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17화 (118/287)

< 보너스(4) >

월드 시리즈다.

이제 4살 2살밖에 안 된 아이 둘을 건사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제시 헤밍턴은 자기 남편 디아고 헤밍턴의 경기를 보기 위해 굳이 뉴욕을 찾았다.

물론 본인도 잠시 집 안에서 벗어나 뉴욕의 공기를 맡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바다 건너.

아들이 수백억을 버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사업을 이어나가던 어느 어머니도 이번만큼은 큰마음 먹고 과감하게 12일짜리 휴가를 사용했다.

“어휴, 뭐 이런 걸 다.”

“별 건 아니에요. 그냥 요리 좋아한다고 해서 그냥 소스 좀 구해왔어요.”

제시 헤밍턴의 이야기에 대답하는 권 여사의 모습에 성민이 깜짝 놀랐다.

“뭐야? 엄마? 영어도 할 줄 알았어?”

“엄마 젊을 때는 문과가 대기업 가려면 토익 900은 필수였어. 뭐, 안 한 지 오래돼서 좀 가물가물하긴 했지만, 아들이 미국에 갔는데 엄마도 영어는 공부해야지.”

발음은 많이 어색했지만, 또박또박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였다.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어.

‘남의 엄마 마음대로 인물평 하지 마시고요.’

권 여사가 제시와 릴리를 한번씩 안아들었다.

그리고 성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얘, 성민아. 저기 저쪽에 네 친구랑 같이 잠깐 애들이랑 좀 놀아줘. 여자가 매일 집에서 애 보다가 이렇게 나오고 그러면 잠깐 수다도 떨면서 숨도 좀 돌리고 하게 해줘야지. 엄마도 너 키울 때 친구가 와서 30분, 1시간씩 너 봐주는 게 그렇게 고맙더라.”

“알았어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제시가 유모에게 잠시 아이들을 맡기고 오겠다는 것을 그냥 데리고 와도 괜찮다고 이야기한 것이 성민이었다. 자기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동료를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 무엇보다 성민 본인도 30분 정도는 귀여운 아이들과 노는 시간이 기꺼웠다.

성민과 디아고 헤밍턴이 잠시 아이를 안고 놀아주는 사이 제시 헤밍턴과 권 여사가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건 10년간 발효시킨 간장인데 따로 진간장이라고 불러요. 250년 묵은 씨장으로 발효시킨 간장인데 생선이나 고기 요리에 간 맞추는 용도로 조금씩 사용하면 아주 좋을 거예요.”

“와우, 250년이요? 그러면 구하기 아주, 어려운 소스 아닌가요?”

“물론 공개적으로 판매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이렇게 알음알음 구해야 하는 물건이기는 한데, 뭐, 너무 부담 느끼지는 말아요. 이역만리 타향에 와서 고생하는 우리 아들이랑 친하게 지내줘서 너무 고마워서 준비한 거니까.”

“어휴, 친하게 지내줘서 고맙다니요. 성민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요. 저희 릴리랑 스텔라 모두 성민을 매우 좋아해요.”

“다행이네요. 하긴, 우리 성민이도 이제 결혼할 때가 돼서인지 아이들을 참 좋아하긴 해요.”

어느새 두 사람은 각자의 스마트폰을 꺼내 페이스북 친구추가까지 덜커덕 맺어 버렸다. 한국에서 페이스북이 거의 SNS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반면 미국에서는 카카오톡과 같은 국민 메신저 수준의 취급을 받고 있다.

즉, 지금 권 여사는 자연스럽게 첫 만남에서 그 짧은 시간만에 성민의 측근과 다이렉트로 통하는 정보 라인을 뚫은 셈이었다.

한 걸음 뒤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필 니크로가 감탄했다.

과연 저런 어머니 밑에서 자랐기에 저런 인간이 탄생한 것이로구나.

제법 즐거운 식사를 끝내고 성민 본인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

“성민아, 애기들 너무 예쁘지 않던?”

“엄마.”

“아니, 누가 뭐라고 했니? 왜 눈에 쌍심지를 키고 있어. 엄마는 그냥 애기들 예쁘지 않냐 이 말이지.”

“엄마 그때 뭐라고 했어요. 나 FA 대박 나면 이제 상관 안 한다고 했잖아요.”

“아니, 그거야 네가 한국에서 대박을 낼 줄 알았지. 누가 이 미국 땅까지 올 줄 알았겠니. 너도 이제 30대 중반이 코앞이야. 어버버하면 곧 마흔이다. 돈만 많으면 뭘 해. 늙어서 그 돈 알콩달콩하게 같이 쓸 사람이랑, 미우나 고우나 자식새끼가 있어야지.”

성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성민이 권 여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혼자 돼서 억척스럽게 성민을 키워냈다. 피붙이라고는 오직 성민뿐이다. 성민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고, 성민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성민으로서는 그리 달갑지 않다.

단순히 엄마가 자신에게 집착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100세 시대라는 말이 유행한 지도 벌써 20년이 지났다. 아직 권 여사에게는 인생의 절반이 남아있다. 그 남은 절반의 인생을 지금이라도 권 여사 자신을 위해 썼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건 엄마가 걱정 안 해도 알아서 잘하는 일이고요. 엄마나 좀 잘 해보라니까요. 주위에 괜찮은 아저씨 없어요?”

“아니, 얘가 대체 뭐라는 거야. 내일모레면 환갑인 엄마한테 아주 못 하는 소리가 없다니까.”

“그리고 엄마.”

“왜?”

“그거 하지 마세요.”

“뭐?”

“제 친구들이랑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거요. 한국 있을 때야 조금 극성인 부모님 정도로 생각하지만, 여기 애들은 엄마가 그렇게 하는 순간 절 찐따 취급할거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필 니크로가 한 걸음 뒤에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관전했다. 뭔가를 눈치 챈 것 같은 성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얘가 무슨 소리 하냐는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 권 여사.

팝콘이 없는 것이 아쉽다.

“저 애들이랑 놀라고 보내놓고 제시랑 연락처 주고 받았잖아요.”

“봤니?”

“당연히 봤죠. 그거 진짜 하지 마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미국이랑 한국이랑은 진짜 문화가 달라요. 여기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요.”

“아니. 엄마는 그냥 친하게 지내겠다 뭐 그런 생각으로.”

“어쨌든 절대 안 됩니다.”

“알았다. 알았어. 어휴, 내가 아들이라고 하나 죽을 동 살 동해서 키워놨더니 이제 머리 좀 굵었다고 아주 제 엄마를 잡아먹으려고 들고.”

“그 레파토리 10년째 써먹고 있거든요. 이제 안 통해요.”

“그러냐? 어쨌거나 성민아. 엄마는 인종에 편견이 없다. 퍼런눈에 시뻘건 머리를 한 며느리도, 꼬불머리에 검은 피부의 며느리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오픈된 마음을 갖고 있어. 원래 서양 애들이 뼈대도 굵고 튼튼하다더라.”

절대 포기하지 않는 권 여사의 모습에 성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뭔가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겠어.’

+++

-그런데 애들이랑 노느라 정신없는 것 같았는데 그건 또 어디서 본 거냐?

‘뭘요?’

-아니, 너희 어머니가 제시랑 연락처 교환하는 거 말이다.

‘아, 그거요. 당연히 못 봤죠. 근데 볼 필요가 뭐 있습니까. 너무 뻔한 이야기인데.’

***

월드 시리즈 미디어 데이.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김성민 선수, 데뷔 시즌에 월드 시리즈 1차전에 선발 등판하게 됐는데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

“포스트시즌 들어 첫 원정 경기 등판입니다. 걱정되는 부분은 없으신가요?”

“이번 시즌 김성민 선수의 유일한 약점으로 지적됐던 부분이 피홈런인데요, 양키 스타디움 같은 경우 다른 팩터는 그리 높지 않습니다만, 홈런 팩터가 특히 높은 구장으로 손꼽힙니다. 이에 특별히 생각해두신 부분이 있을까요?”

“우승할 자신은 있으신가요?”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

“마이크 올리버 선수 대신 에드 맥밀란 선수가 공을 받아주고 있는데 불편한 점은 혹시 없으신가요?”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 성민이 빵긋 웃으며 침착하게 답변하기 시작했다.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입니다. 강한 책임감도 느끼고 있죠. 하지만 제가 고작 그런 것에 무너져 내릴 사람이었다면 이 자리에 서지도 못 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솔직히 부담감으로 따지면 마린스 야수들을 등 뒤에 두고 공을 던지는 것만큼 큰 부담이 있을까.

“확실히 홈경기가 부담이 덜 하기는 합니다. 홈팬들의 응원을 직접적으로 받으면 없던 힘도 생겨나니까요. 하지만 TV 너머로, 모니터 너머로 저를 응원해주실 수많은 팬 분을 생각하며 마치 홈처럼 힘을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여간 말은 잘한다니까. 홈의 이점은 익숙한 경기장. 그리고 이동 거리로 인한 피로감 정도인데, 애초에 이동을 안 했으니 피로는 없고, 다저스 야수진이야 역대급이니 수비도 크게 문제가 될 게 없겠지.

“우리 팀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팀입니다. 강력한 타선. 리그에서 가장 좋았던 수비. 불펜 역시 양대 리그를 통틀어 가장 낮은 평자책을 기록했죠. 무엇보다 이건 제 입으로 말하기 조금 부끄럽습니다만 우리 선발진은 환상적입니다. 이런 팀이 우승할 자신이 없다면 말이 안 되죠.”

-확실히 그건 그렇지.

“제 몸 상태는 아주 좋습니다. 그리고 에드와는 시즌 중에도 꾸준히 연습을 해왔습니다. 에드는 명성에 어울리는 실력과 그 이상의 성실함을 갖춘 좋은 친구입니다. 마이크만큼이나 에드 역시 믿고 던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립서비스를 끝으로 성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디어 데이 이후로 이어지는 가벼운 호텔 디너.

사실 내일 선발로 등판하는 성민은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괜찮은 자리였다.

하지만 성민은 효자였다. 바로 어제 엄마와 감정적으로 마찰이 있었건 없었건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성민의 어머니는 이제 막 3살이 되던 성민을 혼자 이렇게까지 키워낸 여성이었다. 이제 30대 중반을 목전에 둔 성민이었기에,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조금은 이해하고 있었다.

“성민아, 엄마는 진짜 괜찮은데. 너 내일 경기인데 이렇게 있어도 괜찮아?”

“어휴. 괜찮다니까. 뭐 어차피 내가 여기 음식들 우걱우걱 먹을 것도 아니고, 엄마도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미국식 파티 한 번은 즐겨봐야지.”

특별히 대단한 파티는 아니었다. 간단한 음식과 칵테일.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과 정장을 입은 관계자들. 그리고 몇몇 선수의 가족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는 자리였다.

디아고 헤밍턴의 아내인 제시 헤밍턴은 아이들을 돌보느라 참가하지 못했다.

“아니, 여기가 지금 우리가 참가할 자리가 아니라니까요. 탈락한 주제에 여길 대체 왜 오자는 겁니까.”

“인마, 뉴욕에서 열리는 야구인들의 파티인데, 이 몸이 빠져서야 쓰겠어? 내가 어? 또 뉴욕에 남아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야구인 아니냐.”

“그건 또 무슨 헛소리에요. 당장 커미셔너도 뉴욕에 버젓하게 살고 있구만.”

“커미셔너야 그냥 책상물림이고, 유명세로는 내가 최고지.”

“어디 영향력이 유명세로 됩니까? 당장 커미셔너가 뒤에서 구단주랑 쑥덕쑥덕 몇 마디만 해도 파리목숨처럼 날아갈 수 있는 게 감독이고 코치인데.”

“그러면 커미셔너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야구인으로 하자.”

익숙한 콤비가 특유의 헛소리를 주고 받으며 파티 장소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프레스톤 윌슨 감독과 호세 레예스 코치.

얼마 전,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다저스에게 와장창 깨졌던 메츠의 레전드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어! 저기, 저깄다. 헤이 성민!! 성민!!”

“아, 쫌. 그냥 가서 조용히 부르자고요. 부끄럽게 왜 이럽니까.”

“평소에는 훨씬 부끄러운 짓도 당당하게 하는 주제에 오늘은 왜 이렇게 소극적이야.”

“아니, 우리 떨어졌잖아요. 이거 SNS에 퍼지면 진짜 꼴이 우습다고요.”

“나이가 몇 개인데 아직 그런 걸 하는 거야.”

“팀에서 SNS 안 하는 거 선배 뿐이거든요?”

성민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헐.”

“왜? 성민아 갑자기 왜 그래?”

“프레스톤 윌슨 감독님이에요.”

“그게 누군데?”

“그 있잖아요. 강진호 선수 영혼의 단짝.”

“아? 그 발가락 반지?”

사람들을 헤치고 프레스톤 윌슨이 성민에게 다가왔다.

“성민, 반가워. 내가 누군지는 알지? 바로 며칠 전까지 얼굴 마주 봤잖아. 그래서 말인······. 흠흠, 안녕하십니까. 뉴욕 메츠의 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프레스톤 윌슨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성함이?”

“선배, 갑자기 왜 목소리는 깔고 그러쇼?”

!?

성민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던 프레스톤 윌슨이 갑자기 정중하게 성민의 어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야, 잠깐만 이거?

< 보너스(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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