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19화 (120/287)

< 보너스(6) >

분명 욘 마르틴은 베테랑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0:0의 꽉 막힌 순간에서 끝까지 버텨내는 지구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오늘 경기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만 잘한다면 경기는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

욘 마르틴이 최선을 다해 피칭을 이어갔다.

분명 그의 각오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죠. 벌써 두 개나 막아줬잖아요.’

-마린스를 기준으로 하면 네 개지.

‘아니거든요. 마린스 기준으로 두 개고 객관적으로 한 개거든요. 제가 보기에 영감님은 마린스를 너무 나쁘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너야말로 마린스를 너무 후하게 추억하는 경향이 있어.

오늘 욘 마르틴의 상대인 성민은 지옥과도 같은 아수라장을 이미 11년이나 헤치고 나온 사내였다.

점수를 내지 못하는 것? 신경도 쓰지 않는다. 성민은 그저 야수들이 제 몫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뿌듯한 마음이었다.

애초에 선발투수가 해줘야 하는 일을 다 해줘도 4점 5점씩 내주는 일이 일상인 곳에서 11년을 뛰었다. 그런 주제에 점수는 또 더럽게 못 만들었다.

0:0?

할 일만 다 했을 뿐인데 아직 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여긴 천국이다.

월드 시리즈 1차전 원정 경기라는 커다란 부담 속에서도 성민의 피칭이 흔들리지 않았다. 가끔 안타를 허용하기는 했지만, 야구는 얼마나 많은 타자가 1루 베이스를 밟건 승패를 결정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타자가 다시 홈 베이스를 밟느냐다.

6회 말까지 0:0

그리고 7회 초 원아웃 상황에서 다저스의 9번 타자 페데리코 수의 첫 번째 타석.

-딱!!!

시원하게 잡아당긴 타구가 양키 스타디움의 담장을 넘어갔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의 선취점. 덕아웃에 앉아 있던 성민이 벌떡 일어났다. 1루를 지나 2루를 향해 달리던 페데리코 수 본인도 자신의 홈런에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자식!!”

“뭐야? 월드 시리즈 MVP를 노리고 지금까지 힘을 감추기라도 했다 이거냐?”

“숨기긴 뭘 숨깁니까. 그냥 숨겨져있던 재능이 드디어 폭발한 거죠.”

“이 자식이? 재능 같은 소리 하고있네.”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페데리코 수의 몸으로 애정이 듬뿍 담긴 손바닥이 쏟아졌다.

1:0

다저스의 선수들이 그 기세를 바탕으로 추가점을 만들기 위해 힘을 썼다. 하지만 욘 마르틴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직 1점이야.’

33세의 베테랑.

현역 투수 가운데 명예의 전당에 가장 가까운 사나이.

-뻐엉!!!

“스트라잌!! 아웃!!”

욘 마르틴이 다저스의 야수들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팀 베이크 감독이 슬쩍 성민의 표정을 살폈다.

-그렇게 좋으냐?

‘당연히 좋죠. 이제 이긴 경기잖아요.’

-하여간 자신감 하나는 항상 넘쳐흐른다니까.

‘그래서 싫으십니까?’

-누가 싫다고 그랬냐? 너의 그 자신감이야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점이라는 거지.

슬쩍 올라간 입꼬리.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성민은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1점이면 충분하다.

상대는 2033년 아메리칸리그의 챔피언인 뉴욕 양키스였다.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성민은 마린스를 이끌고 2032년 KBO 통합우승을 달성했던 에이스였다. 그런 그를 세계 최고의 팀 LA 다저스가 도와준다?

-딱!!

[낮게 깔린 타구, 유격수 페데리코 수 받아서 2루에!!]

“아웃!!”

[이루수 마르타 블랑코 그대로 일루로!! 케빈 체임벌린의 미트를 벗어나지 않는 정확한 송구!!]

“아웃!!”

[더블 아웃!! 7회 말, 양키스의 공격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김성민이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훌륭한 병살 유도였어요. 김성민 선수의 저 바깥쪽으로 낮게 깔려 들어오는 느린 너클볼은 정말 높은 확률로 땅볼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수비를 가정하고 공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훌륭한 결과들이 나타났다.

1차전 1:0 상황.

7회까지 무실점. 하지만 삼진을 펑펑 잡아내는 것까지는 아닌 상황이었다. 팀 베이크 감독이 잠시 고민했다. 지금 이성적으로 가장 올바른 선택은 100마일에 가까운 공을 뿌려대는 불펜을 투입하는 것이다.

최고 92마일 평균 89마일의 속구와 74마일, 60마일의 너클볼을 던지는 성민 다음에 저런 강속구 투수라면 1이닝 정도는 삭제가 가능하다.

실제로 좌완 주제에 최고 98마일의 공을 던지는 특급 셋업 로사 가르시아와 성민의 궁합은 아주 훌륭했다. 성민 이후로 등판했을 때만을 따지면 로사 가르시아의 평자책은 0.69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아무리 잘 풀리는 경기라도 언제 삐끗할지 모르는 일반적인 너클볼 투수의 이미지와 다르게, 성민이 지난 1년 동안 보여준 모습은 안정감 그 자체였다.

“성민 좀 어때?”

“쌩쌩합니다.”

일반적인 너클볼 투수의 경우 공의 회전수를 억제하는 것에 철저하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마지막 너클볼 투수였던 R.A 디키도 그랬듯이 성민은 구속에도 상당한 신경을 쏟았다. 아니 R.A디키 조차도 성민에 비하면 그저 공의 회전수에만 신경을 썼던 평범한 너클볼 투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더 빠른 공을 던진다는 것은 그만큼 더 몸을 쥐어짜낸다는 의미다. 성민이 일반적인 너클볼 투수와 달리 밥 먹듯이 완봉을 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괜찮았다.

-오늘 낮게 제구된 느린 너클볼이 잘 먹히고 있어. 확실히 양키 스타디움 같이 홈런 파크팩터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곳에서는 땅볼을 유도하는 쪽이 좋지. 무엇보다 내야진이 마린스가 아니라는 점이 아주 유효해.

‘아니, 애초에 제가 생각했던 건데, 마치 영감님이 저한테 충고해서 실행하는 것처럼 말씀하시지 말아 주셨으면 하는데요.’

-아니, 다저스의 내야진을 믿으라는 말은 내가 해줬던 말이잖냐.

양키스는 8회 초, 자신들의 셋업 투수인 다니엘 브리토를 마운드에 올렸다.

그들은 이번 시즌 경기당 평균 5.80의 점수를 만들었던 강팀이었다. 내셔널리그의 패자 다저스조차도 경기당 평균 득점은 5.28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들의 공격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오늘 경기는 한 경기 한 경기의 승패가 모든 것을 가를지도 모르는 월드 시리즈였다. 하물며 점수 차이는 고작 1점. 정규시즌이라도 경기를 포기하기에는 너무 적은 점수 차이였다.

다저스의 공격이 끝나고 다시 양키스의 공격.

마무리 투수가 올라와 다시 한번.

그리고 마지막.

[아, 다저스가 투수를 교체하지 않습니다. 1:0 상황. 김성민 선수가 또다시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지금은 마무리 투수인 마리솔 구티에세르나 하다 못 해 셋업맨인 로사 가르시아를 올리는 편이 더 낫지 않나 싶은데요. 실제로 로사 가르시아 선수 같은 경우 이번 시즌 평자책이 2.17인데 김성민 선수 뒤에 등판했던 1이닝만 떼놓고 보면 0.69에 불과하거든요.]

[저도 동의합니다. 물론 선발투수들을 믿어 주는 팀 베이크 감독의 성향은 칭찬할 만합니다. 정규시즌에 1회에 4실점을 한 투수를 다시 2회 3회까지 맡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규시즌 로테이션을 지키는 것이 시즌 전체에 도움이 될 때의 이야기거든요. 지금은 월드 시리즈고, 월드 시리즈는 벼랑 끝 승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건 조금 아쉬운 모습입니다.]

성민이 9회 말에도 다시 한번 마운드에 올라왔다.

1:0 상황.

‘지금 투구수가 97개야. 양키스의 타자들도, 우리 애들도 오늘 제대로 된 타격을 못 보여주고 있지만, 그건 얘들 문제가 아니였어. 단지 욘 마르틴이랑 성민이가 너무 좋았던 것뿐이지.’

실제로 8회와 9회 다저스의 타자들은 양키스의 불펜을 상대로 거의 추가점을 뽑을 뻔했다. 그들이 추가점을 만들지 못한 것은 순전히 운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양키스의 셋업과 마무리는 앞선 이닝 욘 마르틴이 타자들을 압도하던 것같은 위압감을 뿜어내지 못했다.

게다가 이번 이닝 선두 타자는 7번 타자인 토니 화이트다. 대타를 감안해도 상위 타순과 비교하면 한수 뒤떨어진다.

게다가 완전히 성민만을 믿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불펜에서는 로사 가르시아가 몸을 풀어두고 있었다. 혹시라도 무언가를 허용한다면 바로 교체를 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쓸데없는 생각과 배려였다.

삼진. 내야 뜬공. 그리고 마지막

-딱!!

[우중간 높게 뜬 타구!! 우측 담장을!! 우측 담장을!!!!]

[우익수 세실리아 마토스가 잡아냅니다. 아웃!! 경기 끝났습니다. 월드 시리즈 1차전. 다저스와 양키스의 경기. 다저스가 1:0으로 경기를 가져옵니다. 김성민 9이닝 완봉승]

사람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9번 타자의 깊숙한 코스 외야 플라이.

마운드에 선 성민이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양키스의 홈구장인 양키 스타디움.

저 멀리 대륙의 반대편에서 날아온 다저스의 팬도 소수 있긴 했지만, 구장을 가득 채운 팬 대부분이 양키스의 팬이었다.

-짝짝짝

그렇기에 곳곳에서 약간의 박수와 환호가 나오기는 했지만, 오늘 1차전에서 성민이 보여준 모습을 생각한다면 너무 작고 미약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성민의 옆에 선 누군가가 아무도 듣지 못하는, 오직 성민만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성대한 축하를 건내주고 있었으니까.

[김성민!! 월드시리즈 1차전 1:0 완봉승!!]

[홀로 뉴욕 양키스를 압도한 김성민. 시리즈의 첫 단추를 완벽하게 꿰어내다.]

[9이닝 7피안타 1 폭투 2볼넷 무실점. 사이 영 컨텐더의 위력을 어김없이 뽐내는 김성민!!]

-와, 나 이 경기 실시간으로 봤는데, 경기 끝내고 마운드에서 손 치켜드는 거 진짜 소름 돋았음.-

-KBC도 센스가 있더라. 다른 거 찍을 수도 있는데, 굳이 그 장면 한 3초인가? 계속 보여주더라고.-

-그거 한국 방송국에서 송출한 화면 아니야. 한국은 미국에서 송출한 화면에 해설만 할 수 있어. 미국 전역으로 송출된 화면인거임.-

-크, 그러니까 지금 미국 방송국들도 김성민 완봉하고 그런 거 뿅 갔다는 거잖아.

-그니까 국뽕 빼고 봐도 존나 멋진 장면이었다 이거지.-

-월드 시리즈 MVP 각입니까?-

-진지 빨고 이야기하면 두 번째 등판까지 잘해야 가능할 듯.-

-만약 두 번째 등판이 없다면?-

-글쎄다, 아무리 다저스라도 양키스를 스윕을 할 것 같지는 않아서. 만약 4차전에서 끝나면 1차전 완봉은 좀 이미지가 옅어져서 MVP 될지는 잘 모르겠음.-

“엄마, 내일도 경기 보러 오는거지?”

“어, 내일은 제시도 작은 애는 일일 보모에게 맡기고 온다고 해서 같이 보러 가기로 했어.”

“그래도 어떻게 표를 구하기는 구했네. 홈경기도 아니고, 내 등판도 아닌 데다가 월드 시리즈라서 우리 클러비들도 이렇게 갑자기는 표 구하기 힘들다고 고개 흔들던데.”

“아니, 그게 그냥 어쩌다 보니까.”

부끄러운 표정으로 어물어물하는 권여사를 바라보며 성민이 웃었다.

물론 월드시리즈 원정 구장의 표를 구하는 건 제법 어려운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돈만 있다면 클러비들의 인맥으로 못 구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성민이 굳이 그럴 이유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민이 넌 역시 정상이 아니야.

‘아니, 기분이야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만 100세 시대인데 우리 엄마 아직 환갑도 안 됐잖아요. 거의 30년을 독수공방했는데 엄마도 이제는 연애 좀 하고 살아야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부모의 연애를 지지하는 아들이라니. 하여간 말세라니까.

‘근데 미국 영화 보면 애들이 다들 쿨하게 그런 거 지지하던데요.’

-하여간 헐리웃이 애들을 다 버려놨다니까. 세상 어느 자식이 부모 연애를 지지한단 말이냐.

같은 시간.

프레스톤 윌슨은 진지하게 남은 월드시리즈 관람을 위해 LA로 날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 보너스(6)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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