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20화 (121/287)

< 보너스(7) >

많은 투수가 등판 당일에는 더 예민해진다.

물론 이것은 성민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무도 등판 당일의 성민이 특별히 더 예민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쾅쾅쾅!!

“빌어먹을!! 이 염병할 물병은 또 왜 지랄이야.”

단지 물병 뚜껑이 잘 안 열린다는 이유로 광분하는 디아고 헤밍턴의 저 모습을 보라. 저게 너무 미쳐 날뛰는 것 아니냐고?

아니다. 그냥 보통보다 아주 약간 더 흥분한 등판일의 선발투수다.

바로 어제 경기에서 성민이 완봉승을 거둔 것이 디아고 헤밍턴을 자극했다. 물론 그는 성민을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경쟁심은 어쩔 수 없다.

지금까지 디아고 자신이 등판하고, 성민이 등판하고 다시 사나흘 후에 등판할 때는 그래도 조금 덜했다.

하지만 오늘. 고작 하루의 텀을 두고 등판을 하는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안그래도 넘쳐나는 투쟁심 위에 아직 식지 않은 경쟁심이 얹어졌다.

만약 보통의 투수였다면 이 넘치는 흥분이 그를 망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디아고 헤밍턴은 조금 달랐다.

그는 메이저리그 현역 최고의 재능 소리를 듣는, 어쩌면 역사를 통틀어도 손가락 안에 들지 모르는 재능을 지닌 남자였다.

격정적인 감정이 그의 공에 힘을 불어넣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디아고 헤밍턴!! 오늘 속구가 굉장히 좋은데요? 10월 말, 1회 초임에도 불구하고 94.7마일이 나오고 있습니다.]

[구속도 구속입니다만 볼 끝이 굉장히 좋습니다. 디아고 헤밍턴 다음 김성민. 좌완과 우완. 95마일의 속구를 중심으로 한 피칭과 75마일의 너클볼을 중점으로 한 피칭. 시너지 효과에 대해서는 시즌 내내 입이 아플 정도로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오늘은 정확히 그 반대의 등판이거든요. 시즌 중에 김성민 선수가 받았던 그 무형의 시너지를 디아고 헤밍턴 선수가 받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게다가 양키스 타자들은 어제 무려 9이닝이나 김성민 선수에게 무기력하게 틀어막혔단 말이죠. 그것도 월드 시리즈 1차전 같이 큰 무대에서 말이죠. 이게 사람의 심리상 그렇게 강렬한 경험은 뇌리에 깊게 새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김성민 선수의 공이 아른거려서 디아고 헤밍턴 선수의 공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는 뭐 그런 말씀이신 거죠?]

배팅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다.

약간의 이미지. 하지만 선수의 타격이란 매우 정교한 작업이다. 그 약간의 이미지는 제법 큰 차이를 만든다. 물론 폼이 망가진 것도 아니고, 고작 그 정도는 금방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금방으로 충분했다. 디아고 헤밍턴은 그 약간의 틈만으로도 충분한 최고의 투수였으니까.

첫 번째 타순이 완벽하게 틀어막히고

두 번째 타순에서 산발적인 타격을 허용했고

세 번째 타순에서 1점을 내줬다.

그리고 7회.

“Fxxx!!!”

마운드에서 내려온 디아고 헤밍턴이 빈 물통을 걷어찼다.

7이닝 1실점.

보통의 투수라면 크게 자랑할만한 성적이다. 심지어 점수는 5:1 이기고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등판일의 디아고 헤밍턴은 화를 참지 않았다.

“올란도 준비시키지.”

“네. 몸 풀어두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팀 베이크 감독이 조용히 지시했다. 단순히 1점을 내줘서가 아니다. 점수를 내주기 전까지의 디아고는 자신의 감정을 피칭에 온전히 쏟아붓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세 번의 타순이 돌았고, 저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는 상황이다. 네 번째 타순을 맡길 상황은 아니었다.

-딱!!!

힘차게 돌아간 방망이가 올란도 마이클의 공을 두들겼다. 어제와 오늘 양키스의 타자들이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타격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막아냈던 성민, 그리고 디아고 헤밍턴이 얼마나 강력한 투수였는지를 LA 다저스의 특급 불펜인 올란도 마이클과 마리솔 구티에세르를 상대로 증명했다.

하지만 조금 늦었다.

4점.

물론 2이닝이면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점수다.

하지만 다저스의 타선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8:5

디아고 헤밍턴이 시리즈 두 번째 승리를 LA다저스에게 가져왔다.

[시리즈 스코어 2:0. 이제 승부는 다저 스타디움으로!!]

[드디어 타선에 불이 붙었나? 월드 시리즈 2차전 8:5!! 이제는 화끈한 타격전?]

-타선에 불붙는 소리 하네. 대충 봐도 그냥 성민이랑 디아고 그리고 욘 마르틴이 더럽게 잘 던졌던 거더구만.-

-근데 이제 화끈한 타격전 될 것 같긴 하다. 양키스야 뭐 양대 리그 최다득점 팀이니까 그렇다치고, 다저스도 내셔널리그에서 두 번째로 높은 득점 팀이었잖아. 심지어 얘넨 늘서인데. 얘들도 빠따 장난 아님.-

-근데 이제 다저 스타디움에서 내셔널리그 룰로 게임하잖아. 타격전이 될까?-

-될걸? 양키 스타디움도 제법 투수 구장인데 그 꼴이었고, 올란도 마이클이랑 마리솔 구티에세르가 그렇게 영혼까지 털린 거 보면 지금 쟤들 타선 진짜 장난 아님.-

다저 스타디움에서 열린 3차전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양 팀 투수 모두 컨텐더 팀의 선발투수들답게 3선발이라고 해도 리그 전체로 따지면 5, 60번째 정도에는 들어갈 만한 투수들이었다. 솔리드 하다는 표현이 적절한 투수들이다. 하지만 그 단단함으로는 역부족이었다.

1회부터 시작된 난타전.

지난 1, 2차전을 바라보며 영 터지지 않는 타선에 갑갑함을 느꼈던 팬들에게는 매우 흥미진진한 경기였다. 특히 다저스나 양키스 어느 특정팀을 응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재밌는 경기였다.

“제가 타자 출신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야구는 역시 쫄깃한 투수전도 좋지만, 이렇게 빵빵 터지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아, 물론 그렇다고 성민이 경기가 재미없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그게 참 제가 같은 팀이 아니라서 갑갑했지만 정말 저희 팀으로 꼭 데리고 오고 싶은 재목이었죠.”

“흐음, 그러니까 지금 LA까지 오셔서 성민이 스카웃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하고 계신거네요?”

“아니,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게 아니라.”

프레스톤 윌슨이 쩔쩔매는 사이, 경기는 쭉쭉 진행됐다.

14:11

양 팀 합계 25점이라는 터무니없는 점수를 만들어내며 경기가 끝났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다저스의 팬들은 분명하게 알게 됐다.

“성민이랑 디아고가 터무니 없는 거였어.”

“허, 1, 2차전에서 불펜을 그렇게 아끼고 여기서 다 털어먹었구만.”

“아니, 어떻게 제대로 막아내는 투수가 없는거야?”

“진정해, 아직 2:1이잖아. 그리고 성민이랑 디아고도 한 번씩은 더 등판할 수 있다고.”

그들의 원투펀치가 얼마나 역대급으로 강력한지를 말이다.

***

메이저 리그의 중심은 역시 리그를 사랑하는 팬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리그를 움직이는 가장 큰 논리는 자본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자본은 결국 다수의 팬에게서 나온다. 입장료뿐만이 아니다. 거액의 시청권료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 역시 그 게임을 관전하는 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월드 시리즈는 매우 행복한 시리즈였다. 명실상부한 메가마켓 팀 두 개가 맞붙는 대결이다. 그 높은 숫자에 사무국은 행복한 비명을 내질렀다.

“폭스에서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하겠다고 합니다.”

“폭스? 스포츠1? 2? 아니면 메인 채널? 시간은?”

“일단은 스포츠 2에 오후 3시 쇼라고 하는데 반응 보고 메인 채널에도 하나 올려주겠다고 합니다.”

“시발, 채널이야 그러라 치고 오후 3시? 미쳤군. 우리 경기 시작 전으로 편성하고 바로 이어하든지, 아니면 경기 끝난 직후로 편성하고 이어 하는 거 아니면 못하겠다고 전해. 아니, 아니야. 메인 채널이면 그 시간도 O.K.라고 해도 좋아. 하지만 스포츠 채널에 그 시간은 거절하도록 해. 아니 애초에 우리 경기가 메인 채널에서 송출되는데 스포츠 채널에 오후 3시라니. 어처구니가 없구만.”

무엇보다 양 팀 모두 화제성이 있었다. 사이 영 1, 2위를 다투는 역대급 원투펀치를 보유한 LA 다저스. 그리고 양대리그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타선을 갖춘 뉴욕 양키스. 특출난 스타가 없는 점은 조금 아쉽지만, 그거야 방송에서 밀어주기 나름이다.

사무국의 푸쉬를 받은 언론들에서 연일 다저스의 막강한 원투 펀치, 그리고 3차전에서 활약했던 양키스의 대포들을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다.

4차전.

1회 초.

마운드에 올랐던 다저스의 4선발 윌 카터가 턱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아냈다.

안타, 안타, 볼넷, 밀어내기 볼넷, 그리고 적시타.

아웃 카운트는 하나도 올라가지 않은 상황에서 벌써 2:0

다저스의 덕아웃이 요동쳤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재앙이야.”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기는. 살라만카는 준비 시켜뒀지?”

“네.”

아무리 다저스라고 해도 월드 시리즈를 5선발 체제로 가겠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나흘을 쉰 성민과 디아고 쪽이 쉴 만큼 쉰 빅터 살라만카보다는 좋은 투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윌 카터를 대신하여 빅터 살라만카가 마운드에 올라갔다.

5.2이닝 2자책. 생각 이상으로 준수한 성적이었다.

다만 안타까웠던 점은 1회 초 윌 카터가 남긴 주자들 가운데 무려 셋을 들여보냈다는 점 정도였다.

하지만 다저스의 타선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번 시즌 평균 득점이 약 0.6점이 차이가 나긴 했지만, 애초에 다저스는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양키스는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다. 지명 타자, 그리고 각 지구 구장들의 파크팩터를 생각한다면 그리 어마어마한 차이도 아니다.

무엇보다 오늘 경기는 내셔널리그의 룰에 의거해 다저스의 홈 구장인 다저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경기였다.

양키스는 승부를 원점으로 돌릴 기회였으며 다저스는 오늘 승리한다면 성민이나 디아고 둘 중 하나만 이전의 호투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리즈를 끝낼 기회였다.

양팀의 감독 모두 내일이 없는 것처럼 불펜과 대타를 투입했다.

25인의 로스터 가운데 선발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선수들이 투입되는 총력전.

12:9

어제 경기보다는 조금 적었지만, 마찬가지로 양팀 합계 21점이라는 점수를 뽑아내는 치열한 타격전이었다.

한 가지 달랐던 것은 이번 경기에서 웃는 쪽은 양키스가 아닌 다저스였다는 점이었다.

팀과 팀의 충돌, 팀의 모든 것을 내던진 힘 싸움에서 LA 다저스가 승리했다.

“괜찮아. 아직 끝난 거 아니야. 내일 경기 이기고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가면 승부는 모르는 거라고.”

“그래, 맞아. 시리즈 스코어 3:1에서 역전한 경기가 없던 것도 아니고, 우리도 해낼 수 있어. 우리가 새롭게 양키스의 전설을 쓰는 거라고.”

올해를 끝으로 뒤가 없을 양키스의 노장 리암 루카스가 선수들을 격려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5차전.

다저스의 마운드에 성민이 올라왔다. 그를 응원하는 5만 6천의 팬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단순히 마운드에 오른 것만으로도 양키 스타디움에서 완봉을 거뒀을 때 이상의 환호성이었다.

그리고 성민은 그 환호에 완벽하게 보답했다.

7이닝 5피안타 1볼넷 2실점.

마운드를 내려가는 시점에서 점수는 7:2

그렇게 성민이 마운드를 내려가는 순간, 모든 사람이 경기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현실로 이어졌다.

[시리즈 스코어 4:1 LA 다저스 압도적 우승!!]

[김성민 2경기 2승!! 16이닝 2실점. 평균자책점 1.125. 양키스를 완벽하게 제압하다!!]

[다저스의 원투펀치가 팀에 우승을 가져오다!!]

[월드시리즈 MVP 김성민!! 우승 보너스는 부산지역 아마추어 야구계 발전을 위한 재단 설립에 사용하겠다고 밝혀 화제!!]

[김성민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현!! ‘단순히 야구계 발전이 아니라, 소외당하는 취약계층의 어린아이들을 위해 좋은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지속해서 재단을 가꿔나갈 생각입니다.’]

< 보너스(7)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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