네요.”
“네? 무슨 소식인데요?”
“성민, 축하합니다. 2033시즌. 내셔널리그 투수 부문 실버슬러거에 선정됐어요.”
< 상류 사회(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