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너스(5) >
월드 시리즈 1차전, 1회 초 다저스의 공격이 끝났다.
양키 스타디움의 마운드.
성민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월드시리즈라고 해도 생각보다 별건 없는데요?’
-전 세계 수십만 야구인에게 돌 맞을 소리 하고 있구나. 그 자리에 서길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긴 하는 거냐? 한 팀에서 평생을 바친 녀석도 딱 한 번이라도 서보기 위해 말년에 자기 팀을 버리고, 그런 선수의 선택을 존중하는 게 바로 그 자리다.
‘저도 알죠. 그래서 저도 서보고 싶었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별 감흥은 없네요. 차라리 작년에 한국 시리즈 7차전 무대가 더 설렜던 것 같단 말이죠.’
-아니, 그거야. 세상에 어떤 일이건 거기에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거의 첫애가 신생아실에서 손가락 꼬물거리는 것만큼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라고.
‘그 정도입니까?’
-내가 마린스에서 11년을 뛰었다면 아마 그런 느낌일 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숫자는 객관적이지만 거기서 받는 충족감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로또에 당첨돼서 구매한 34평짜리 아파트보다 11년간 아등바등 돈을 모아 마련한 17평짜리 연립주택 쪽에 더 애착이 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4평 아파트는 34평 아파트고, 17평 연립은 17평 연립이다.
고작해야 미국의 로컬 챔피언을 가리는 결승 주제에 ‘월드’ 시리즈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무대. 하지만 그럼에도 야구를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무대다.
바로 그런 무대의 마운드에서 성민이 초구를 뿌렸다.
73.4마일의 고속 너클볼.
-부웅!!
“스트라잌!!”
양키스의 1번 타자 에노모토 코이치가 방망이를 헛돌렸다.
이번 시즌 올스타 외야수. 양키스라는 전국구 인기팀 빨로 올스타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돌기는 했지만, 그가 전반기에 보여준 활약은 분명 올스타에 선정될 만했다.
게다가 올스타전 이후 하반기에는 한층 더 대단한 활약을 보여줬다.
시즌 성적 0.289/0.377/0.451
에노모토 코이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올스타전에서 이미 한 번 경험해보긴 했지만,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예 한 번도 상대해보지 못했던 것보다는 나았다.
올스타전 이후 머릿속에서 수십 번, 아니 어쩌면 수백 번 정도 돌려본 공이었으니까. 그 경기 성민의 공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에게 너클볼이란 태어나서 지금까지 상대해본 그 어떤 공과도 다른 이질감이 느껴지는 공이었다.
에드 맥밀란이 성민에게 싸인을 보냈다.
‘존 밖으로 하나 빼자고.’
‘굳이?’
‘지금 휘두르려고 작정한 녀석이야. 느린 너클볼로 하나 가자. 잘하면 내야땅볼로 끝낼 수 있을 거야.’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61.9마일의 너클볼이 성민의 손을 떠났다.
술 취한 것처럼 비틀대며 날아드는 야구공.
타석에 선 에노모토 코이치가 그 공을 지켜봤다. 8살 처음 배트를 쥔 이래 야구 인생 20년. 그의 축적된 경험과 감각이 소리쳤다.
‘빠졌어!!’
그가 돌아가던 방망이를 멈춰 세웠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존 밖으로 빠져나갈 것처럼 꿈틀거리던 공이 자연스럽게 안으로 휘어 들어왔다.
-뻐엉!!
“스트라잌!!”
간신히 공을 잡아낸 에드 맥밀란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랬다.
‘아슬아슬했어.’
공을 던진 투수는 존 밖을 겨냥했고, 공을 받을 포수도 존 밖으로 들어올 공을 기다렸으며 공을 치려는 타자도 존 밖을 예상했다. 그저 공이 혼자 존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너클볼은 본래 그런 공이니까.
세 번째.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
정확하게 제구된 90.9마일의 속구가 날아들었다.
-딱!!
KBO에서라면 충분한 강속구. 하지만 MLB에서는 평균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느린 공. 그럼에도 61.9마일의 너클볼 직후에 들어오는 90.9마일의 잘 제구된 속구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높게 뜬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김 성민!! 높게 뜬 타구를 가볍게 잡아냅니다.]
[좋은 속구였습니다.]
[사실 속구 자체로만 보면 그렇게 좋은 속구는 아니죠. 90.9마일에 회전수도 평범하고, KBO에서야 상대를 윽박지를 수 있는 좋은 공이지만 메이저에서는 리그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속구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참 결과가 좋단 말이죠.]
[맞습니다. 이게 결과값만 놓고 보면 김성민 선수의 속구는 리그에서 27번째로 좋은 속구였어요.]
[많은 분석이 있긴 합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는 김성민 선수의 속구는 일종의 변화구처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변화구요?]
[네, 다른 투수들이 속구를 기본으로 하는 피칭이라면, 김성민 선수는 너클볼을 기본으로 하는 피칭을 가져가는 거죠. 거기에 타자들의 범타를 유도하는 용도로 저렇게 잘 제구된 속구를 찔러넣는 거고요. 보면 김성민 선수의 속구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타자들의 몸쪽 높은 코스에 주로 위치하거든요.]
[아, 그렇네요.]
[물론 이게 가끔 간파당하면 홈런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지금까지만 보면 쏠쏠하게 재미를 보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특별히 더 긴장하는 일은 없었다.
평소 시즌을 치르는 것처럼 부담 없이. 성민이 양키스의 타자들을 연달아 돌려세웠다. 영상을 통해 충분히 살펴봤지만, 전혀 생소한 투수였다. 심지어 성민은 비슷한 유형의 투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리그에 제대로 된 너클볼 투수가 없었던 게 벌써 16년.
그들에게 성민은 생소함 그 자체다.
과거 NPB 출신의 선수들이 처음 MLB에 왔던 시절, 그들은 이미 MLB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포크볼, 혹은 메이저와는 조금 다른 스타일의 스플리터로 쏠쏠하게 재미를 본 적이 있었다.
성민 역시 그와 비슷했다.
양키스의 타자들에게 너클볼은 너무 생소한 영역의 공이었다. 게다가 성민의 스타일은 너클볼 투수 가운데서도 독보적이다.
1회 말, 양키스의 타자들이 성민의 공에 고전했다.
하지만 투수의 공에 고생하는 것은 양키스의 타자만이 아니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평소 성민에게 충분한 점수를 제공하던 다저스의 타선 역시 고전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하여간 저 능구렁이 공은 언제 봐도 엿 같다니까.”
덕아웃으로 돌아온 에드 맥밀란이 헬멧을 집어 던졌다.
이번 시즌 평균자책점 3.36
단순히 숫자로만 따진다면 다저스의 3선발인 존슨과 크게 차이나는 수준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뛰는 곳이 지명타자를 사용하는 아메리칸리그. 그중에서도 타자 친화 구장이 많은 동부지구 소속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3.36이라는 숫자는 디아고 헤밍턴이나 성민과 비교해도 크게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미터 3센티의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최고 97마일대의 속구와 94마일을 오가는 커터. 87마일의 슬라이더와 76마일의 체인지업. 범타를 유도하는 구종과 좌우 타자를 가리지 않고 삼진을 잡아낼 수 있는 구종을 두루 갖췄다. 게다가 커맨드 역시 훌륭하다.
올해 33세의 욘 마르틴은 리그에서 가장 훌륭한 투수였고, 여전히 최고 수준에서 경쟁하는 투수이며 완성도와 안정감에서 가장 훌륭한 평가를 받는 투수다.
“욘, 오늘도 공 아주 좋아.”
“당연하지. 아직 저런 애송이들한테 따라잡히기에는 이르다고. 게다가 여긴 우리 집이야. 여기서 쪽팔릴 수는 없지.”
욘 마르틴이 어깨를 으쓱하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2회 말, 성민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딱!!
선두타자 초구 외야 플라이 아웃.
그리고 타석에 5번 타자가 들어왔다.
2미터 7센티. 137킬로그램
단순한 배불뚝이가 아니었다. 고대의 헤라클레스가 이러했을까? 그야말로 압도적인 체격의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리암 루카스. 데릭 지터 이후로 양키스의 아이콘이 될‘뻔’했던 사나이였다.
올해 나이 39세. 메이저 16년 차.
그는 8년 전 양키스와 8년 3억 달러의 계약을 체결했고, 올해로 그 계약의 종료를 앞두고 있었다.
지난 8년간 그가 쌓은 WAR은 27.7. 그가 중간에 부상으로 1년을 통째로 날린 것을 고려한다면 그럭저럭 준수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의 계약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 8년 가운데 양키스가 우승했던 것은 단 한 번. 그가 부상으로 시즌아웃됐던 그 해뿐이다.
사실 우승을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기준이기는 했다. 그가 활약한 시즌에 양키스가 우승하지 못했던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메가마켓에서 뛴다는 것은 그런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팬들을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리암 루카스가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마치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 쓴 거대한 곰이 타석에 선 것 같다.
나이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최근 그의 하락세를 생각한다면 어쩌면 리암 루카스에게 주어진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일지 몰랐다.
성민이 신중하게 공의 실밥을 움켜쥐었다.
-큰 무대, 저런 한 방을 가진 노장은 조심해야 한다.
‘저도 프로 12년 차입니다. 알 건 다 알아요.’
-큰 무대 자체가 작년이 처음이었으면서 아는 척하기는.
‘아니, 포시는 그렇다지만 저 국제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거든요?’
베테랑 노장인지 뭔지는 제쳐두고라도 저 체격만 보더라도 비켜 맞은 공을 우격다짐으로 담장 밖으로 날려 보낼 체격이다.
-데이터는 기억하지?
‘전성기에는 3할을 칠 수 있는 40홈런 타자. 지금은 2할 5푼도 못 치는 40홈런 타자.’
전성기에도 사실 선구안이 그렇게 좋은 타자는 아니었다. 단지 존을 벗어난 공까지 안타로 만드는 압도적인 괴력을 자랑했던 것뿐이다. 나이를 먹은 지금은 그냥 살살 존 밖으로 빠지는 공으로 유인하면 알아서 자멸하는 타입이다.
이번 시즌에는 6번이나 7번으로도 많이 출장했었다.
오늘 경기 5번으로 출장한 것은 성민을 상대하기에는 어설프게 다 잘하는 타자보다는 리암 루카스 같은 압도적인 파워툴을 갖춘 타자 쪽이 더 유리할 것 같다는 감독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도 기억하고?
성민이 대답 대신 공을 움켜쥐었다.
노리는 것은 존을 빠져나가는 빠른 너클볼.
74.1마일의 고속 너클볼이 날아갔다. 회전수 3.3회의 평범한 고속 너클볼이었다.
약간의 아쉬움.
리암 루카스의 방망이가 벼락처럼 움직였다.
강한 스윙.
하지만 존을 완전히 벗어나는 너클볼이다. 그나마 스윙 자체가 워낙에 강력했기에 공이 떠오르기는 떠올랐지만 딱 거기까지다.
뒤로 다섯 걸음 물러난 페데리코 수가 가볍게 타구를 잡아냈다.
아웃.
양키스와 다저스의 타자들이 서로 상대방의 선발들을 공략하지 못하는 상태로 경기가 진행됐다.
그리고 양키 스타디움의 관중석.
“여긴 포스트시즌인데도 경기장이 꽤 조용하네요?”
“하하, 아무래도 관람문화가 한국과는 많이 다르죠. 저도 진호의 초대로 한국에 가서 깜짝 놀랐었습니다. 정말 활기차더군요. 아, 하지만 그래도 이 프라임립 샌드위치는 한국의 경기장 음식에 뒤지지 않을 겁니다.”
“아, 네. 그렇군요.”
권 여사가 새침하게 프레스톤이 주는 샌드위치를 받아들었다.
< 보너스(5)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